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 < 80장. 위대한 유산 (1) >
“하버드엔 왜? 여행 가려고?”
“아니. 유학.”
민우가 깜짝 놀랐다. 해외여행이야 자주 다니니 별생각 없었는데 유학이라니. 한동안 멍하니 수빈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깐. 유학이라면······ 거기 가서 공부한다는 거야?”
“응. 연구원으로 1년 정도 가 있게 됐어······ 미안해요. 상의하고 결정했어야 하는데 먼저 정해버리고 알려주게 됐네. 말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결정은 빨리 해야 했구.”
이수빈은 수재였다. 해외 유학에 대한 것도 어렴풋하게 예상은 하고 있었다. 데미지는 컸지만, 민우는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 걸로 나랑 상의할 게 뭐 있어? 좋은 기회인데 당연히 가야지. 축하해. 정말 잘됐네.”
“고마워요. 그런데 말야. 이게 잘한 선택인지 아닌지 고민되기도 해.”
그녀의 어조는 진지했다. 민우는 이어질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오빠는 소르본에서도, 소아즈에서도 제안을 받았잖아. 하지만 한국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고. 뭔가 거기에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있지.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돼?”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쾌청한 하늘이 넓게 펼쳐졌다. 그 위로 흰 구름이 여유 있게 떠다니고 있었다. 그 장면을 담으며 민우가 말했다.
“내가 유명한 대학에 가는 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남들이 가는 길을 똑같이 가는 거니까. 오히려 내가 있는 곳을 유명한 곳으로 만들어서 외국 사람들을 이쪽으로 오게 하고 싶어.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만의 길을 만들고 싶은 거지.”
“그거 진심이야?”
민우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섭이었다면 헛웃음을 터트리며 한소리 했을 것이다. 꿈 깨라고. 하지만 수빈은 민우의 진가를 잘 안다.
“왠지 오빠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아. 아니, 해낼 거야.”
“조금만 기다려 봐. 내가 아주 멋지게 해낼 테니까. 예전엔 조금 막연했는데 지금은 그리 멀지는 않은 느낌이야.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 봐야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시작으로 민우의 이름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세계 번역 기구도 그 계획의 일환이었다. 교육과 실무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국제적 조직으로 키우려는 게 민우의 궁극적 목표였다.
대한민국을 세계 문학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주변의 협력도 그만큼 필요했다. 좋은 성과를 위해서는 충분한 자원과 인력이 필요하니까.
“일단 상아대 쪽을 정리하고 청문대에서 기반을 닦아봐야지. 기회가 되면 명인대에서도 뭐 하나 해보고 싶고. 이명인 장학생이니 강의는 받을 수 있으니까.”
“응원할게. 멀리 있어도.”
‘멀리 있어도’라는 말에 여운이 강하게 남았다.
민우도, 수빈도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빈의 눈이 촉촉해지더니 급기야 눈물을 쏟고 말았다. 당황한 것은 민우만이 아니라 이수빈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아, 왜 갑자기 눈물이 나지?”
“남들이 보면 내가 울린 줄 알겠다. 뚝!”
민우가 농을 섞으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화장이 번지지 않게 톡톡 두드리며. 자상한 손길에 수빈의 마음이 풀어졌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냥. 솔직히 말하면 이대로 떠나는 게 너무 불안해. 오빠 주변엔 너무 잘나고 예쁜 사람들이 많잖아. 내가 가버리면 한눈 팔까봐.”
“그럼 안 가면 되잖아.”
“역시 안 가는 게 좋을까······.”
“야, 농담이야 농담.”
고개를 홰홰 저은 민우는 수빈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고민했다.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서로에게 소홀해질 수 있다. 의심도 쌓일 수도 있다. 관계가 변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사실 그것은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민우는 훗날로 예정해 두었던 일을 조금 당기기로 했다. 가방을 뒤적여 작은 상자를 꺼내 열었다. 다이아몬드를 품고 있는 반지가 나왔다.
“이게 뭐야?”
“분위기 좋을 때 이걸로 프로포즈하려고 했는데 영 타이밍을 못 잡았거든. 그래서 가방에 늘 넣고 다녔지. 벌써 한 달째야.”
“으응?”
“지금도 좋은 타이밍은 아닌 것 같은데 왠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네. 그냥 말로 하는 약속은 소용이 없을 것 같고. 자, 왼손 줘봐.”
눈을 깜빡이던 수빈이 왼손을 슬쩍 내밀었다.
민우는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수빈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호수를 기억하고 있어 반지는 아주 딱 맞았다.
마치 수빈을 위해 세공된 것 같은 아름다운 반지였다. 작고 하얀 손에 정말 잘 어울렸다.
“너 미국 갔다 오면 바로 결혼하자.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공부에 전념해. 나도 한눈 안 팔고 내 연구에 전념할 테니까.”
“오빠······.”
“이거 그냥 하는 약속이 아니라 프로포즈야.”
감격한 수빈이 민우의 품에 달려들었다. 민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여 주었다.
사실, 그날 울음을 터트린 것은 수빈만이 아니었다.
결혼식이 시작되자마자 신부인 송승현이 눈물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메이크업 담당이 당황할 정도로 많이 흘렸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그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바로 송승현 실장의 손을 잡고 있는 송현우 교수 때문이라고.
“그만 울어라. 좋은 날에 왜 그리 울어?”
“아버지······.”
“어릴 적에도 곧잘 울곤 했는데.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송현우 교수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당당히 섰다. 사회를 보던 한진섭이 미소를 짓더니 정돈된 목소리로 외쳤다.
“신부, 입장! 모두 뜨거운 박수로 축복해 주세요!”
동시에 주예린의 손이 움직였다.
감미로운 결혼행진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송승현 실장은 웃으면서도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송현우 교수는 붉은 카펫을 힘겹게 걸었다. 딸의 손을 잡고서. 가래가 끓고 기침이 나올 것 같아도 그는 꾹 참았다. 딸을 위해서.
한 편의 논문을 완성하는 것 이상으로 그는 사력을 다했다.
그래서일까. 무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서지훈 교수 앞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린 송현우 교수는 딸의 손을 넘겼다.
“자네는······ 정말 내 모든 것을 물려받는군.”
실로 많은 뜻이 담겨있는 한마디였다.
학풍, 사상, 철학과 핏줄까지. 서지훈 교수는 그 순간에도 그 의미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마음속에 갈무리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빛이 바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빛은 바래게 되어 있어. 만고의 진리지.”
“예?”
“빛이 바래고 변해도······ 그 자체로도 아끼고 사랑해 주게.”
“알겠습니다.”
그 속뜻을 깨달은 서지훈 교수가 고개를 숙였다. 송승현은 그의 팔짱을 꼈고, 송현우 교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본격적으로 예식이 시작되었다. 주례는 라온북스의 노광남 대표가 맡았다.
축가 순서도 별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민우와 수빈, 그리고 예린은 연습의 성과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정성이 느껴지는 무대였다.
“자, 이제 사진도 다 찍었고.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한진섭이 앞장을 섰다.
모든 식이 끝나고 307호 멤버들은 피로연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수빈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유학 소식을 모두에게 전했다.
“꺅! 우리 선배님 외로워서 어쩐대!”
“아니지. 오히려 찬스야. 박민우. 내가 요즘 재미있게 읽는 웹소설이 있는데 말이야. 캐치프레이즈가 이렇더라고.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성······.”
진섭이 아차 싶어 말을 끊었다. 읽던 그 소설은 성인 소설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두 여인들이 자신을 의심스럽게 노려보고 있다.
“서, 성공. 성공 말이야. 다들 다 같이 성공해야지. 안 그래? 하하하!”
“뭔가 성공이라는 단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이 더 공개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바로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 그 사실은 민우가 직접 말했다.
“캬. 드디어 가는구나. 박민우. 굿바이 싱글 라이프!”
“존경하는 선배님의 결혼식이니 선물은 제대로 해야겠네요. 뭐 필요하세요? 서울에 아파트 정도면 충분하려나?”
“오, 그거면 충분하지.”
“아 왜 다큐로 받아요. 재미없게.”
“내년에 세금 폭탄 맞을 녀석이 약한 소리는.”
분위기가 좋아졌다. 깔깔거리며 웃는 사이 한복을 입은 서지훈 교수와 송승현 실장이 다가왔다.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서지훈 교수가 먼저 인사했다.
“오늘 와줘서 다들 고마웠다. 특히 축가는 아주 멋졌어. 진섭이 사회도 끝내줬고.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선물이 될 것 같구나.”
“다음에 집들이 할 거니까 꼭 놀러 와요. 다 같이.”
307호 멤버들은 합심해서 네! 라고 대답했다.
특히 민우와 수빈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오늘은 신랑 신부만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에서도 새로운 변곡점을 찍은 날이기도 하니까.
* * *
여러 일들이 벌어지는 사이 2018년도 1학기가 끝났다.
해외에서 온 메일 중에는 생각보다 영양가 있는 것들이 제법 많았다. 한국 방문을 희망하는 학자들과 번역가들이 몇 명 있었던 것.
민우는 방문을 확정한 사람들과 약속을 잡고 만나기로 했다. 또한 ‘번역인의 밤’에서 인연을 맺었던 학생들과도 자리를 마련했다.
그 만남 이후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 정부 주도로 진행되는 아카데미로는 한계가 명확해. 다들 벽에 부딪쳐 있어. 뭔가 새로운 교육체계를 만들어야 할 거 같은데······.’
가르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다보니 절로 다음 방향이 떠올랐다.
‘내가 한번 번역 교재를 써볼까?’
곧 구체적인 계획이 무서운 속도로 머릿속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민우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곧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이론과 실무를 총망라한 교재를 하나 만들어 보는 거야. 두껍고 알차게.’
따르르릉―
내선이 울렸다. 깜짝 놀란 민우가 상념을 떨치고 수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보니 상아대 국문과 조교실에서 온 전화였다.
― 교수님. 지금 강의평가 나왔어요. 오셔서 스코어 확인하세요. 아님 제가 몇 점인지 불러 드릴까? 호호호.
“됐어. 내가 가서 확인해보마.”
결과는 인트라넷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민우는 조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구서현 조교에게 마침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교실 안으로 들어가니 구서현 조교가 프린트물 하나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몇 점이게요?”
민우가 손을 뻗어 평가지를 낚아챘다. 다른 건 생략하고 평점을 확인했다. 곧 굳었던 그의 입가가 풀어지며 미소가 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잘 나왔네? 아주.’
4.97점. 상아대에 교수평가 시스템이 도입된 이후로 단 두 명만이 4.9점을 넘겼는데, 이번에 민우가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비전임교수는 포지션상 강의평가에 불리한 점이 많은데 그것을 모두 떨쳐내고 좋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알아보니 인문대 신기록이라고 하더라고요. 전임이 아니면 4.5점도 넘기 힘들다던데. 역시 자대생의 힘인가?”
“학생들이 똑똑한 거지. 사람 잘 알아봐서.”
“뭐래.”
그런데 민우는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평가지를 슥 훑어보고는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구서현 조교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별로 안 좋아하시네요? 학부 때의 교수님이라면 팔짝팔짝 뛰고 난리였을 텐데.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나 그만 둘 거거든.”
“예?”
“그만 둘 거라고. 여기.”
눈만 끔뻑거리며 민우를 바라보던 구서현 조교가 정신을 번뜩 차리더니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계약 기간 반년 더 남았잖아요!”
“얘기가 좀 길다.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 해 줄게. 네가 좋아하는 규카츠 먹으면서.”
싱긋 웃은 민우가 조교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면담 시간이네. 총장실로 바로 가야겠다.’
민우는 오늘 사직 의사를 표명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면담을 요청했고, 민우는 인문대 건물을 나서 바로 대학본부로 향했다.
총장실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의 손님이 있었다.
바로 유희윤 교수였다. 그가 먼저 와서 최산호 총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박 선생 아닙니까?”
“안녕하세요. 교수님.”
“하하하. 이번에 연구실 같이 쓰게 된 허 교수와는 잘 지냅니까? 배울 게 많은 분입니다. 모쪼록 서로 도와가며 잘 지내길.”
비꼬는 어조였다. 민우는 유치한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꾸 없이 최산호 총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민우가 무시하자 유희윤 교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조소를 지었다.
“서운한 게 많아서 오셨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풀어 보시지요. 총장님.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밖으로 나가려던 유희윤 교수가 돌아섰다.
자신을 불러 세운 것은 최산호 총장이 아니었다. 바로 민우였다. 민우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제안했다.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말씀 좀 나누시죠? 교수님도 같이 들으면 좋은 일이라서 말입니다.”
유희윤 교수가 최산호 총장을 바라보았다. 허가를 구하듯이. 최산호 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고, 민우의 한마디가 그 침묵을 깨트렸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상아대 겸임교수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