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 < 79장. 불꽃처럼 (2) >
편지는 공문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명인대 문학 전공자 중 우수한 학생을 한 명 추천하여 교환학생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설예라 교수가 덧붙였다.
“그쪽 대학원하고 진행하던 교류 프로그램이 있어. 이번에는 우리 과 쪽으로 넘어왔는데 연구원으로 네가 적당한 것 같아서 추천 리스트에 올리려고. 아무래도 좀 갑작스럽지?”
“예. 엄청요······ 전공은요?”
“비교문학.”
“전 문학 이론 쪽인데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문학 이론을 가다듬는 데는 최선의 선택이 될 거야. 여러 나라의 문학과 이론을 공부하는 곳이니까. 평론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면서?”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교문학은 낯선 분야가 아니다. 민우를 통해서 들은 것도 많고, 학부 시절 관심을 두고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근데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원래 기회라는 게 그래. 준비되지 않았을 때 오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넌 아주 잘하고 있어. 논문도 잘 쓰고 있고, 방송에서도 잘 활약하고 있고.”
“선생님이야 늘 절 좋게 봐주시잖아요.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다른 선생님들이라고 다를 것 같아? 서지훈 선생님도 매번 네 칭찬만 하던걸.”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다면 수빈은 당장 하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민우라는 존재.
설예라 교수는 그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수빈의 기색을 읽고는 장난스레 물었다.
“역시 애인이랑은 떨어지기 싫은 거니?”
“아, 그런 거라기보다는······.”
“1년 과정이라 꽤 길긴 해. 중간에 방학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못 볼 수도 있겠지.”
수빈은 문득 그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서로 헤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을.
캠퍼스 커플이기 때문에 약속을 잡지 않아도 매일 본다. 석사 때는 307호에서, 박사 때는 310호에서, 도서관에서, 때로는 캠퍼스를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하나씩 쌓여 추억이 되고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멀리 떨어져버린다면?
심적으로 굉장히 힘든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으니까. 수빈은 그게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현실에 안주할 수는 없어. 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해.’
민우는 끊임없는 도전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연구실적도 쌓고 상도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차차 알려나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자신의 모습은 너무 초라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정도 중요하지만 학문적 능력도 키워가야 하는 게 아닐까.
자신의 삶은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만의 것이니까.
설예라 교수는 수빈이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때가 됐을 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선택이 쉽진 않을 거야.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좋은 기회라는 거. 하버드대학이라구. 세계적인 대학에서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지. 평론가에게 견문을 넓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너도 잘 알고 있지?”
“예.”
수빈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경험이 평론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심지어 여행을 다녔던 경험조차 글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래서일까. 가끔 명인대를 벗어나 다른 교육환경을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막연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수빈이 묾었다.
“선생님. 저, 이거 언제까지 결정을 해야 하나요?”
“이번 주 내로는 결정을 해줘야 해. 한 명을 보내야 하긴 하니까. 네가 하지 않을 거면 다른 친구한테 기회를 줘야지.”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고민해보고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러렴.”
그렇게 연구실을 나선 수빈은 손에 쥔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꿈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마음은 이미 반쯤은 기울어 있었다. 수빈의 이성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반드시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지만 감성은 그렇지 못했다.
이걸 민우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막막했다. 군 입대 통지서를 받은 남자들이 여자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런 걸까 싶기도 했다.
‘난 오빠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오빠는······.’
평론가는 작품의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읽을 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에 숨겨진 생각까지 읽을 순 없다.
그래서일까. 수빈은 한동안 민우 생각에 복도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그저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 * *
“정말 너무한 거 아닙니까?”
유희윤 교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은 총장실. 학교 대표의 개인 공간이었음에도 그는 체면 같은 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맞은편엔 최산호 총장이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씁쓸했다.
머리 뒤로 유희윤 교수의 말이 쏟아졌다.
“일개 겸임교수 주제에 그런 말을 떠들다니요. 착각? 하, 다른 교수들도 태반이 박 선생의 무례한 태도를 지적했습니다. 이대로 넘어가는 건 곤란합니다. 정말.”
유희윤 교수의 목에 핏대가 섰다. 민우의 말이 아직도 귓전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난감하군요.”
한숨을 내쉰 최산호 총장이 돌아섰다. 창가를 등지자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하지만 박 선생의 말도 일리가 있잖습니까. 기금 조성에 대해서 언론에서 이슈가 된 만큼 조심스러운 입장은 이해를 해야지요.”
“총장님······!”
목소리를 높이던 유희윤 교수가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박 선생은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제 손으로 프로젝트를 들고 와도 모자랄 판에 감싸주시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임용권을 쥐고 있는 건 우리 대학이지 않습니까?”
“바꿔 묻지요. 박 선생이 우리 대학에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교수직 때문이겠죠. 서른 살에 겸임교수 자리 받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최산호 총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틀렸다고 말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한가롭게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우리 대학을 위해섭니다. 정확히는 후배들을 키우고 싶은 거겠지요. 본인의 손으로. 애교심이라는 표현이 적당하겠군요. 물론 유 선생은 이해를 잘 못하겠지요. 상아대 출신이 아니니.”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신입생을 많이 유치하고 대학의 평판을 올리는 게 중요하지. 재단 이사회의 존재 이유를 총장님께서 모르시는 건 아니잖습니까?”
“압니다. 나도.”
최산호 총장이 오른손을 들었다. 이제 그만 진정하라는 제스처였다.
“길은 다르지만 대학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목적지는 같지요. 최대한 박 선생을 품고 가 보려고 했는데, 이게······ 쉽지는 않을 거 같군요.”
“전임 자리만 주면 붙어 있을 거 같습니다만.”
“나도 처음에 그러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재단에 정교수 임용 관련 학칙 개정안을 올린 거고. 하지만 나이브한 태도였어요.”
“나이브한 태도라니요?”
“청문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예?”
유희윤 교수의 머릿속에 온통 물음표 기호가 떠돌아다녔다. 명인대라면 또 모를까. 청문대는 민우와 전혀 접점이 없는 곳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국문과에서 나선 겁니까?”
“정확히는 모릅니다. 들려오는 소문이 그래요. 대학 본부 차원에서 초빙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디다.”
“그럼 뭐 보내버리지요! 교수 사회의 물을 흐리는 친구는 상아대에 필요 없습니다.”
그 말에 최산호 총장이 싱긋 웃었다. 왜 요즘 교수들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볼 줄 모르는 걸까.
하지만 대놓고 지적하지는 못했다. 자신도 이미 그러한 흐름에 휩쓸려 여기까지 온 거니까.
“유 선생은 ‘라뽀’라는 말을 압니까?”
“알지요. 그 정도로 교양이 없지는 않습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의사와 환자 사이의 유대감이지요. 이건 교육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공부를 하며 학생들은 늘 문제에 시달리게 되고, 이때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바로 교수의 역할이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게 바로 라뽀, 유대감입니다. 서로간의 신뢰라고 할까요. 박 선생은 그런 쪽으로는 누구보다도 재능이 있습니다.”
“그야 모교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유리한 게 있겠지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유 선생은 사람 볼 줄을 모르는 겁니다.”
너털웃음을 터트린 최산호 총장이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유희윤 교수는 뭔가를 더 쏟아내려 했지만, 최산호 총장의 엄정한 표정을 보고는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 * *
그로부터 이틀 후, 조성진 교수가 민우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어, 그래. 앉아.”
조성진 교수는 육중한 몸을 소파에 기댔다. 그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편해져서 나오는 한숨은 아닌 것 같아 민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대체 월례 회의 때 무슨 짓을 벌인 거냐?”
“별일은 없었고, 유희윤 교수님과 사소한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사소한 일이야? 상세히 말해 봐.”
민우는 월례 회의 때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모두 말했다. 민우의 말을 듣고 있던 조성진 교수는 대꾸 없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왜 그랬냐? 좀 참지 그랬어.”
“참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솔직히 학교 측의 대우에 실망했습니다. 회의에 불러준 건 고마운데 사전 협의도 없이 일을 너무 벌였어요.”
“이 바닥이 다 그런 거 아니겠냐? 하물며 사립대인데. 얼마나 심하겠어.”
조성진 교수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최근 분위기가 좋았다. 이대로라면 민우가 전임교수가 되는 것은 꿈이 아니었다. 한데 회의 한 번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너에 대한 안 좋은 평가가 지배적이야.”
“왜죠?”
“소문이 그렇게 퍼졌으니까. 그 회의 구성원들이 다들 굵직한 교수들이라는 게 컸어. 하극상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하, 정말 억울하네요. 하극상이라니······.”
만약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섭이었다면 쌍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민우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정도로 일이 커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모두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아니었다.
조성진 교수가 말을 이었다.
“너보다 억울한 사람 수두룩하다. 괜히 강의 못 딴 박사들이 노가다판을 전전하는 줄 알아? 가끔 신문에도 나오잖아. 학력 속이고 취업하는 경우도 부지기수고 약 먹고 세상 떠나는 사람도 가끔 있지. 하물며 대학교수 임용 건인데 어떻겠어.”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죠······.”
“대한민국의 학문 집단은 굉장히 보수적이야. 아주 성능이 좋은 백혈구랄까. 이질적인 뭔가가 들어오면 강하게 반응을 하지. 설령 그게 대학의 이권이 걸려있다고 해도 말이야. 내 말 이해하겠어?”
민우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게슴츠레 눈을 뜨던 조성진 교수가 담배연기를 후 하고 내뱉었다.
“무엇보다도 넌 지켜야 할 것들이 있잖아.”
“지켜야 할······ 것이요?”
“제자들.”
민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순간 여러 학생들과 차민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요즘 연구실에서 전공 세미나 한다며? 고민상담도 잘 해준다고 소문났고. 이대로라면 강의평가도 최우수겠지. 다들 자대 출신 교수님이라고 잘 따르는 모양이던데. 근데 말이다. 만약······ 일 년 계약으로 쫑 나면 걔네들은 어쩔래? 너야 먹고 살 방법이야 많겠지만 말이다.”
“그건.”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민우는 입을 다물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탔으니 전임은 이제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잠깐이나마 안도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너야 다른 대학에서 러브콜을 받을 수도 있겠지. 그간 세워놓은 공적이 있으니 겸임교수 정도는 무난할 거야. 하지만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믿고 따르던······ 혹여나 대학원에 진학해 자신의 미래를 걸어볼까 싶은 마음까지 품었던 학생들이 있다면 그 녀석들의 박탈감은?”
“······.”
“물론 걔네들의 사정까지 챙기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좋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에서 무리수를 둘 필요까진 없었다는 거지. 좋게 풀면 좋으련만.”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조성진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짓이겨 껐다.
“딱히 답이 있겠냐?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일이 잘 해결되기만을 기다려 봐야지. 마침 네 전임 임용 건으로 이사회에서 학칙 개정안이 올라갔다니 좀 더 기다려 봐라.”
“예. 알겠습니다.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심려는 무슨. 됐고, 너도 처음 제자 키워보는 거니 그냥 시행착오라고 생각해라.”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자신이 회의실에서 했던 이야기를 되짚어 보았다. 한 마디도 빠짐없이.
‘내가 틀린 말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제자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어느새 자신의 연구실에 도착하고 말았다. 민우는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웠다. 그래서 돌리지 못한 게 아니었다. 왠지 제자들을 볼 면목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