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페서-205화 (205/500)

205화 : < 78장. The big picture (4) >

수빈이 물었다.

“누구 전화인데 그렇게 어렵게 받아요?”

“상아대 총장님.”

“와아, 이제 막 총장님 전화도 받고 그러네.”

“장관님께도 전화가 오는 마당인데 총장님 정도야 뭐.”

민우는 여유롭게 대꾸했다.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던 수빈이 한마디 했다.

“너무 멀리 가지 마요. 내가 못 쫓아가니까. 응?”

수빈의 표정에서 자그마한 걱정을 읽은 민우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앞으로도 이 손 놓지 않을 거야.”

“웬일로 듣기 좋은 말을 하네.”

“듣기만 좋은 말이야?”

“아니지.”

수빈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함께 걸었다.

확실히 지금의 민우는 수빈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녀와 교제를 시작했던 석사 1학기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지적 수준 또한 상당히 올라갔다.

객관적인 스펙이 좋아진 만큼 한눈을 팔 법도 했지만 민우는 그러지 않았다. 단 한 가지, 민우에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념.

처음부터 지금까지 민우를 지탱해 준 그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변하지 않는 이상, 수빈과의 관계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곧 변하겠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나저나 어떻게 프로포즈를 한다.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걱정이네.’

현직 문학평론가를 감동시킬 만한 멋진 멘트를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루카치의 만년필을 써야 하나 갈등할 정도로.

‘중요한 건 마음이지. 마음만 잘 전하면 돼. 껍데기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침 그녀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마주치자 수빈이 눈을 크게 뜨며 흠칫 놀랐다.

양 볼을 붉히더니 고개를 홱 돌려 시치미를 떼는 수빈. 누가 봐도 수상한 행동이다.

“뭔 생각 했어?”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 아직 멀었어요?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수빈은 은근히 말을 돌렸다.

민우는 왠지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이 하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 왔다. 여긴 거 같은데? 피아노 소리 들리는 거 보니까.”

민우는 벨을 눌렀다. 곧 들어오라는 주예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반팔 티와 파자마를 입은 주예린이 전자 키보드 앞에 앉아 연주에 몰두하고 있었다.

민우는 잠시 음률에 집중했다. 제목은 몰라도 귀에 익은 클래식이었다.

“제법이다?”

“그러게요. 이렇게 잘 칠 줄은 몰랐네.”

“후후후. 거기 앉아서 좀 더 감상하시죠.”

거만한 미소를 지은 주예린이 어깨에 힘을 주며 템포를 올렸다. 손놀림이 화려했다. 전자 키보드라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듣기 좋았다.

민우와 수빈은 축가 연습을 잠시 미루고 잠시나마 주예린의 멋진 연주를 감상했다.

* * *

근사한 세단이 청문대학교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잠시 자연과학대학 건물 앞에서 차가 멈추고, 정연주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다음으로 유진태 비서실장이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다.

“아가씨. 제가 문 열면 나오시라고 늘 말씀드렸는데 말입니다.”

“괜찮아. 나도 손 있는걸.”

“그래도 체면이 있지요. 대한그룹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늘 명심하셔야 합니다. 특히나 여기는 청문대가 아닙니까?”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다고.”

연주는 생긋 웃으며 넘어갔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유진태 비서실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자연과학대학으로 이어진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그런데 아가씨. 요즘 너무 부지런히 움직이시는 거 아닙니까? 쓰러지실까 걱정이군요.”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반은 진담이었다.

대학재단 사업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이후로 정연주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대학원 수업이 끝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기 바빴다.

“쓰러져도 괜찮아. 유 실장이 있으니까.”

“감동적인 말씀이긴 한데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요. 아가씨께서 건강하게 지내시는 것도 제 일 중 하나니까요.”

“알고 있어. 근데 요즘 은근히 잔소리가 는 것 같아.”

“제가요?”

“유 실장 아니면 여기에 누가 있어?”

귀엽게 되묻는 연주를 보며 유진태 실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러는 의미에서 저녁은 삼계탕 어떠십니까? 날도 더운데 미리미리 보양식을 챙겨 드셔야죠. 근처에 잘하는 집 있습니다.”

“그럴까.”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몸보다는 유진태 실장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요즘 스케줄이 늘어난 덕분에 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 왔다. 자신을 견제하는 친오빠보다 유진태 실장이 더 오빠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을 정도로.

지금은 다 커서 그러지 않지만, 어렸을 때는 어리광도 많이 부리곤 했었다.

하지만 말을 편하게 하는 것까지는 고치지 못했다. 그편이 더 좋다고 유진태 실장이 권한 것도 있고 말이다.

“금방 나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더운데 여기 있지 말고 차에 있고.”

“알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연주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덥고 힘들었지만 유진태 실장은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연주의 목적지는 유체역학센터.

제법 큰 센터였는데 이곳의 주임교수 양한선은 자신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오늘은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양한선 교수님 계신가요?”

“어디에서 오셨어요?”

“교수님 조카예요.”

미모의 손님이 들어오자 남자 연구원들이 다들 이쪽을 주목했다. 대한그룹이라는 배경을 차치하더라도 연구실 책임자의 조카라면 VIP다.

“이쪽으로 오세요. 연구실 안에 계십니다.”

“감사해요.”

연주가 연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흔히 볼 수 없는 거대한 칠판이 있었는데, 머리가 희끗한 사내가 앞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칠판에는 다양한 기호와 방정식이 늘어서 있었다. 전공자가 봐도 어지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복잡했다. 하지만 연주는 담담한 눈으로 칠판을 훑었다.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이네요. 아직도 연구하고 계신 거예요?”

“으응?”

상념에서 깨어난 양한선 교수가 뒤돌아섰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조카의 모습을 보곤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 연주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아니 이게 누구냐. 연주 네가 여기엔 웬일로?”

“오랜만에 인사도 드릴 겸 왔어요.”

“그래. 잘 왔다. 재단에서 일하게 됐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거 때문에 온 거지?”

“겸사겸사요.”

연주의 관심이 다시 칠판으로 향했다. 방정식의 유도 과정이 아름답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직감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연주가 칠판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커를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쪽에서 막히신 거 같네요.”

“잘 봤구나. 아무래도 특수한 연산자를 적용하려다보니 전체적으로 엉킨 듯한 느낌인데 감이 잘 안 잡힌다. 벌써 사흘째 답보상태인데······ 응?”

사악―

연주는 지우개로 한 부분의 유도식을 날려버린 다음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여러 수식을 수정하며 방정식을 유도했다.

곧 그녀가 마커 뚜껑을 닫고 싱긋 웃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 같아요. 어때요?”

“오오, 과연······!”

양한선 교수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막혔던 부분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방정식이 항상 3차원의 해를 가지는지에 대한 증명까지는 멀었지만, 한 발 내디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양한선 교수가 인자한 눈으로 연주를 바라보았다.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았구나. 불문학을 한다고 해서 걱정했었는데 현역으로 복귀해도 괜찮겠어. 명인대에서 박사 끝내면 우리 대학으로 오려무나.”

“말씀만 감사히 받을게요.”

“허허허. 녀석도 참. 그런데 러너웨이 교수에겐 요즘도 연락이 오니?”

“가끔요. 전에 한국에 오셔서 식사 한번 같이 했어요. 여전하시던걸요.”

러너웨이는 세계 최고의 공과대학인 칼텍(Caltech)의 교수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다. 그는 예전부터 연주의 능력에 감화되어 입학을 권유하고 있었다.

“여전하다니 다행이군. 다음에 학회에 나가면 우리 조카 그만 좀 괴롭히라고 한소리 해야겠어.”

“그러지 마셔요. 좋은 분인데.”

“허허허. 이거 외삼촌 편은 안 들고 남의 편만 드는구나.”

두 사람은 편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파는 없었고 의자와 테이블만 있었다. 양한선 교수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걸 꺼내왔다.

“잘 마실게요.”

“그래. 그런데 학교엔 무슨 일이냐? 겸사겸사 왔다면 학교 일일 터인데.”

“교수 한 분을 모셔오고 싶은데, 외삼촌이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교수를?”

연주는 아까부터 소중히 들고 있던 파일을 양한선 교수에게 건넸다. 인쇄물을 찬찬히 읽던 양한선 교수가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 친구 이번에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한 그 친구가 아니냐?”

그것은 다름 아닌 민우의 프로파일이었다. 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앞으로 큰일을 할 분이기도 하고요. 상아대에서 겸임교수로 재직 중인데, 전임교수 임용 전에 우리 대학에서 먼저 손을 썼으면 해요. 외삼촌은 교무처장이시니 안건으로 올려주실 수 있잖아요.”

“으음.”

양한선 교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가 안경을 벗으며 눈을 꾹꾹 눌렀다.

“다른 건 몰라도 박사학위가 없는 게 좀 걸리는구나. 특별규정이 있어서 임용은 가능하지만 우리 국문과 교수들이 받아들일지가 미지수야. 여러모로 무리수라는 느낌이 강해.”

“어떻게 안 될까요?”

“글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민우의 프로파일을 내려놓은 양한선 교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재단에서 네 직책은 뭐냐? 이사 선임은 안 된 것 같더만.”

“교수연구지원분과를 맡았어요. 이사직은 좀 어렵다고 들었어요.”

대학에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서는 재단 이사직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단에서는 별도의 직책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적당히 일을 펼치기에 무리가 없게끔.

“아무튼 비학위자 임용은 어려울 거야. 한번 힘은 써보겠다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있어라.”

“제가 수식을 고쳐드린 부분보다는 쉽지 않아요?”

“뭐? 하하하하!”

뜻밖의 지적에 양한선 교수가 큰소리로 웃었다. 밖에서 실험을 진행하던 연구원들이 안을 힐끗거릴 정도로 소리가 컸다.

“못 본 사이에 좀 변한 거 같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그냥,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겨서요.”

“무슨?”

연주는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저도 세상을 바꿔보고 싶어요.”

* * *

민우는 강의를 위해 상아대로 이동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이후 첫 방문이었다. 제자들과 후배들, 그리고 모교 교수들이 어떤 환영을 해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아참, 구 조교한테 줄 게 있었지?’

민우는 먼저 국문과 조교실에 들렀다. 마침 구서현 조교가 안에서 과자를 먹고 있었다. 칠칠맞지 못하게 입가에 부스러기가 가득했다.

“잘 있었어?”

“선물은요?”

“인간적으로 잘 다녀왔냐는 말 한 마디는 해줄 수 있지 않냐? 보자마자 선물 타령이야.”

“잘 다녀오셨어요?”

“하아, 엎드려 절 받기네.”

민우는 가방에서 홍차 티백이 든 상자를 꺼내 구서현 조교에게 주었다. 홍차를 좋아해서 하나 사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저도 준비한 게 있지요. 자요. 수상 축하드려요.”

구서현 조교가 포장된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뭔가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민우가 웬일이냐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돈은 없고 뭔가 꽃은 드리고 싶은데 장미가 너무 비싸서 딱 한 송이만 샀어요. 저 잘했죠?”

“지나치게 현실적이네. 너 석사논문은 리얼리즘 문학론으로 써라.”

“그럴까요? 호호호.”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다 민우는 연구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세상에······.”

커다란 카네이션 꽃바구니가 연구실 앞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자필로 쓴 포스트잇이 아크릴판에 한가득 붙어 있었다.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고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을 축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생각을 못했네. 영국에 가 있는 동안에 스승의 날이 껴 있었구나······.’

민우는 아크릴판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그리고 꽃바구니를 들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꽃바구니는 학생들이 앉는 테이블 가운데에 놓았다.

대강 정리를 마친 민우는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학생들이 남긴 메모를 읽었다. 끝까지 읽고 났는데도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 맛에 선생 노릇하는 건가?’

마음 가득 차오르는 온기를 느끼며 민우는 곧 있을 수업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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