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 < 78장. The big picture (5) >
서지훈 교수의 구형 소나타가 경기도 양평의 한적한 별장을 찾았다.
송현우 교수는 2층 테라스에서 쉬고 있었다. 피부가 푸석푸석하고 핼쑥했지만 병원에 있을 때보다는 많이 호전된 모습이었다.
하나뿐인 딸의 결혼을 앞두고 그는 건강관리에 힘을 썼다. 하늘이 돕는 것인지 발작을 하는 횟수도 줄었다. 걸을 힘도 충분했다.
“선생님!”
차에서 내린 서지훈 교수가 2층 테라스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송현우 교수가 손을 들었다.
“잘 쉬고 계셨습니까?”
“나야 늘 잘 쉬고 있지. 보면 모르나. 바쁠 텐데 왜 여기까지 오고.”
“스승의 날 때도 찾아뵙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속죄도 할 겸 보고드릴 것도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올라오게.”
서지훈 교수가 별장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간병인이 일을 하고 있었다. 마실 것을 드려도 되겠냐는 말에 서지훈 교수는 괜찮다고 답했다.
곧 2층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지훈 교수는 선물 대신 서류 꾸러미를 들고 왔다. 일단 그는 의자를 끌어다 송현우 교수 옆에 앉았다.
“결혼 준비는 어때. 잘 되고 있나?”
“승현이도 저도 이런 쪽으로는 젬병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좀 있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큰 문제는 없습니다. 혹시 몰라 식 당일에 앰뷸런스를 대기시켜 놓을 생각입니다.”
“그러지 마. 갈 사람은 미련 없이 떠나는 게 보기에도 좋으니까.”
송현우 교수가 웃었다. 속세를 초월한 듯한 그런 미소였다. 그래서 서지훈 교수는 마음을 한결 편히 먹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연명을 돕기 위해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송현우 교수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서지훈도, 송승현도 그의 뜻을 존중했다.
“눈은 좀 괜찮으십니까?”
“유일하게 멀쩡한 곳이라고 할까.”
“그럼 이걸 좀 검토해 주십시오.”
서지훈 교수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꾸러미를 송현우 교수에게 공손히 건넸다.
“이건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알고 계신 일이긴 한데, 승현이 성격상 디테일하게 보고드리진 않았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재미있는 일이라······.”
송현우 교수는 끄응, 몸을 일으키며 서류를 훑기 시작했다. 첫 장은 송승현 실장이 작성한 출판계획서가 들어 있었다.
예정 날짜를 확인한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선집 작업을 서둘렀군?”
“다음 달 내로 출간을 하는 게 목표입니다.”
“무리야.”
송현우 교수는 적지 않게 놀랐다. 그건 딸에게서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그는 한참동안 서지훈 교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한 달 만에 이걸 다 만든단 말인가? 수백 편의 줄글이야. 편찬이라고는 해도 새롭게 써야 하는 내용이 많을 텐데······.”
“결과물은 본인께서 직접 확인하셔야지요. 그래야 직성이 풀리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때까지 건강히 잘 계셔야 합니다.”
“허허허.”
송현우 교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수제자인 만큼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완성본을 보지 않고선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
그가 다시 손을 움직여 서류를 넘겼다. 그러다 한 부분에서 손이 멈췄다. 이건 아무리 송현우 교수라고 해도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계획이었다.
“영어로 번역까지 한다고?”
“그렇습니다. 이번에 민우가 편찬팀에 합류를 했습니다. 자기의 주특기를 살려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IAHS 측과 연계하여 영문판 출간을 동시에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작년 IAHS에 참여했을 때 아틸라이 회장에게 이야기를 들은 모양입니다. 명인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게 선생님 덕분이라고. 그렇다면 해외에도 이 저서를 알리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을 냈습니다.”
“······민우 군의 능력이 생각 이상이었던 모양이군.”
“아무도 해내지 못한 것을 해낸 친구니까요.”
송현우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번역가로서는 아시아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했다. 이 이상의 보증은 필요 없었다. 실력만큼은 조금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서지훈 교수가 첨언했다.
“해외 출간 실무는 센트럴 북스에서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이것도 민우의 인맥 덕입니다. 그쪽 편집장하고 줄이 닿아 있더군요.”
“이거······ 정말 대단한 친구를 제자로 뒀구만.”
“하하하.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예전에 그런 말씀 자주 들으셨을 텐데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요.”
그 한마디가 과거를 회상하게 했다. 송현우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처럼 세계적인 업적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서지훈 교수도 국내에서는 대단했다. 그때마다 훌륭한 제자를 뒀다며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했었다.
“아,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어제 부로 혼인신고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 법적으로 저희는 부부입니다.”
“후회는 없나?”
“후회라뇨. 오히려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지요. 승현이와는······ 언젠가는 다시 시작해 보고 싶었으니까요. 미련도 많이 남았었고 말입니다.”
그 말에 송현우 교수가 웃었다. 기침이 몇 번 나왔지만 심하진 않았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자네 입에서 미련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어.”
“나이를 먹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감상적이 되더군요.”
“모쪼록 잘 챙겨주게.”
서지훈 교수는 대답 대신 송현우 교수가 덮고 있던 이불을 가슴까지 오도록 잘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마시던 음료를 채워 놓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제자들이 병문안을 핑계로 찾아왔지만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 써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등단에 도움을 달라, 교수 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늘어놓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권력의 이면임을 송현우 교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놈이라도 건사했으니 보람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할 때 차갑던 손이 따뜻해졌다. 서지훈 교수가 두 손으로 자신의 손을 감싼 것이다. 단순히 물리적인 온도가 아닌, 마음이 느껴졌다.
“또 오겠습니다. 몸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십시오. 그땐 더 좋은 소식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내 일에 너무 함몰되지 말고 자네 일에도 집중을 해. 자네에겐 안 좋은 버릇이 하나 있었지.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만 파고든다는 거.”
“그 버릇이 있었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송현우 교수는 굳이 부정을 하지 않았다. 그가 웃으며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서지훈 교수는 허리 굽혀 인사한 뒤 별장을 나섰다.
곧 그의 오래된 차가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노을이 저물고, 곧 고요한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 * *
강의를 마친 민우는 제자들과 함께 연구실로 돌아왔다. 요즘은 이렇게 제자들과 강의 후에 떠드는 걸 취미로 삼은 그였다.
처음에는 잡담을 주로 했는데, 요즘은 학술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자연스레 모임의 성질이 전공 스터디로 바뀐 것이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수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이론들도 자주 언급됐다. 물론 민우는 시험 범위에 그것을 포함시킬 생각은 없었다. 경쟁은 공정해야 하니까.
영어시험이나 자격증 시험을 위한 취업스터디가 범람하는 대학가에서 분명 보기 드문 일이었다.
“결국 모든 현대인의 욕망은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는 게 르네 지라르의 입장인 셈이지.”
민우가 설명을 마무리하자 학생들의 입에서 한숨이 쏟아졌다.
“어렵네요.”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허영심 얘기는 대체 왜 나온 거야?”
“붕어냐? 너 때문이잖아.”
학생들은 깔깔거리며 웃으면서도 어디가 어려운지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훌륭한 선생이 옆에 있으니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다들 어렴풋하게는 이해를 한 것 같은데 예시가 좀 더 필요하겠어. 자, 이쪽을 봐.”
민우는 이면지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종이 위에 점을 두 개 찍었다. 한쪽에는 ‘주체’ 다른 한 쪽에는 ‘대상’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점을 잇는 직선을 그었다.
“주체와 대상이라는 일직선상의 관계. 보이지? 여기에서 욕망이 발생하는 건 바로 이 순간이야.”
민우는 ‘주체’와 ‘대상’ 사이 오른쪽에 ‘중개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넣었다. 그리고 선을 두 개념에 각각 그었다.
그러자 삼각형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욕망의 삼각형이라고 설명한 민우는 ‘중개자’ 부분에 펜으로 동그라미를 치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중개자의 개입으로 인해 개인이 지니고 있는 욕망은 왜곡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어. 자연발생적으로 대상에서 욕망을 느끼는 게 아니라 중개자로부터 욕망을 느끼는 거지. 이건 굉장히 흥미로운 관점이야. 왜냐하면 문학뿐만 아니라 현대 시장경제 체제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거든.”
“시장경제요? 너무 나간 느낌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예가 있을까요?”
“일단 기술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아.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무엇이든 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매체가 대표적이고. 여기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게 바로 이거야.”
민우는 빈 종이 한 구석에 ‘광고’라고 적었다. 그리고 설명을 이어갔다.
“광고를 예로 들면 소비자가 ‘주체’가 되고, 광고모델이 ‘대상’이 되지. 물건은 ‘중개자’일 뿐이야. ‘중개자’를 통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물건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현대 미디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이지. 소비의 심리이기도 하고.”
“와,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네요.”
‘재미있다’라는 말이 가장 듣기 좋은 요즘이었다. 제자들이 그만큼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니까. 민우는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문학 이론은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일상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어. 그렇다면 왜 그럴까? 한번 잘 생각해 봐.”
“글쎄요. 이론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그건 너무 막연하지 않나? 이론이라고 만능은 아니잖아.”
민우는 한 발자국 물러서 제자들이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을 주었다. 아직 학부 1학년이라 그런지 신선한 대답들이 많이 나왔다. 엉뚱한 면이 있어도 민우는 그들의 상상력을 무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제자들끼리의 토론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았다. 한 꼭지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정리하듯 나섰다.
지금처럼.
“그건 바로 문학이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야. 그러니 공부를 열심히 하면 사회의 부조리나 구조적인 특성을 잘 캐치할 수 있어. 그걸 감각적인 언어로 잘 묶어낸 게 바로 평론이고. 예술이나 문화평론도 마찬가지의 맥락이야.”
“그렇군요!”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이 있다.
차민재는 이미 책장에서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꺼내 읽고 있었다. 행간을 탐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민우는 감탄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스스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히 다른 녀석들과는 달라. 행동력이 있어. 잘 키우면 나중에 크게 되겠는데?’
과연 10년 후의 미래는 어떨까. 그런 궁금증이 드는 민우였다. 자신은 서지훈 교수처럼, 그리고 민재는 자신처럼 되어 있는 건 아닐까?
따르르릉―
그때 내선이 울렸다. 민우는 책상으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박민우입니다.”
― 교수님. 안녕하세요. 비서실의 한주연입니다. 곧 회의가 시작되는 건 알고 계시죠? 회의 장소가 총장실에서 대회의실로 바뀌었으니 그쪽으로 와 주시면 되겠습니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우가 외투를 걸치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회의가 잡혀서.”
“오래 걸리세요?”
“아마도?”
“저희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면 안 돼요? 과실은 너무 시끄러워서요.”
그 말을 들은 민우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민재야.”
“네?”
책에 집중하던 민재가 돌아봤다. 연구실 열쇠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도 열쇠를 떨어지지 않게 잘 받았다.
“앞으로 열쇠 보관은 네가 해라. 하나 복사해 놓고 필요하면 스터디 장소로 써. 나 없을 때 한해서.”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교수님!”
“고마우면 열심히 공부하는 걸로 갚아.”
국제번역기구 관련 자료를 모두 챙긴 민우는 마지막으로 메일함을 열었다. 시상식 때 공개했던 그 메일 주소였다.
곧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벌써 500통이 넘게 와 있네. 스팸도 꽤 섞여 있겠지만 나쁘지 않은 시작이야.’
민우는 메일 창을 끄고 연구실을 나갔다. 대학본부로 가는 길에 레아에게 연락해 자신의 메일과 비밀번호를 알려주며 메일을 수신처와 용건별로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곧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니 미리 도착한 몇몇 교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부 모르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