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07화 (207/500)

207화 : < 79장. 불꽃처럼 (1) >

“안녕하십니까.”

사람들이 가볍게 목례로 답했다.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굳이 자신을 소개할 필요는 느끼지 못해 민우는 바로 자리에 앉았다.

‘호의적은 분위기는 아니네. 아무래도 내가 겸임교수라서 그런 건가? 급이 안 되니까.’

하지만 민우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부탁을 해서 온 자리가 아니다. 부탁을 받아서 온 자리다. 그러니 꿇릴 것은 조금도 없다.

곧 문이 열리고 최산호 총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전원 기립하여 그를 맞았다. 최산호 총장이 상석에 앉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총장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흐음, 다들 모인 것 같군요. 그나저나 박민우 선생은 회의에 처음일 텐데.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군요.”

“예. 잘 모릅니다.”

“시작하기 전에 간단히 소개할까요. 우선 이쪽은······.”

최산호 총장은 모인 사람들을 일일이 지목하며 이름과 소속을 알려 주었다.

덕분에 민우는 이번 회의가 일반적인 회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 학부장 혹은 학과장급 교수들이 모였던 것이다.

민우는 대강 얼굴만 익혔다. 어차피 두 번 이상 볼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그중 주목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영문과의 유희윤 교수. 그가 국제번역전공의 주임교수 역을 맡게 될 예정이었으니까.

민우는 유희윤 교수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보통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무테안경 너머로 비춰지는 날카로운 눈매와 욕망에 찬 눈빛. 깔끔하게 쓸어 넘겨 고정시킨 머리카락. 한 눈에 봐도 야망이 넘쳐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민우가 먼저 가볍게 목례했는데, 유희윤 교수는 씨익 웃고 말았다.

‘느낌이 싸늘하다. 주의할 필요가 있겠어.’

민우는 빈 노트에 유희윤 교수의 이름 세 글자를 적어 넣었다.

최산호 총장의 소개가 끝나자 비서실 직원 한주연이 두꺼운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민우도 한 부 받고 빠르게 훑어보았다.

‘국제번역전공에 대한 이야기가 있긴 한데 메인은 아니네. 굳이 내가 끼어들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대학의 중장기발전 계획과 학부별 이슈 등을 다룬 월례 회의였다. 학교 운영에 대한 권한이 없는 겸임교수가 낄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를 이 회의에 불렀다는 건······ 역시 내가 그만큼의 위상을 갖췄다는 의미겠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거나.’

전임교수 자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대로라면 승진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민우는 방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맞은편에서 유인물을 살펴보는 유희윤 교수 때문이었다.

민우는 그가 자신을 초빙할 때 헐값에 데려오려고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성진 교수가 미리 귀띔해주지 않았더라면 마음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국제번역전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유희윤 선생. 발의를 부탁하지.”

“예, 총장님.”

유희윤 교수는 당당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한주연 비서가 나눠준 유인물 말고 별도의 자료를 준비했다.

“우리 대학의 국제번역전공 신설에 다양한 매체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나 이번 <태엽시계>의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으로 인해 번역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죠. 일단 제가 준비한 자료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유희윤 교수가 신호를 하자 빔 프로젝터가 켜졌다. 회의실 우측 스크린에 사진 자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경한신문, 민주일보, 한일신문 등 국내 유력 일간지 및 인터넷 매체에서 번역의 중요성과 사업성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선도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우리 대학으로서는 호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가 고개를 까딱이며 신호를 보냈다. 사진 자료에 이어 그래프가 하나 띄워졌다.

“이번엔 그래프를 보시죠. 해가 지날수록 번역에 대한 지원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정부 지원 사업도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관련 연구를 수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지요.”

유희윤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순간 민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희윤 교수가 준비한 자료에 국제번역기구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밴 다이어그램으로 국제번역전공과 국제번역기구를 한데 묶었다. 두 개념의 교집합에는 ‘수익 창출’이라는 설명이 들어가 있었다.

민우가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이런 식으로 이용될 줄은 생각도 못했네.’

그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유희윤 교수가 레이저 포인터로 ‘수익 창출’ 부분을 가리켰다.

“박민우 선생이 시상식에서 언급한 국제번역기구를 우리 대학에서 주도한다면 어떨까요. 굉장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학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수익 면에서 대학재정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잠깐만요.”

잠자코 있던 민우가 나섰다. 손을 들고서.

좌중이 고요해졌다. 호의적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깊은 의문을 담고 있는 목소리라 최산호 총장도 민우를 주목했다.

하지만 유희윤 교수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되물을 뿐이다.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정말 죄송한데······ 저 프레젠테이션에 왜 제가 기획한 국제번역기구가 들어가 있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박민우 선생이 준비하는 계획 아닙니까? 박 선생은 우리 대학 소속이니 당연히 학교와 재단을 위해 이바지해야지요.”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다고요.”

그렇게 대꾸한 민우가 일어섰다. 1년 계약직 교수라는 허울은 벗어던진 지 오래. 이 기회에 제대로 한마디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반면 유희윤 교수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민우는 유희윤 교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국제번역기구는 제 개인 프로젝트입니다. 상아대와는 그 어떠한 관련이 없습니다. 지원을 요청한 적도 받은 적도 없고요. 국제번역전공을 책임지고 계신 유희윤 교수님과도 커뮤니케이션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요.”

“헌데 저에게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일을 진행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닌지요?”

“과민할 수밖에요.”

민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보며 설득하듯 말했다.

“안 그래도 기금 조성이니 뭐니 여러 의혹이 나오고 있는 시점입니다. 저는 기자회견을 열어 번역 기구를 비영리단체로 만들 거라고 분명히 밝혔고요. 하지만 이렇게 대학에서 나서서 이권 단체로 만들어 버리면 제 입장은 뭐가 됩니까?”

민우의 목소리엔 고저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명분과 논리가 있었다. 관록이 있는 유희윤 교수도 쉽게 받아치기가 어려웠다.

민우는 묵직하게 한마디 더 준비했다.

“대학은 재단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연구자와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죠. 이 점을 한번 깊게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하하하. 이것 참 뭐랄까. 당황스럽군요. 박민우 선생? 지금 나에게 훈계하는 겁니까?”

“훈계라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조언을 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자대 출신이자 힘도 권한도 없는 비전임 연구자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대로라면 날이 선 공방이 이어질 것이 자명한 상황. 이에 최산호 총장이 중재에 나섰다.

“두 분 다 그만 하지요. 서로 오해가 좀 있는 거 같은데. 일단 앉으시지요. 어서요.”

“죄송합니다. 총장님.”

“크흠.”

민우와 유희윤 교수가 자리에 앉았다. 그 와중에도 두 사람 사이의 눈싸움은 계속되었다.

민우는 애초에 다른 교수들에게 굽히고 들어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꿇릴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정정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생각이었다.

서른 살이라는 젊은 나이도, 박사과정생이라는 학력상의 약점도, 겸임교수라는 포지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신념만을 따를 뿐이다.

최산호 총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희윤 선생이 너무 갑작스레 발표를 한 거 같은데······ 실은 내부적으로는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된 겁니다. 박 선생의 국제번역기구를 우리 대학에서 추진하는 게 어떤가 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제 개인 프로젝트로 시작할 겁니다. 제 신분이 겸임교수인 만큼 우리 대학과는 무관하게 진행할 생각이고요. 저는 상아대 교수가 아닌 번역가 박민우로서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때문에 대학에 프로젝트에 대한 귀속권은 없습니다.”

“으음.”

최산호 총장이 낮게 신음했다. 민우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이 깊어졌다. 사전에 조율을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남았다.

그것은 유희윤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군!’

민우가 자신이 겸임교수임을 주장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만약 민우가 전임교수였다면 귀속권을 주장하기가 어려워진다. 대학과의 관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겸임교수였기에 자유로웠다.

“박민우 선생. 에······ 그러니까 우리 대학을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설 의향은 없습니까?”

최산호 총장이 진지하게 청했다.

민우가 보통의 비전임교수였다면 당연히 한 발자국, 아니 두어 발자국이라도 물러섰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재계약 때 불이익을 당할 테니까.

하지만 민우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이대로 양보하고 물러서는 것은 학자로서의 자존심으로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건 양보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의의 문제죠. 저는 제가 세운 계획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상아대와는 별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융통성이 없는 친구로군.”

유희윤 교수가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민우는 그를 한번 빤히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박 선생의 입장도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천천히 논의해 봅시다. 더 안건은 없는 것 같으니 회의는 이만 끝내도록 하지요.”

그렇게 월례 회의는 흐지부지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힌 유희윤 교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교수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민우도 유인물을 챙기고 대회의실을 나섰다. 그때 뒤에 따라붙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음산한 기분이 들어 민우가 뒤돌아섰다.

“상 하나 탔다고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누가 박 선생을 우리 대학으로 초빙했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요?”

유희윤 교수였다.

민우는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평정을 잃진 않았다. 오히려 웃는 여유를 보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시간강사로 초빙하려고 하셨다지요? 조성진 선생님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전 시간강사 대접이나 받고 있었겠죠. 유감스럽게도 말입니다.”

민우가 일침을 날렸고, 유희윤 교수는 순간 움찔했다. 조성진 교수가 그때 회의 내용을 다 까발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유희윤 교수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악마 같은 미소를 하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민우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잘 들어. 선배로서 한마디 충고하지. 교수 사회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자네의 실력? 나도 잘 알아. 유능한 친구지. 하지만 이 바닥에서 실력으로 승부한다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무슨 말인지 아나? 모른다면 차차 알게 되겠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 채 유희윤 교수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민우는 우두커니 서서 그가 남긴 한 마디를 곱씹었다.

‘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민우의 두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곧 결론이 나왔다. 민우는 어깨를 한번 털었다. 유희윤 교수의 손이 닿은 곳이었다.

‘아주 간단한 문제네. 내가 만화 같은 일을 보여주면 되겠어.’

답을 찾은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 * *

오랜만에 설예라 교수의 호출을 받은 이수빈은 빠른 걸음으로 인문관을 올랐다. 곧 연구실 앞에서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를 한 갈래로 묶은 설예라 교수는 오늘도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부르셨어요?”

“요즘 축가 연습한다며 바쁘지?”

“소문이 거기까지 났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지훈 선생님 결혼식인데 안 날 리가 있니. 학부 때부터 사귄다니 어쩐다니 말이 많았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청초한 미소를 지으며 설예라 교수가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이수빈도 가방을 내려놓고 마주 앉았다.

“그나저나 공부는 잘 되니?”

“특별히 문제는 없어요. 평론의 범위를 조금 더 넓히고 싶어서 요즘은 영화나 미술 쪽도 공부하고 있고요. 물론 아직 보여드릴만한 성과는 없지만.”

“응. 잘하고 있네. 아주.”

고개를 끄덕인 설예라 교수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책상에 올려놓은 편지를 수빈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너도 이제 슬슬 준비가 된 거 같아서. 한번 읽어 보렴.”

준비?

이수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편지 겉면을 살폈다. 그리곤 깜짝 놀랐다. 미국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세계적인 명문, 하버드대학에서 온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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