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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11화 (211/500)

211화 : < 80장. 위대한 유산 (2) >

민우의 폭탄선언에 두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최산호 총장은 어느 정도 짐작을 했지만 유희윤 교수는 아니었다.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무리 겸임교수라고 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교수를 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잘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래서 그가 물었다.

“잠깐, 잠깐만. 내가 잘못 들었나 싶은데. 박 선생. 물러나겠다는 건 교수를 그만 둔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대체 왜입니까?”

“그건 유 교수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전에 월례 회의 끝나고 저에게 충고를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교수 사회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이 바닥에서 실력으로 승부하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그 말에 최산호 총장이 유희윤 교수를 엄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당황한 유희윤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어흠, 그거야 다만 박 선생의 태도가 걱정이 되었기에 한 말이고······.”

“뭐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몸도 마음도 깔끔하게 정리를 했으니까요.”

민우는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이제 피해를 보는 것은 눈앞의 두 사람, 특히 국제번역전공을 책임질 유희윤 교수일 테니까.

최산호 총장이 청했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들어 봐야 할 거 같군요.”

“재단에서 학칙 개정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 걸로 압니다. 또한 제가 몇몇 업적을 세웠지만 대우가 더 나아지기는커녕 후퇴했지요. 그래서 모교에서는 비전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시리도록 냉정했다. 그럼에도 유희윤 교수가 끼어들었다.

“그건 오해입니다. 응? 누차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대학에서는 원칙과 효율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고. 왜 그걸 곡해해 가지고서는!”

“그래서 그걸 덜 중시하는 곳으로 옮기려고 하는 겁니다. 원칙과 효율보다 비전과 가능성을 중시하는 대학이 대한민국에 있더군요.”

“거기가 어딥니까?”

“청문대요.”

민우가 웃으며 대꾸하자 유희윤 교수의 말문이 턱 막혔다.

전에 최산호 총장이 청문대가 움직이고 있다고 귀띔을 하긴 했지만 일이 벌써 이렇게까지 진척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직은 안 돼!’

유희윤 교수의 두뇌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우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해 상아대는 재미를 많이 봤다. 그러나 입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때까지는 박민우를 붙잡고 있어야 이득이야.’

그렇게 결론을 내린 유희윤 교수가 인상을 풀었다. 사람 좋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박 선생. 일단은 좀 진정하고······.”

“전 충분히 진정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흥분하는 건 유 교수님인 것 같은데요?”

“아아뇨. 전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놀라서 그래요. 그래도 내가 박 선생을 데려온 사람 아닙니까? 뭔가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하나 풀어봅시다. 응?”

민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부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유희윤 교수는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려고 했지만, 최산호 총장은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물었다.

“박 선생. 번복의 여지는 없는 겁니까?”

“예. 죄송합니다.”

“결국 일이 그렇게 됐군요.”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제 모교이기도 하고, 정든 제자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좀 멀리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더 좋은 곳으로 가서 기반을 닦아 놓으면 제자들도 저를 찾아 와 주겠죠.”

“역시 멀리 보고 세운 계획이군요. 박 선생은 그런 사람이었지······.”

최산호 총장이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희윤 교수는 못마땅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민우의 마음을 돌려야 할 때인데 동조하다니.

“총장님. 지금 고개를 끄덕이실 때가 아니잖습니까?”

“박 선생이 마음을 정한 이상 더 이상은 왈가왈부할 수 없지요. 계약서에도 언제든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가 있으니 법적인 하자도 없고.”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쉰 유희윤 교수가 고개를 다시 민우 쪽으로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섣부른 결정인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봐요. 응? 학칙 개정이 안 된다고 해도 박 선생이 박사만 따면 전임 자리는 얼마든지 도전해 볼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죠. 우리 대학의 국제번역전공은 유니크한 곳이 될 겁니다. 그곳에서 박 선생의 꿈을······.”

“괜찮습니다. 제 꿈은 장소에 구애받는 것이 아니니까요. 기회가 왔으니 청문대에서 그걸 이뤄보려고 합니다.”

“청문대로는 어림도 없지!”

그 한마디 외침으로 민우는 알 수 있었다. 교수라고 해서 모두 현실 감각이 있는 건 아니라고. 적어도 유희윤 교수는 그랬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청문대의 배후에는 대한그룹이 있습니다. 재단 재정도 굉장히 튼튼하지요. 최근 10년간의 대학평가 추이를 보세요.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대학입니다. 그곳에서 충분한 연구지원을 받기로 약속을 받았는데 어림도 없다뇨?”

이어 민우는 자신의 초빙조건을 나열했다. 그럴수록 유희윤 교수의 얼굴이 점점 벌게졌다. 설마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으로 민우를 빼 갈 줄이야.

유희윤 교수의 두뇌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청문대도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이 아닐 텐데? 입시 때 상업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에야······ 대체 무슨 속셈이지?’

물론 유희윤 교수의 의심에도 일리는 있다. 대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교수 임용에 철저히 보수적이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변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정연주의 존재.

그녀의 입김이 들어갔다. 게다가 그녀의 외삼촌 양한선 교수가 직접 맡았다. 모기업 영애와 교무처장이 나섰다. 틀어지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총장님, 유 교수님. 제 뜻은 분명히 전달해 드렸습니다. 퇴직은 교무과를 통해 정식 절차를 밟겠습니다. 짧았지만 그간 보살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봐요. 박 선생!”

자리에서 일어선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조용히 총장실을 나갔다. 유희윤 교수는 닭 쫓던 개처럼 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 문이 닫혔다.

유희윤 교수는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퇴직 절차에는 시간이 좀 걸리니까, 박 선생 이름을 써서 사업 수주를 서두르고 정부쪽과의 연계도 진행을 하겠습니다.”

“이제 박 선생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아시겠지요?”

최산호 총장의 날카로운 질문이 유희윤 교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반발했다.

“그럴 리가요! 오히려 잘 됐습니다. 대학과 재단에 협조적이지 않은 사람은 하루라도 빨리 없어지는 게 낫지요. 국제번역기구 프로젝트 건도 그렇습니다. 알아서 준비를 해 와야지. 그러니까 미움을 사고 버림받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허허허!”

최산호 총장이 큰 소리로 웃었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웃음이라 유희윤 교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왜 웃는 걸까?

최산호 총장은 그 의문을 오래 끌지 않았다.

“유 선생 눈에는 박민우 선생이 상아대에서 버림받은 것으로 보입니까?”

“당연하지요. 결국 버티지 못하다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거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뭐라고요?”

최산호 총장이 슬픈 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늘 그렇듯 그는 창가에 서서 캠퍼스를 오가는 학생들을 내려다보았다.

잠시후 그가 말을 이었다.

“상아대가 그를 버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상아대를 버린 거지요. 오늘 우리는 정말 큰 실수를 한 겁니다. 대학을 바꿀 만한 큰 인재를······ 놓친 거지요.”

때마침 대학본부를 나서는 민우의 모습이 최산호 총장의 눈에 보였다. 미래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여느 때보다도 당당했다.

이제 기회는 또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최산호 총장의 입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 * *

“엄마 나 상아대 그만 뒀어.”

“뭐야?”

민우와 아침을 먹던 그의 어머니가 깜작 놀랐다.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넌지시 물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거니?”

“아니. 더 좋은 데로 옮기려고.”

“어디로?”

“청문대요. 대한그룹이 재단 소유하고 있는 곳인데 여러모로 좋은 곳이야.”

“그랬구나. 에휴, 엄만 또 네가 무슨 실수라도 한 줄 알았지.”

“아들이 그렇게 못 미더우십니까?”

피식 웃은 민우는 열심히 숟가락질을 했다. 오래 자취를 하다가 어머니가 차려준 집밥을 먹으니 하루하루 몸이 건강해졌다.

“그런데 수빈이는 언제 출국한대니?”

“다음 주.”

“그럼 일 년 있다가 돌아오는 거니?”

“아니. 방학이 있으니까 겨울에 잠깐 귀국할 거래. 학회 같은 거 걸리면 오기 힘들긴 하겠지만······ 특별한 일 없기를 바라야지.”

그때 민우는 웨딩홀 앞 벤치에서 수빈에게 프로포즈를 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미니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엄마. 나 수빈이랑 결혼하기로 했어. 내년에 공부 마치고 돌아오면.”

“수빈이가 너랑 결혼해 준다니?”

밥을 한가득 퍼서 입에 넣으려던 민우가 멈칫하더니 울상을 지었다.

“엄마 아들인데 엄마는 내 편을 들어줘야지!”

“원 녀석도. 그런 게 아니고 수빈이처럼 예쁘고 참하고 똑똑한 애가 또 어딨을까 싶어서 그런다. 아직 나이두 어리잖니. 결혼하자고 하든?”

“겁나 좋아하던데? 반지 하나 해줬어. 상견례는 내년 방학에 입국했을 때 하는 걸로 했고.”

“그래. 잘했다.”

어머니도, 수빈이의 부모도 이번 결혼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했다. 수빈이 출국하기 전에 상견례를 하는 게 좋지 않겠냐 하는 말이 오갈 정도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라. 차 조심하고.”

민우는 레아의 차를 타고 청문대로 향했다.

청문대는 서울 상위권 대학이다. 원래는 하위권 대학이었는데, 대한그룹이 대학 재단을 인수하면서 빠르게 성장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민우는 정문에서 레아와 헤어지고 캠퍼스 약도를 따라 걸었다. 길이 잘 정리되어 있어 대학본부 건물을 찾는 것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민우는 교무처장실 앞에서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교무처장 양한선 교수는 평소라면 유체역학센터에 있지만, 오늘은 특별히 교무처장실에서 민우를 맞았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양한선입니다.”

나이 차가 컸음에도 격식이 느껴졌다. 민우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노벨물리학상 후보로 몇 번 언급이 되신 유명한 분이시더라고요.”

“하하하. 뭐 부끄러운 이력이죠. 일단 거기 앉으시죠.”

민우가 먼저 자리에 앉았고, 교무과 직원이 시원한 차를 내왔다. 양한선 교수는 책상에 미리 준비해 둔 임용계약서를 들고 왔다.

“계약서입니다. 한번 읽어 보시죠.”

“감사합니다.”

민우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었다. 기본적으로 민우는 청문대를 100퍼센트까지는 신뢰하지 않았다. 함정 조항이 있을 수 있어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만약 연주가 이번 임용 건에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계약이 편하게 진행되었겠지만, 연주는 일부러 자신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도 민우에게 부담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토를 마친 민우가 싱긋 웃으며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특별히 문제는 없는 것 같네요. 이대로 진행하면 될 거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날인해 주시죠.”

민우는 도장을 꺼내 날인을 했다. 곧 모든 절차가 끝났다.

이로써 민우는 청문대 교양학부 초빙교수가 되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박사학위를 받으면 전임교수로 승진할 것이다.

계약서 한 부를 챙기며 양한선 교수가 물었다.

“박사는 언제쯤 딸 것 같습니까?”

“2년 안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마무리 짓고 바로 작업에 착수해 보려고 합니다.”

송현우 교수 선집 작업은 막바지에 돌입했다.

하지만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송현우 교수의 건강이 악화됐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은 영향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물론, 서지훈 교수와 송승현 실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빨리 선집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양한선 교수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제가 알기로 명인대 인문대 쪽 박사 논문은 심사가 엄정하기로 유명한데······ 부디 잘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학위가 늦어져도 박 교수님 승진에는 문제가 없겠지만요.”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하나 제안드릴 게 있는데요.”

“좋습니다. 그런 능동적인 자세요. 어디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지요.”

“제가 이번에 번역 관련 교재를 써볼까 합니다.”

“교재요?”

“예. 멀리 보고 기획한 책입니다. 그래서 출판을 해야 하는데······ 청문대 출판문화원 쪽하고 연결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양한선 교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박 교수님은 지음사나 라온북스 쪽하고 작업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희 쪽과 하시려는 겁니까?”

“이제 청문대 사람이 됐으니 여기를 잘 키워 봐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맨부커 상을 타신 박 교수님의 저서니 불티나게 팔리겠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추진해 보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민우가 거대한 틀에 퍼즐 하나를 끼웠다. 퍼즐이 완성되면 과연 어떤 그림이 펼쳐질까. 그 설렘에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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