소설리스트

프로페서-215화 (215/500)

215화 : < 81장. 사람이 사람에게 (2) >

“어서 오십시오. 교수님. 반갑습니다!”

출판문화원 배만식 팀장이 거의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다른 직원들도 우르르 몰려와 인사했다. 과한 대우에 민우가 당황했다.

“아, 박민우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야. 이렇게 젊은 교수님일 줄은 몰랐네요. 늦었지만 임용 축하드립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직원은 기다렸다는 듯 시원한 음료를 내왔고, 배만식 팀장은 상석을 양보했다. 마치 VIP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민우는 이런 분위기가 싫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저, 팀장님?”

“옙?”

“너무 절 어렵게 대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제 막 들어온 신입입니다. 출판을 부탁드리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좀 편하게······.”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보내주신 기획서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도서를 저희 쪽에 주신다는데 어떻게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정신 나간 기획자가 아니고서야 그럴 순 없지요.”

배만식 팀장은 단호히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출판기획서에 단단히 꽂힌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쉰 민우가 강수를 뒀다.

“그냥 평소처럼 해 주세요. 안 그러면 같이 일하기 힘들어요. 전 불편한 건 딱 질색이거든요. 제가 지음사로 돌아가지 않도록 부탁드려요.”

“어이쿠, 그러셨을 줄이야.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배만식 팀장이 움찔하는 와중에도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악의는 없었나보다. 이제야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아무튼 충분하지 않은 기획서라 궁금한 게 많으실 것 같은데요. 사소한 거라도 물어보세요. 얼마든지요. 그러려고 뵙자고 한 거니까요.”

“이거 마음을 읽힌 기분인데요? 으음, 아무래도 업계에선 전례가 없는 책이라서 말입니다. 한중일 3국의 통합 번역이론서를 쓰신다고 하셨는데, 이게 구상대로 집필이 가능한 건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아우르는 통합 번역이론서. 그것이 바로 민우가 준비한 카드였다.

“크게 걱정하실 건 없어요. 일본어와 중국어 정도는 모국어 화자들만큼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영어와 기타 주요 유럽어도 마찬가지고요. 거기에 번역을 하며 쌓은 노하우도 있죠. 그걸 접목시키는 건 쉬운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여러 언어로 번역을 하면서 느낀 건데 문화가 비슷한 지역끼리는 통하는 게 있더군요. 기본 원리라고 할까요?”

“기본 원리요.”

배만식 팀장이 민우의 끝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며 집중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언어도 언어지만 문화와 맥락을 읽는 기초 능력을 배양하는 게 제가 쓰려는 교재의 목표이기도 하죠. 이론과 실전을 망라한 책이 될 겁니다.”

“그래서 1부를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으로 묶으신 겁니까? 대상이 친숙하니까.”

“일종의 몸 풀기인 셈이죠.”

자신 있게 웃은 민우가 컵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배만식 팀장은 소름을 느꼈다. 서른 살 젊은 친구의 패기에 눌린 것이다.

민우는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설명을 계속했다.

“사실 한중일 세 언어로 씌어진 텍스트는 이미 백 년 전부터 서로 교차 번역되곤 했어요. 그런 사례들은 비교문학 쪽 논문을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비교문학이라. 으음. 이거 좀 생소하네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죠. 아, 그게 좋겠네요. 한일대의 서강일 선생 논문이 좋은 레퍼런스가 될 겁니다.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거든요.”

사실, 작년 현대문학연구학회에서 서강일과 토론하지 않았더라면 떠올릴 수 없었을 아이디어였다.

당시 <비행선>의 원작을 추적하며 민우는 깊은 의문을 품었다. 왜 당시 번역가들은 중역은 물론 삼중역까지 하게 된 걸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언가 유사한 점이나 친숙한 부분이 있지 않나 하고 추측했었다.

그러다 이번 기회에 그 막연한 추측이 구체적인 출판기획서로 바뀐 것이다.

물론 기획 단계라 실제 집필에 들어가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불가능한 문제에 봉착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해보지도 않고 겁을 먹는 것은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니까.

“아, 예. 한일대의 서강일 선생이요. 혹시 논문 제목을 알 수 있습니까?”

“1910년대 국내 과학소설 수용사 연구입니다. RISS쪽에 검색해 보면 바로 나올 거예요. 등재지라서.”

“감사합니다.”

배만식 팀장은 서강일의 이름과 논문 제목을 메모하고 밑줄을 그었다. 민우는 그의 진지한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기획서에 쓴 대로 1부는 아시아권으로 묶고, 2부는 미국과 영국으로 한정해볼 생각입니다. 3부는 주요 유럽어가 될 거고요.”

“좋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프로젝트를 저희 문화원에서 하신다는 거지요?”

“잘 도와만 주신다면요.”

“그 점은 제 자리를 걸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민우가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배만식 팀장이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청문대 출판문화원에 한줄기 빛이 쏟아진 날이 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민우는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위해서.

* * *

밖으로 나온 민우는 깜짝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장님! 아니, 여기는 웬일이세요?”

“그렇게 바라보시니 귀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입니다.”

유진태 비서실장이었다. 그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민우는 가까이 다가갔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그런지 반가움이 더했다.

악수를 청하는 동시에 민우의 머릿속에 얼마 전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영국 런던에서 연주와 우연히 만났던 그때 그녀가 이렇게 말했었다. 사업을 하겠다고. 자신의 가문이 소유한 대학 재단에서.

“혹시 연주가 여기에 있나요?”

“맞습니다. 교수연구지원분과의 실장을 맡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모시러 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잠시 사무실로 가시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에게 물어볼 말이 생겼다. 청문대와 전혀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좋은 제안이 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싶었어. 혹시 이 모든 게 연주가 추진한 일인가?’

그렇다면 모든 의문이 간단히 풀린다. 나중에 우리 대학으로 강의를 나와 달라고 지나가듯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것.

곧 민우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유진태 실장은 밖에서 대기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음이 편해지는 좋은 향기가 났다. 평소 연주의 몸에서 나는 그 향기였다.

연주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오셨어요? 박 선생님.”

“뭔 선생님이야? 그냥 예전처럼 부르지.”

연주는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서로 선생님이라고 했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강철훈 교수님 프로젝트 오리엔테이션 할 때.”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었다.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연주는 능숙했는데, 그 사이 또 달라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야무지게 변했다고 해야 하나.

“너 마음 단단히 먹었구나?”

“그 건에 대해서는 전에 말씀 드렸잖아요. 그만 서 계시고 이쪽으로 앉으세요. 네?”

자리를 옮기고 이야기가 시작됐다. 최근 이슈는 역시 송현우 교수 이야기였다.

“그 사연 들었을 때 가슴이 찡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 오빠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떻게 그럴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그걸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자체도······.”

최근 방영된 ‘독서의 밤’ 코너에서 송현우 교수의 사연이 짤막하게 소개되었다. 미리 약속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민우는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상세히 풀었다.

그 감동적인 스토리는 인터넷상에서도 크게 화제가 되었다. 기사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릴 정도로.

이수빈이 유학 관계로 프로그램에서 도중하차하는 바람에 시청률이 소폭 하락하긴 했지만 민우는 여전히 활약을 펼치고 있었고 인기도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나도 갑자기 생각난 일이라서. 대단한 계획을 가지고 한 건 아냐. 그냥 막연히 뭔가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이지.”

“그런 마음을 갖기가 힘들잖아요. 요즘은 다들 힘든데다 경쟁사회니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이제 슬슬 화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던 게 하나 있었다.

“됐고 다른 이야기 좀 하자. 혹시 날 여기로 초빙한 거 네 계획이었어?”

“예. 맞아요.”

“그럼 귀띔이라도 해 주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거든. 이렇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계약서 쓸 때 잔뜩 쫄았다.”

“말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예전에 한번 크게 데인 적이 있잖아요. 오빠 입원했을 때. 그래서 일부러 얘기 안했어요. 부담감 느낄까봐.”

오늘따라 옛날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의도하는 걸까, 아니면 우연일까. 민우는 연주의 수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 똑똑했다.

연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에도 화 낼 거예요?”

“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때 화 낸 거 아니야. 그냥 생각이 달랐던 거지. 그리고 이렇게 좋은 기회를 줬는데 왜 화를 내?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에.”

“역시 그렇죠?”

연주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어 뜬금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상아대는 바보예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훌륭한 원석을 손에 넣었는데, 그걸 어떻게 가공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대학이 손을 쓰기 전에 빨리 움직였죠.”

“너무 높게 쳐주는 거 아냐?”

“그래 보여요?”

연주가 그렇게 되물었다. 민우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늘 대화의 주도권은 자신이 챙겼는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봤다면 오빠가 잘못 생각한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엔 확신이 있었다. 잠시 말을 끊어 여운을 남기더니 표정을 바꾸었다. 진지하게.

“전 논문을 쓰듯 하나하나 입증해 보일 생각이에요. 오빠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제 손으로.”

* * *

명인대로 돌아가는 내내 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레아는 이럴 때 방해를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운전에만 집중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라······.’

차창 밖을 응시하던 민우가 피식 웃고 말았다.

여리고 내성적이었던 연주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 늘 즐거운 일이었다. 민우는 그 느낌을 충분히 즐겼다. 불로소득이 아니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으니까.

우우우웅!

그때 핸드폰이 한번 몸을 떨었다. 톡이 하나 왔다. 보낸 사람은 차민재였다. 민우는 즉시 잠금을 풀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스크롤을 내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장문의 톡이었다.

글자 하나하나 빠짐없이 모두 읽은 민우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행이야. 마음이 전해졌구나.’

민우는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스쳐 지나가는 도로의 풍경을 보며 앞으로 수년 뒤의 벌어질 한 장면을 떠올렸다.

‘민재가 오기 전에 청문대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놔야겠다. 든든한 아군이 생겼으니 더욱 빨리 일을 진행할 수 있겠어.’

차에서 내린 민우가 가볍게 인사를 남기고 인문관을 향해 걸었다.

민우는 오랜만에 307호에 들렀다. 석사들이 여러 명 모여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주예린의 모습도 섞여 있었다.

“선배님.”

오늘따라 목소리가 얌전했다. 그녀의 손엔 검은색 표지로 장정된 석사학위논문이 들려 있었다.

“고맙습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민우는 그녀의 석사학위 논문을 받았다. 앞장을 여니 감사의 말이 적혀 있었다. 가족 다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다.

논문을 덮으며 민우가 물었다.

“박사는?”

주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사과정에 지원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당분간은 글에 전념하려고요. 선배가 준 기회, 제대로 우려먹어야죠.”

“그래. 잘 생각했다. 공부야 언제든 다시 할 수 있으니까. 예전에 수빈이가 나한테 해준 말이 있었는데 너한테도 해줘야겠네.”

“잉? 뭔데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민우는 고생 많았다는 말을 남기고 307호를 나섰다.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긴 했지만, 자신의 길을 찾은 후배가 자랑스러웠다.

하나둘, 주변에 있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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