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 < 81장. 사람이 사람에게 (1) >
“다녀왔습니다.”
“늦게 왔구나. 저녁은?”
“대충 먹었어요.”
민우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양평 별장에서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긴장이 풀리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후우.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어······.’
민우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복기했다.
송현우 교수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며 서명을 하던 그 장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고맙다는 한마디도 귓가에 생생했다.
어쨌든 임무는 완벽하게 수행했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일이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문적인 과업이 되어 있었다. 고비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무엇보다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그때 송현우 선생님이 깨어나지 않으셨다면······ 만년필을 쥐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우연이었을까?’
여러 상념이 교차했다.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민우가 거둔 성과만큼은 분명했다.
이번에 송현우 교수의 선집 작업을 도우며 민우는 크게 세 가지 성과를 얻었다.
첫째, 선집의 편찬자로 이름을 올렸다. 선집의 겉표지에 서지훈, 송승현, 박민우 순으로 이름이 기재되었다. 노력한 만큼 인정을 받은 것이다.
둘째,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 지음사는 물론 명인대 국문과 식구들을 비롯하여 당사자인 송승현 실장과 서지훈 교수의 마음까지 얻었다.
셋째, 송현우 교수의 학문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선집은 그가 남긴 지식의 정수를 담은 것이었다. 그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저술을 읽어야겠지만, 민우는 효율적으로 그의 사상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특히 학문적인 깨달음이 컸어.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이야.’
민우는 명인대 박사과정에 진학할 때 원대한 목표를 세웠었다. 한국현대문학사를 새롭게 쓰는 것으로 박사학위 논문 계획을 잡은 것이다.
문학사를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방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지만, 이번 선집 작업을 통해 박사논문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농축된 송현우 교수의 지식은 강의력 향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제는 한국문학이라면 어떠한 테마로도 강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만큼의 지식이 쌓였어.’
민우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보람은 지적 성취보다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제 송 선생님도 편히 쉬실 수 있을 거야. 송승현 실장님도 한결 마음이 편하실 거고. 서지훈 선생님도 제자로서 짐을 덜으셨겠지.’
민우는 몸을 일으켜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루카치의 만년필을 꺼내 쥐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역시 느껴진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짜릿한 느낌.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주저 없이 서랍에서 유고를 꺼내 펼쳤다. 여전히 유고의 뒷부분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실망하지 않았다. 아직 한 단계가 남았으니까. 가볍게 심호흡을 한 다음 가방에서 루카치의 안경을 꺼내 썼다.
스르륵.
순간 마법 같은 일이 펼쳐졌다. 흐릿한 글자의 잔영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
‘보인다. 이번에도 성취를 이룬 거야!’
양이 꽤 많았다. 족히 서른 페이지는 될 것 같았다. 그만큼 민우는 이번 일로 깨달음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뭇거릴 여유 없이 즉시 펜을 움직였다.
근사한 필체의 독일어가 유고의 빈 페이지를 수놓기 시작했다. 평소보다도 밝은 푸른빛이 방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어?’
그런데 푸른빛 사이로 새로운 빛이 보였다. 희미하지만 독특한 느낌의 푸른색을 띄는 광채였다.
가만 바라보니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다시 펜을 움직이기 시작한 민우는 그 빛을 남긴 은사의 안식을 기원했다. 마음을 담아서.
* * *
송현우 교수의 부음은 미국까지 전해졌다. 장례식장에 가는 길에 민우는 수빈의 전화를 받았다. 메사추세츠주는 이른 아침이었다.
― 아무래도 귀국하는 게 좋겠지?
“너 입국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안 그래도 서지훈 선생님이 얘기 전해달라고 하셨어. 나중에 방학 때 보자고.”
― 그래도 선생님한테 배운 것도 있는데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너 준비하고 오면 발인 끝나 있을 거야. 거기에서도 명복은 빌 수 있는 거잖아. 장소가 중요한가? 마음이 중요하지.”
― 알았어요. 오빠가 그렇게 얘기해주니 좀 마음이 놓이네.
민우가 웃으며 물었다.
“숙소는 어때? 괜찮아?”
― 깨끗하고 쾌적해요. 룸메이트랑도 많이 친해졌어.
“다행이네.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덧붙여 민우는 수빈이 공항에서 주고 간 일기를 잘 보고 있다고 말했다. 부끄러웠는지 수빈은 앓는 소리를 내며 화제를 돌렸다.
― 도착했어요?
“응.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 나도 아침 먹고 수업 가야겠다. 내 몫까지 조문 잘하고 와요.
민우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빈소는 조문객들로 붐볐다. 민우는 보지 못했지만 교육부장관과 명인대 총장을 비롯하여 각급 단체장급의 조문객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해외에서도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송현우 교수가 생전에 교류하던 아시아권 교수 및 학자들이 비행기를 타고 먼 길을 와 국화꽃을 놓았다.
세계적 학술단체인 IAHS에서는 공식 사이트에 조의문을 올렸고, 여러 인문학 관련 학술 단체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국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방 각지에서 교수들이 올라왔다. 명인대 국문과를 비롯한 인문대 교수들도 자리를 잡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인사를 하기 전에 민우는 먼저 영정 앞에 섰다.
‘선생님의 유산. 확실히 물려받았습니다. 이제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조문을 모두 마친 민우가 밖으로 나와 교수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 자리엔 민영환 교수도 있었다.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잘 지내셨죠? 죄송합니다.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네요.”
“됐다. 너 고생한 거 여기 앉은 선생들도 다 아니까. 고생했어. 한잔 받아라.”
“예.”
민우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왠지 앉아서 먹고 마시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때마침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서지훈 교수가 보였다.
“선생님. 제가 뭐 도울 거 없을까요?”
“너 선집 도와주느라 무리했잖아. 아무리 젊어도 쉴 때는 쉬어야지. 이제는 괜찮으니 그만 들어가서 눈 좀 붙여라.”
“어제 푹 자고 나와서 괜찮아요.”
상복을 입은 서지훈 교수가 씁쓸히 웃었다. 민우에겐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졌다. 더 이상 손을 빌리기가 미안했다.
“이건 우리 가족의 일이니까.”
그 한마디로 깔끔히 선을 그은 서지훈 교수는 민우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다시 영정이 놓인 곳으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때 송승현 실장이 따라 나왔다.
“가게요?”
“일 좀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선생님께서 허락을 안 해주시네요.”
송승현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집을 완성해서일까. 아니면 실컷 울어서일까. 이제는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민우 후배.”
그녀가 차분히 부르며 손을 뻗었다. 민우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여러모로. 이번 일을 겪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인생이······ 민우 후배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행복하게 잘 살고 계셨겠죠.”
“과연 그럴까요? 그이와 가까워지게 된 것도, 그리고 오픈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를 회생시킬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유고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민우 후배가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이렇게 말로 하고 나니 정말 빚을 많이 졌네요. 아마 그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죠.”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이 빚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저도 선배님께 받은 게 많습니다. 배우기도 많이 배웠고요. 그러니까 빚이라고 말씀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안 그럼 앞으로 좋은 소식 못 드리잖아요.”
“알았어요. 자, 그럼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빈소를 나서 복도로 접어들 무렵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최민식 옆에 두 명이 더 있었다. 대학원 선배이자 경문대에 자리를 잡은 이재환과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강예진이었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오셨어요?”
“그래. 일단 인사 좀 드리고 오마.”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잠시 후 네 사람은 장례식장 밖 벤치에 모였다.
조용한 곳에서 그간 묵혀뒀던 이야기를 나눴다. 웃을 일 없는 소소한 이야기였다. 이재환은 이제 적응을 끝냈고, 강예진의 논문도 진척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재환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송현우 선생님은 가시는 길까지 선생님으로 남으셨구나. 이렇게 격조해진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해 주시고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민우 네가 중간에서 큰일을 했다지? 선집에 이름 올라간 거 봤다. 다들 그렇지만 너도 정말 고생이 많았어. 어떻게 영문판을 낼 생각을 했냐?”
세 선배의 기특해하는 시선이 민우를 향했다.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기왕 하려면 제대로 하고 싶어서요.”
“하긴, 넌 석사 때부터 괴짜였지.”
“재환 오라버니가 석사 때라고 하니까 되게 옛날 같네요. 고작 2년밖에 안 지났는데. 안 그래요? 그때 민우 막 민식 오라비한테 까이고 그랬잖아요.”
“문득 낙제생 시절이 그리운데요?”
“진심이냐?”
그제야 네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웃음은 길지 않았다.
이재환이 물었다.
“아까 들었는데, 송현우 선생님이 임종 직전에 책을 보시고 서명까지 하셨다지? 사인본은 어떻게 하신대?”
“명인대 도서관에 기증한다고 들었어요.”
“영구보존처리를 하는 게 좋겠네요. 그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이니까.”
민식의 말에 재환과 예진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민우는 그렇지 않았다.
“아뇨. 오히려 학생들의 손때를 타는 게 아버지가 바라는 일일 거라고 승현 선배님이 말씀하셨어요. 그게 참교육의 길이라면서. 그래서 일반 서고에 비치될 겁니다.”
“그렇군. 확실히 그게 더 의미가 있겠네. 후학들에게 자극도 될 거고. 승현이가 제대로 봤구나.”
재환의 평가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의 만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다음 만남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로 보자는 이재환의 의견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일주일이 지났다.
* * *
“생각보다 작업이 많이 늦어졌네요.”
태블릿으로 프로젝트 진척상황을 파악하던 민우가 이마를 짚었다. 모든 그래프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레아는 운전을 하며 그의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맨부커 상 수상 건도 있고, 이번에 선집 작업에 무리를 하셨으니까요. 앞으로 부지런히 달리셔야 합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을 좀 벌어야겠는데요.”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민우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막연하게 생각해오던 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견적이 나왔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인대 선생님들하고 상의를 해 봐야겠어요. 초빙교수가 됐으니 굳이 박사 수업을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논문으로 대체할 방법을 찾아보려고요.”
“그게 가능할까요?”
“예전에 그런 선례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뭐, 불가능하면 가능하도록 해봐야죠. 그게 제 특기니까.”
레아가 싱긋 웃었고, 민우는 바로 서지훈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오, 박 교수님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전화를?
그가 쾌활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용건을 꺼냈다.
“지금 청문대로 이동 중인데 선생님께 좀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 상의? 왜. 이수빈 선생 SNS에 수상한 외국인이라도 떴어?
“창의력 대장이시네. 소설 쓰셔도 되겠는데요?”
각설하고 민우는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KCI급 이상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수업을 대체할 수 없냐고 정중히 부탁했다.
― 흐음, 그러니까 이제 교수가 됐고 TV에도 출연하니 시시한 박사수업 같은 건 안 듣겠다는 거로군.
“아니, 그게 아니고요.”
― 하하하! 됐어 인마. 알았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얘기하려고 했는데. 논문 한 편으로 합의 보자. 대신 성적은 기대하지 마.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곧 차가 청문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민우는 바로 출판문화원 사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