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 < 79장. 불꽃처럼 (3) >
시간이 흐르고 토요일이 밝았다.
날씨가 쾌청했다. 약간 덥긴 했지만 나들이하기 좋은 날씨였다.
오늘은 다른 의미로도 좋은 날이었다. 드디어 서지훈 교수와 송승현 실장이 백년가약을 맺는 날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들의 결혼식이다 보니 각계각층에서 축하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조용히 결혼식을 치르려고 했었다. 서지훈 교수는 소란스러운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송승현 실장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서지훈 교수는 그런 아내의 속마음을 이해해 주었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어?”
민우가 태블릿으로 보고서를 읽으며 물었다. 진섭은 잠시 내비게이션으로 시선을 돌렸다.
“30분은 더 가야돼. 막히니까 좀 더 걸릴 수도 있고. 강남대로는 자비가 없답니다.”
“빨리 좀 가자.”
“내가 택시 기사냐? 하, 자식 면허 좀 따라니까. 돈도 잘 벌면서.”
진섭이 기다렸다는 듯 투덜거렸다.
민우를 포함한 307호 멤버들은 한진섭의 차를 얻어 타고 웨딩홀로 향하는 중이다.
주예린은 그 틈에 원고를 쓰고 있었고, 민우는 태블릿으로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다. 핸들을 잡은 한진섭이 눈살을 찌푸렸다.
“독한 것들. 오늘 같은 날엔 일 좀 멀리하고 쉬면 안 되나?”
“원래 성공하는 사람들이 자투리 시간을 잘 쓰는 법이래요.”
“하여간 상아대 출신들은 답이 없어요.”
민우는 피식 웃어 넘겼고, 주예린은 아예 들은 척을 안했다. 결국 대화는 진섭과 수빈 사이에만 오갔다.
신호가 걸렸다. 한진섭은 핸들에 엎드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그런 날씨였다.
“송현우 선생님이 병환이긴 하지만 오늘은 정말 기쁘시겠네. 날씨 좀 봐. 끝내준다. 마치 하늘이 축복이라도 해주는 것 같지 않아?”
“오빠답지 않게 감상적이네요.”
“무슨 서운한 소리야? 한때 나름 알아주는 로맨티스트였다고.”
“개풀이.”
무심하게 타이핑을 하던 주예린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덕분에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수빈의 풉 하는 웃음소리만 들렸다.
당황한 진섭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너희 둘은 언제 결혼하냐? 전에 듣기로는 민우가 너희 아버님 만났다고 하던데. 그때 얘기 나온 거 아니었어?”
“때가 되면 하겠죠. 음, 아직 학생이고 하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는 수빈. 그러나 민우는 전화가 왔는지 대답 대신 핸드폰을 꺼냈다.
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 매니저님. 통화 괜찮으세요?
“예. 말씀하세요.”
― 전에 부탁하신 메일 분류 건 마무리됐습니다. 실시간으로 메일이 오고 있어서 주기적으로 갱신을 해야 할 듯해요.
“어땠어요?”
― 80퍼센트 이상이 스팸이었고, 나머지는 축하 메시지나 사적인 질문이 들어 있었습니다. 중요도에 따라 매니저님께서 따로 보셔야 하는 중요한 메일은 묶어서 포워딩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봐야 하는 메일은 몇 개 정도 됩니까?”
― 열다섯 통입니다. 대학 기관과 업체에서 온 메일입니다. 프리랜서 번역가에게 온 메일도 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포워딩 부탁할게요. 지금 결혼식장에 가고 있어서 이따 일 끝나고 따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 네, 매니저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민우는 전화를 끊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태블릿 화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생각은 딴 데로 가 있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야. 80퍼센트 이상이 스팸이라니.’
세계 각지에서 뜨거운 호응이 올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파급력이 크지 않았다.
그래도 민우는 실망하지 않았다. 세상 일이 다 그렇지 않던가. 뜻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다.
‘진흙 속에 진주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 일단 돌아가서 메일을 확인해 봐야겠어. 프리랜서들한테도 연락이 왔다니 프로젝트로 끌어들일 만한 사람들을 추려보자.’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이 한진섭의 차가 웨딩홀에 도착했다. 네 사람은 차에서 내려 식이 열리는 홀 안으로 들어갔다.
민우와 팔짱을 낀 수빈은 틈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요즘 들어 부쩍 웃음이 줄어들었다.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됐다.
한번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자신도 하버드대학교 유학 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어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어, 왔어?
근사하게 차려입은 서지훈 교수가 식장 앞에서 민우와 일행을 맞았다.
“이야, 박민우. 한진섭. 둘이 아주 잘 차려 입었는데? 평소에 좀 그렇게 잘 입고 다녀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생님 결혼식인데 힘 좀 줘봤습니다. 축가도 불러야 하니까요.”
“민우는 잘 모르겠지만 패션의 완성은 역시 얼굴이죠.”
“하하하하! 말은 잘해요.”
서지훈 교수는 늘 웃는 인상이지만, 여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만큼 송승현 실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컸던 것이다.
“아무튼 잘 왔다! 축의금 같은 건 넣지 말고 밥이나 맛있게 먹고 가.”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민우는 축의금 봉투를 두둑이 준비해 왔다. 요즘 돈을 쓸어 담고 있는 주예린의 것은 그보다 더 두둑했다.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만큼 그 두 사람의 인생에서 서지훈 교수가 끼친 영향이 컸다. 조금이라도 신혼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아이구, 서 교수!”
그때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내가 끼어들었다. 307호 멤버들은 자연히 한 발 물러났다.
“결혼 축하합니다. 허허허. 언제 좋은 소식 들려오나 싶었는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학계는 물론 출판계에서도 이번 결혼식에 주목했다. 두 분야는 매우 긴밀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손님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민우와 307호 멤버들은 방해가 될까봐 장소를 옮겼다.
일단 신랑 측에 축의금을 넣고 식권을 받았는데, 민우는 특별히 봉투 하나를 더 준비해 신부 측에도 넣었다
그걸 구경하던 주예린이 물었다.
“선배는 왜 신부 쪽에도 넣어요? 돈 자랑하려고?”
“송 선배님도 내 선생님 중 하나거든.”
“엥? 그건 또 무슨 소리람?”
“그런 게 있어. 너무 알려고 하지 마. 다친다.”
2년 전, 인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그녀의 가르침은 여전히 마음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에 대한 작은 보답인 것이다.
네 사람은 신부 대기실에 들어가 인사를 나눴다. 송승현 실장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2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진섭과 예린은 인사만 하고 바로 나갔다. 하지만 신부와 친분이 있던 민우와 수빈은 송승현의 양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행복하세요.”
“와 줘서 고마워요. 인사는 그이랑 나중에 따로 할게요.”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신부대기실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민우와 수빈은 대기실을 나섰다. 그런데 진섭과 예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예린인 어디 갔지? 피아노 만지러 갔나?”
대답이 없어 돌아보니 민우가 창밖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있나 싶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응? 아니야. 애들은?”
“먼저 들어갔나 봐요.”
“그래.”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뚱한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던 이수빈이 민우의 배를 쿡 찔렀다.
“근데 오빠 요즘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왜?”
“그냥. 뭐랄까······ 표정이 좀 어둡다고 해야 하나. 복잡? 생각이 많아 보여서요.”
사실 며칠 전부터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요즘 민우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론가의 눈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나저나 그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요즘 너도 영 기운 없어 보였거든. 무슨 일 있는 거야?”
“아, 아뇨.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을 더듬는 사람이 어딨냐.”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그래서 말을 더듬은 것이다.
싱긋 웃은 민우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수빈의 손을 잡았다.
“잠깐 나갈까? 식 시작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그래요.”
두 사람은 웨딩홀 밖으로 나갔다. 그늘이 진 근사한 벤치가 보였다. 민우는 손수건을 꺼내 수빈이 앉을 자리에 깔아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수빈은 유학 건에 대해 민우가 알게 됐나 싶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해 놓았으니까.
“설마 아까 언제 결혼할 거냐는 질문에 대답 안 해서 삐친 건 아니겠지?”
“아냐. 뭐 섭이 오빠가 그러는 거 하루 이틀인가?”
“그럼 무슨 일이신데요. 이수빈 선생님. 요즘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풀 죽어 있으셨잖아요.”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 아닌감.”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던 두 사람이 결국엔 웃음을 터트렸다. 사귄 지 2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는 숨길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좋아. 그럼 숨기고 있는 거 하나씩 말해볼까?”
“오빠부터.”
“왜 안 좋은 건 매번 나부터야?”
“오빠니까.”
오빠니까.
마법 같은 한마디였다.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가 없다. 민우는 최근 고민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상아대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수빈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자대 출신이라서 잘 봐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보네요.”
“전임 전환은 좀 어려워졌지. 최근엔 연구실도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쓰게 됐어. 겸임교수들이 연구실 같이 쓰는 건 당연한 일이라 불만은 없는데······ 왠지 시기가 교묘하게 맞아 떨어지니까 좀 그렇더라.”
새로 들어온 교수는 초빙교수였는데,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라 소음에 민감했다. 덕분에 학생들과 세미나를 함께 하지 못하게 됐다.
솔직히 그것 때문에 실망을 많이 했다.
큰 상을 타 위업을 세웠고, 자대 출신이라 대우를 해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다. 대학과 재단은 늘 ‘효율’만 강조했다.
“그럼 가르치던 학생들은 어떻게 됐어요? 연구실에서 스터디 한다고 했었잖아.”
“도서관 세미나실 잡아서 같이 공부하는 모양이더라. 내가 들락거리기도 힘드니 예전처럼 봐주긴 어렵게 됐지.”
“많이 서운하겠다. 오빠도, 애들도.”
“솔직히 말하면 그래.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 생각나더라. 고향에 돌아왔는데 왠지 고향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 정이 떨어졌나······.”
수빈은 민우의 심정을 헤아리려 노력했다. 그래서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걸로는 부족해서 나머지 손도 그 위에 포갰다.
“공교롭게도 그 와중에 청문대에서 제안이 왔고.”
“제안이요?”
“초빙교수 제안이 왔어. 국문과는 아니고 교양학부 쪽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전임교수로 전환해 주는 조건이야.”
“와, 파격적인데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빈의 말이 맞았다. 그래서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조건이지. 문학 관련 강의 하면서 번역 쪽 강의를 맡아달라고 하더라고. 나한테는 이상적인 제안이야.”
“그럼 어쩔 거예요?”
“결정은 했는데 머리랑 마음이 따로 놀아서 심란하네.”
수빈은 이해했다. 민우는 늘 제자들 자랑을 하곤 했다. 마치 자신의 자식처럼.
“첫 강의 전에 매형이 이런 말을 하더라. 학생들과 적당히 거리를 벌리라고. 그런데 그게 잘 안 된 것 같아. 학교를 떠나면 애들 서운해할 거고. 좀 마음이 안 좋더라고.”
“옮기기로 완전히 결정한 거예요?”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빈이 상냥히 웃으며 민우의 등을 다독였다.
“오구오구! 울 오빠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착한 게 아니라 바보 같은 거지.”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애들도 뜻이 있다면 오빠가 옮긴 대학으로 오겠죠. 대학원에 오는 방법도 있고요.”
“그걸 몰라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 내가 좀 더 처신을 잘했다면 모교에서 좀 더 좋은 추억을 만들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서 여러모로 아쉬워. 뭔가 반짝하고 만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학부 때 오빠가 서지훈 선생님을 만난 경험이 컸나 봐요.”
“응. 아무래도 그렇지.”
“그럼 앞으로는 학생들하고 거리를 둘 거예요?”
“아니.”
의외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미소를 지으며. 민우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아직 내 실험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어떤 게 정답인지는 차차 알아가야겠지. 교수로서의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오빠 같은 교수님이 세상에 많아졌음 좋겠다.”
“칭찬이지?”
두 사람이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흐트러뜨렸다.
“오빠. 나 하버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