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 < 80장. 위대한 유산 (4) >
“오늘 떠나셨겠네요.”
“응?”
“이수빈 선생님 말입니다.”
유진태 실장이 농담조로 대꾸했다.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읽던 연주는 싱긋 웃었다. 확실히 그녀에겐 좋은 소식이었지만, 별로 신경을 쓰고 있는 눈치는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크게 기뻐하거나 하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았다.
연주는 수빈의 출국보다도 지금 눈앞에 놓여있는 서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양한선 교수가 특별히 부탁한 민우의 출판계획서였다.
“골키퍼가 없어졌으니 아가씨께는 좋은 기회겠는데요? 그냥 툭 차 넣으면 골인 아닙니까.”
유진태 실장은 영악한 구석이 있었다. 끝까지 민우와 연주를 엮으려 했다.
“별로 기회라고 생각은 안 하는데.”
그 한마디에 유진태 실장의 표정에 흥미가 돌았다. 의외였다. 경쟁자가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민우를 빼앗을 적기일 텐데.
그래서 물었다.
“박 선생님을 마음에 두고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요.”
“유 실장은 박민우라는 사람을 잘 모르는구나. 오빠는 좀 특이한 사람이야.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지. 오히려 예전보다 더 견고해졌을걸?”
연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웠으니까. 그의 마음이 어떤 색인지, 어떤 모양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 일에 집중하고 싶어. 기왕 하겠다고 한 일인데 대강 할 순 없잖아?”
“그건 그렇지요.”
어른스러운 연주의 모습에 유진태 실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연주는 서류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공란에 서명을 한 다음 서류철을 닫았다. 그리고 그걸 유진태 실장에게 건넸다.
“이따 가는 길에 출판문화원에 전해 줘. 내가 보냈다고 하면 잘 받아줄 거야.”
“이거 뭔가 대학 조교가 된 것 같은 느낌이군요.”
“싫으면 내가 갈까?”
“아, 아닙니다. 하하하. 아가씨 요즘 농담이 느셨군요. 그럼 중요한 서류인 것 같으니 어서 가보겠습니다. 퇴근 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저녁 먹지 말고 와. 같이 먹자.”
꾸벅 인사를 한 유진태 실장은 그길로 바로 청문대 출판문화원으로 향했다.
출판문화원이라고 해서 거창한 곳은 아니었고, 14평 정도 되는 좁은 사무실에 직원 여섯 명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총판을 통하는 본격 출판보다는 대학에서 쓰는 교재를 만드는 곳이었다. 가끔 이름 있는 청문대 교수들의 저서를 내기도 한다.
유진태 실장이 사무실 안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정연주 실장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예? 정연주 실장님이요? 그게 누구시지?”
여직원이 당황하는 사이 뒤에서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재단에서 오셨나 보군요.”
배가 둥그렇게 나온 중년이 파티션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이곳 출판문화원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배만식 팀장이었다.
그가 땀을 닦으며 물었다.
“정연주 실장님이라면 이번에 새로 오신 분 맞으시지요?”
“예, 그렇습니다. 출판기획서인데 검토를 부탁드린다고 해서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예. 이리 주십시오. 저희 직원을 부르시지 않고 직접 오셨군요. 다음엔 전화 주십시오. 바로 가겠습니다.”
배만식 팀장이 서류철을 정중히 받아들었다. 임무를 마친 유진태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 뒤에 있던 여직원이 물었다.
“대단한 분인가 봐요? 정연주 실장님이라는 사람.”
그럴 만도 했다. 웬만해서는 배만식이 이렇게 굽실거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고럼. 대한그룹 회장님 손녀딸이셔. 회장님이 엄청 아끼는 분이시지. 명인대 엘리트야. 과학고 출신인데 불문학과 물리학을 동시에 전공한 괴짜기도 하고. 여튼 결론은 우리와는 클라스가 다르다는 거.”
“와, 말 그대로 공주님이시네요. 근데 어디에서 온 기획서예요? 재단 쪽인가?”
“흐음. 어디보자. 응? 재단이 아니라 물리학과에서 왔구만. 양한선 교수님 쪽에서 올라왔어.”
“교재라도 내신대요?”
“아니. 양한선 교수님은 통하기만 한 거고, 실제로는 교양학부의 박민우 교수가 썼구만. 음, 번역 교재 출간 건이야. 이쪽은 별로 돈이 안 되는데······ 어엉?”
기획서 내용을 훑어보던 배만식이 깜짝 놀랐다. 볼펜을 입에 물고 그의 반응을 살펴보던 여직원이 호기심을 보였다.
“뭔데 그렇게 놀라세요?”
“이거······ 말이 되는 내용인가?”
배만식은 뒤통수를 후려 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다른 세계의 물건이라도 본 것 같은 그런 얼굴을 하며 기획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뭔데 그러시냐구욧!”
“직접 봐.”
배만식은 출판기획서를 여직원에게 건넸다. 곧 여직원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도 출판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이, 이게 말이 되나요?”
“그거 방금 내가 한 질문이잖아?”
“아, 참 그랬지. 죄송해요.”
“됐고 이리 줘 봐.”
배만식은 다시 기획서를 뺏어들고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박민우 교수라면 지음사 쪽하고도 연결이 되어 있을 텐데 왜 우리 문화원에서 책을 내려는 거지? 보통 책도 아니고 이렇게 어마어마한 물건을?’
출판문화원이라고 해도 전문성은 많이 떨어진다. 물론 명인대 정도 되는 곳의 출판문화원은 전문성을 갖추고 있지만, 청문대는 아직 아니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대개 굼떴다. 성향도 상당히 보수적인데다가 공직자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 새로운 바람을 맞이하기에는 준비가 충분치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엄청난 기획서가 온 것이다. 출판계에 반쯤 다리를 걸치고 있는 배만식이 보기에도 굉장한 기획서였다.
‘못해도 대박, 잘만 하면 초대박이다. 우리 문화원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겠어!’
배만식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그는 굴러들어온 복덩이를 놓칠 만큼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다. 곧 진지한 표정으로 지휘를 시작했다.
“미스 한! 지금 당장 회의 들어가자고. 외근 나간 사람들 싹 불러 와!”
“네!”
“문 과장은 어딜 간 거야? 또 구름과자 먹으러 갔나? 에잉!”
한미주가 바쁘게 전화를 돌렸다. 배만식 팀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바로 교양학부에 전화를 걸어 민우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리고 민우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저는 청문대 출판문화원의 배만식 팀장인데요. 예.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아, 다름이 아니라 보내주신 기획서 때문에 좀 뵙고 싶은데······ 예? 지금 양평이시라고요? 그럼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날 뵙는 걸로. 예. 들어가십쇼.”
* * *
전화를 끊은 민우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오는 도중에 서지훈에게 연락을 받았다. 송현우 교수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조금만 더 버텨주시면 되는데!’
말기 암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건 죽음에 이르렀다는 의미였다. 민우는 입술을 꽉 깨물며 별장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조용했다. 가정부가 마중을 나오더니 2층으로 올라가 보라고 얘기했다.
방은 두 개였는데, 큰 방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서지훈 교수의 모습은 물론 넓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송현우 교수의 모습도 보였다.
“송 선생님은 좀 어떠세요?”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 보였다. 피부가 누렇게 떴다. 간성혼수가 시작된 것 같았다. 서지훈 교수는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으셔. 벌써 30분째야.”
한편 송승현 실장은 송현우 교수 옆에 앉아 두 손으로 손을 잡으며 흐느끼고 있었다. 이미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정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저렇게 될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명인대에서 부지런히 강의를 하던 그였다.
“그런데 전남규 차장님은 아직입니까?”
흐느끼던 송승현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서지훈 교수가 대신했다.
“곧 도착한다고 하더군. 하지만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의미가 없어.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연명치료를 받으시게 하는 거였는데.”
주먹을 쥔 서지훈 교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천재라고 불리는 그라고 해도 사람의 목숨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민우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송현우 교수의 왼편에 앉아 남은 손을 꼭 잡았다.
“아직 돌아가신 거 아니잖아요. 이대로 돌아가실 분 아닙니다. 제가 아는 송현우 선생님이라면요.”
“민우야.”
“포기하지 마세요. 선생님도, 선배님도.”
민우가 정성껏 송현우 교수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때 별장 밖에서 요란한 엔진음이 들렸다. 차 문이 거칠게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실장님! 선집 도착했습니다!”
2층까지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전남규 차장이 도착한 것이다.
단숨에 2층으로 올라온 그가 박스를 내려놓았다. 서지훈 교수가 칼로 테이프를 자르고 내용물을 꺼냈다. 고급스러운 양장으로 된 책이 두 세트 나왔다.
하나는 한국어판, 하나는 영어판이었다.
한 달 반가량 밤낮없이 쏟아부은 노력의 결정체를 앞두고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서지훈 교수는 선집 두 세트를 들고 송현우 교수에게 다가갔다. 민우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선생님. 드디어 완성됐습니다. 비루한 실력이지만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이뤄 놓으신 학문적 성과를······ 저희가 힘을 합쳐 모두 이곳에 담았습니다.”
서지훈 교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송현우 교수의 오른편에 선집을 차분히 내려놓았다. 애타는 눈으로 스승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송현우 교수는 말이 없었다.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누워있었다.
이번엔 송승현 실장이 나섰다.
“아버지. 잠깐만이라도 일어나 보세요. 네? 책이 왔어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보고 싶어 하셨던 책이요. 아버지!”
그 외침에도 소용이 없었다. 흔들어 보아도 송현우 교수는 깨어나지 않았다.
두 당사자가 정신이 없었기에, 전남규 차장은 의사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지나간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무엇보다도 정직하게 살아온 개인의 운명이 이렇게 야속할 리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하나의 상념.
‘송 선생님은 위대한 학자셨어. 고결한 정신세계를 가지신 분이지. 그렇다면······.’
강한 이끌림을 느낀 민우가 가방에서 루카치의 만년필을 꺼냈다.
‘여기에도 위대한 학자의 정신과 혼이 담겨 있어. 어쩌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잠깐이라도.’
민우가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은은한 푸른빛이 펜촉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민우는 송현우 교수의 오른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선생님. 책이 왔습니다. 사인해 주셔야죠.”
그렇게 운을 뗀 민우는 송현우 교수의 오른손에 루카치의 만년필을 꼭 쥐어주었다.
번쩍!
순간 푸른 광채가 휘몰아쳤다. 눈부신 장관이 펼쳐졌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민우뿐이었다.
그리고 회오리처럼 일어나던 푸른빛이 잦아들 무렵, 기적이 일어났다.
“으음······.”
송현우 교수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곧 눈이 열렸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책이······ 왔다고······?”
“아버지!”
“선생님! 정신이 드십니까?”
“그래. 잠깐 잠을 잔 것 같은데······.”
송현우 교수가 딸에게 눈짓을 했다. 몸을 일으켜 달라는 신호였다. 송승현 실장은 조심스럽게 등받이를 올렸고, 서지훈 교수가 선집 제 1권을 꺼내 송현우 교수에게 펼쳐 보여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 이게 선생님의 선집 제1권입니다. 영문판으로도 번역이 잘 됐습니다. 세계가 선생님의 업적을 기릴 겁니다.”
“무슨 그런 대단한 소리를······.”
힘겹게 웃은 송현우 교수가 자신의 오른손을 살펴보았다. 못 보던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건······?”
“학계에 영원히 기억될 책입니다. 직접 사인해 주셔야죠.”
민우가 당차게 말했다.
송현우 교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첫 페이지에 서명을 했다. 놀랍게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완벽한 서명을 남겼다.
하지만 기적은 길지 않았다.
송현우 교수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짧은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고맙네.”
그가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이룬 듯 편안한 표정과 함께.
때마침 손에 쥐어진 만년필의 푸른빛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을 본 민우는 직감했다. 위대한 학자의 삶이 끝났다고.
‘하지만······.’
서명이 들어간 선집을 쥔 민우는 직감했다. 그의 육신은 사라지겠지만, 이 책에 담긴 그의 정신과 영혼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유난히도 맑은 날 국문학계의 큰 별이 졌다. 한 편의 위대한 유산을 남기고.
‘오늘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모든 것. 감사히 물려받겠습니다.’
민우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송현우 교수 앞에서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