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 < 80장. 위대한 유산 (3) >
6월의 마지막 날이자 상아대에서의 마지막 날.
민우는 구서현 조교와 함께 짐을 싸기 시작했다. 대개 책이었고 틈틈이 집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몇 상자 나오지 않았다.
민우가 마지막으로 테이핑을 하고 상자를 한쪽에 쌓아 두었다.
“이제 끝.”
“휴,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짐이 생각보다 많이 안 나오네요?”
“짐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책이 전부니까. 평소에 두어 개 씩 집에 들고 가기도 했고.”
“흥. 이직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하고 계셨군요.”
구서현 조교는 민우의 이직이 아쉬웠는지 내내 투덜거렸다. 그녀가 좋아하는 규카츠를 먹였는데도 꿍한 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구서현 조교는 전화로 학생회장을 불렀다. 그리고 박스를 조교실로 모두 옮기라고 지시했다. 박스가 카트에 실려 밖으로 나갔다.
“내일 중으로 택배 불러서 교수님 댁으로 모조리 보낼게요.”
“그래. 부탁한다.”
“서울로 바로 가실 거예요?”
“아니.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 봐. 이따 서울 올라가기 전에 조교실 들르마.”
“넹.”
구서현 조교가 연구실에서 나갔다. 연구실을 같이 쓰는 허 교수는 자리에 없었다. 민우는 텅 빈 자신의 책상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미리 준비해 온 편지지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루카치의 만년필을 준비했다.
펜 뚜껑을 여니 연푸른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민우는 미리 생각해 둔 내용을 편지지에 옮기기 시작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백이 하나둘 채워졌다.
‘얘기로 잘 풀긴 했지만 서운한 마음이 쉽게 사라지진 않겠지.’
민우는 얼마 전 차민재와 독대를 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학교를 옮긴다는 소리를 들은 민재는 크게 실망했다. 서운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민우라는 사람에게 깊게 감화되었던 것이다.
민우는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도 서지훈 교수를 상아대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랬으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아. 앞으로 어떻게 인연이 이어질지 모르고. 기회는 충분히 있어.’
민우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편지지에 담았다.
푸른빛이 번쩍거리며 글자를 만들어 나갔다. 민우의 순수한 마음이 글자 하나하나에 오롯이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편지지 한 장이 글자로 꽉 찼다.
민우는 뚜껑을 닫고 편지지를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온 자신의 공저서 <신화와 인간: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을 꺼냈다.
앞에 민재의 이름을 담아 근사하게 서명을 한 뒤 편지지를 가운데 껴 넣었다.
‘이걸로 마음이 전해지면 좋으련만. 너무 큰 욕심일까?’
때로는 말보다 글이 더 진솔하게 다가갈 때가 있다. 차민재와는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이렇게 편지를 남긴 것이다.
민우는 짐을 모두 챙기고 연구실을 나섰다. 그 길로 국문과 조교실에 들러 책을 구서현 조교에게 맡겼다. 내일 차민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구서현이 책을 받아들며 이렇게 대꾸했다.
“난 선배가 전임교수가 돼서 계속 학교에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찡한 마음이 들었는지 코를 씰룩였다. 호칭이 교수에서 선배로 바뀌었다. 그래서 민우는 쉽게 조교실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훌쩍 떠나버리면 어떡해요? 나 박사 때는 지도교수를 선배로 하려고 했는데.”
“그런 흉계가 있었다니. 떠나길 잘했네.”
민우의 농에 구서현 조교가 웃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진지해졌다.
“서지훈 선생님도 그렇고 선배도 그렇고 잘난 사람들은 왜 다들 여길 떠나는지 모르겠어요.”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많아.”
“선배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뜻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자신을 높게 봐 주는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다.
하지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번 일을 겪으며 느낀 게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도 꽤 있다고.
대학과 재단.
그곳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큰 장벽이 있었다. 실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번역가로서는 분명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교수로서는 아니지. 아직 일 년차도 안 된 햇병아리 교수일 뿐이야. 갈 길이 멀다.”
“어휴, 선배가 그러면 석사학위도 없는 저는 갈 길이 구만리겠네요.”
“이제야 깨닫다니 기특하네. 하하하. 아무튼 종종 연락해라. 석사 논문 막히면 서울 한번 올라오고.”
“선배.”
구서현 조교가 떨리는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녀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그간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루.”
“고생은 무슨. 네가 이것저것 챙기느라 더 고생했지. 고맙다. 네 마음은 잊지 않을게.”
구서현 조교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많이 서운한 모양이었다. 민우는 그녀의 어깨를 한번 다독여 주고는 조교실을 나섰다.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은사인 조성진 교수와 다른 국문과 교수에게도 인사를 건넨 뒤에야 인문대 건물을 나설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여기서 할 일은 모두 끝났구나.’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상아대 정문을 나선 민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돌아서 캠퍼스 전경을 한눈에 담았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내 손으로 더 좋은 대학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다시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모든 걸 잊고 새롭게 출발할 때였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잠들어 있는 무대인 청문대에서.
만약 인연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곳에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굳게 믿고 걸음을 옮겼다.
* * *
해가 저물 무렵 민우는 서울에 도착했다.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바로 명인대로 향했다. 정확히는 인문관 4층의 서지훈 교수 연구실로.
“안녕하십니까.”
“어, 왔어?”
오늘도 연구실에는 서지훈 교수와 송승현 실장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신혼여행도 가지 않고 내내 연구실에 매달려 있는 두 사람. 특히 송승현 실장은 지음사에 휴가를 내고 연구실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오늘인가 이수빈 선생 환송회 한다고 하지 않았어? 토요일에 출국이라면서.”
“이따 밤에 합류한다고 했어요. 이쪽 일이 우선이라서요.”
“그런 말 막 해도 괜찮냐? 내심 서운해할 텐데.”
민우는 싱긋 웃었다. 처음에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생각보다 이수빈의 아량은 크고 넓었다.
“수빈이가 먼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송현우 선생님 병세가 위중하다고 하니까 많이 걱정하더라고요. 일 초라도 허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송현우 교수가 타계하기 전에 선집을 완성하는 것이 모두의 목표였다. 그것은 작업에 임하는 세 사람은 물론, 지켜보는 모두의 바람이기도 했다.
자신의 학문세계를 총망라한 저서를 품는 것.
그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는 학문을 하는 사람만이 안다. 그랬기에 수빈이 선집을 우선시하라고 말한 것이다. 환송회 정도는 그저 이벤트일 뿐이니까.
“그런데 선배님. 송 선생님은 좀 괜찮으세요?”
“한 고비는 넘겼어요. 그래도 상황이 좋지는 않아요. 어서 작업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송승현 실장이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그때 서지훈 교수가 그녀의 등을 포근히 안았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분히 하라고 격려했다. 그제야 그녀가 손가락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닫는 바가 있었다.
‘선생님도, 선배님도 정말 최선을 다하고 계시구나. 이럴 때가 아니야. 나도 열심히 해야지.’
자리에 앉은 민우가 쌓인 원고를 훑었다. 양이 꽤 많았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그에겐 루카치의 안경이라는 최종병기가 있었으니까.
서지훈 교수가 곁으로 다가왔다.
“번역은 얼마나 걸리겠어?”
“이 정도라면 세 시간이면 될 거 같아요.”
“세 시간?”
“민우 씨. 지금 들고 있는 거 네 챕터에요. 아무리 빨라도 꼬박 하루는 걸릴 텐데요?”
맨눈이라면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루카치의 안경을 쓴다면 다르다. 생각할 거 없이 그대로 옮기기만 해도 완벽한 결과물이 나오니까.
물론 설득의 과정이 필요했다. 민우는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젠 한국어보다 영어로 쓰는 게 더 익숙해서요. 김동인도 그랬잖습니까. 일본어로 구상하고 한국어로 옮겨 쓴다고. 딱 그 느낌이죠.”
“뭔가 좀 납득은 안 되지만······ 뭐, 됐어. 이렇게 허비할 시간 없지. 다들 작업 시작합시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민우도 워드를 켜고 작업을 시작했다.
타다다닥―
마치 옮겨 적듯 원고를 보고 그대로 영문으로 옮겼다. 신기한 장면이었지만 서지훈 교수 내외는 남은 한 챕터에 심혈을 기울일 뿐이다.
그렇게 약속된 세 시간이 훌쩍 지나고 민우가 엔터를 툭 쳤다.
“번역 모두 끝났습니다. 이대로 교정팀에 넘길게요.”
“수고했다.”
“그런데 나머지 챕터는 언제쯤 끝납니까?”
“내일이면 정리가 다 될 거 같구나. 당신은?”
“저도요.”
민우는 마우스를 움직여 엑셀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작업 현황을 갱신했다.
표에 따르면 내일이면 원고가 모두 완성된다. 그리고 이틀 동안 지음사 최고의 실력자들이 편집을 진행하고 바로 인쇄에 들어간다.
민우가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보름이나 앞당겨졌다.
“그럼 제가 내일 나머지 챕터 번역하고 넘기면 넉넉잡고 나흘 후에 인쇄 들어가겠네요. 그런데 주말엔 인쇄기 안 돌아가죠?”
“이번엔 특별히 주말에 인쇄를 돌리기로 했어요. 금요일까지 최종본을 인쇄소에 전달하면 돼요. 토요일이면 결과물이 나올 거예요.”
그간 여러 인쇄업체들이 송승현 실장에게 진 빚이 많았다. 그녀가 뒷돈을 받지 않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일을 처리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송현우 교수 일을 듣고 인쇄소 사장들이 서로 돕겠다고 나섰다.
그중 믿을 만한 업체를 고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민우는 사소한 것도 쌓이면 크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경을 벗은 민우가 가방을 챙기고 일어섰다.
“그럼 전 임무를 완수했으니 환송회에 가보겠습니다. 학교 근처에 있을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민우 씨. 고마워요.”
오늘따라 고생 많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민우는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연구실을 나섰다.
* * *
토요일 오전, 민우와 수빈은 레아의 차를 타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오늘은 수빈이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이다.
307호 멤버도, 수빈의 부모도 없었다. 단 두 사람만이 공항에 들어섰다.
“부모님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왜 고집을 부렸어?”
“아예 가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러 잠깐 가는 거잖아. 어차피 겨울에 들어올 거고. 그냥 여행 간다 셈 치는 거지 뭐.”
“솔직하지 못하긴. 그냥 오빠랑 단 둘이 있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지.”
이수빈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농담으로 던져본 말이었는데 진담인 모양이었다.
눈치가 빠른 레아는 따라오지 않고 밖에서 대기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기석에 앉아 잡담을 나누며 탑승 수속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민우가 물었다.
“기분이 어때?”
“두근두근해. 미국에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돌아오면 내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가득해.”
수빈이 웃었다. 그러면서 네 번째 손가락에 껴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민우의 확신이 담긴 증표였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오빠는?”
“걱정되지. 멀리 떠나보내니까. 미국이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잖아. 한편으로는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거 말고. 나에 대한 거. 오빠는 내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
“있지. 나보다 멋진 남자는 세상에 없으니까.”
“뭔 자신감이래.”
민우의 허세를 눈치챈 수빈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꺼운 책이었다. 책이라기보다는 노트에 가까웠다.
그것을 받아든 민우는 겉면을 훑었다. 예쁜 표지였는데 책의 제목이 없었다. 출간된 책이 아니라 따로 제본을 한 것 같았다.
“이건 뭐야?”
민우가 표지를 열어보려고 하니 수빈이 손으로 막았다.
“나 가고 나면 읽어.”
“뭔데?”
“내가 대학원 입학하고 나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야.”
“그걸 왜 나한테······.”
“오빠에 대한 이야기가 한가득 들어 있으니까.”
수빈이 부끄러운 듯 웃었다.
민우는 말문이 막혔다. 다시금 손에 든 책을 바라보았다. 마법처럼 방금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소중한 보물처럼 느껴졌다.
때마침 탑승 수속이 시작됐다.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야겠다. 오빠. 건강히 잘 있어. 청문대에서도 열심히 하고.”
“너도 열심히 해. 포기하지 말고.”
“사랑해요.”
두 사람이 키스를 했다. 이별의 순간은 짧았다. 수빈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음에도 민우는 한동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위이이잉―
그때 진동이 울렸다. 전남규 차장이었다. 민우가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 민우 씨, 지금 송현우 교수님 선집 인쇄가 끝났습니다. 한 부 챙겨서 바로 양평 별장으로 출발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바로 그쪽으로 갈게요.”
― 늦지 않았겠죠?
“하늘이 그렇게 무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전화를 끊은 민우는 재빨리 공항을 나섰다. 레아의 차에 오르며 서둘러 말했다.
“송현우 선생님 별장으로 가 주세요. 최대한 빨리.”
“예, 매니저님.”
거친 엔진음과 함께 차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