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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서-204화 (204/500)

204화 : < 78장. The big picture (3) >

오후 7시 무렵, 민우와 레아를 태운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에 안착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비행기에서 내려 통로를 걸었다.

민우가 레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괜히 제 스케줄 맞추다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겠네.”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인걸요. 매니저님이야말로 힘드시겠어요. 여기저기서 계속 연락이 온 것 같던데요.”

시상식 이후 수십 건의 전화가 걸려왔다. 특히나 이슈가 됐던 건 김강현 장관이 직접 건 전화였다.

레아가 걱정스레 말했다.

“하루 정도는 푹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시차 문제도 있고. 날씨도 더운데 병 나면 큰일이잖아요. 선집 작업도 계속 하셔야 하는데.”

“그러고 싶은데······ 가능하려나 모르겠네요. 국내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들었어요.”

“심상치 않다니요?”

“예를 들면 저 게이트를 나가는 순간 기자들이 쫙 깔려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든지.”

“아.”

수빈에게 전해듣기로는 국내에 생중계된 시상식이 꽤 화제가 됐다고 한다. 입국 일정이 모두 공개가 된 상황이라 기자들이 몰려들면 피할 수도 없다.

레아가 잠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시상식장 VIP석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분은 누구셨나요? 사이가 꽤 좋아 보이시더라고요. 사인회 끝나고 그분 만나러 가신 거죠?”

“왠지 지금 이상하게 엮으려고 하시는 거 같은데?”

“고의는 없었어요.”

레아가 웃자 민우도 따라 웃었다. 처음엔 사무적으로만 대했는데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그녀도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민우가 내막을 설명했다.

“학교 후배에요. 불문학 전공하는 친구인데 이번에 맨 그룹에서 초청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맨 그룹에서 VIP로 초청을 받을 정도면 소셜 포지션이 대단하겠는데요?”

“뭐, 그렇죠.”

구체적인 설명은 피했다. 연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봐야 좋을 것은 없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게이트를 나섰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본 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대로네요. 오늘 편히 쉬긴 글른 것 같은데.”

“그러게요.”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민우를 발견하고는 바로 취재 태세를 갖추었다. 플래시가 하나 둘 터지기 시작하며 주의를 끌었다.

“연예인이라도 왔나?”

“아무도 안 보이는데?”

“저 사람 찍으려는 거 아냐? 저기. 저 사람. 이번에 무슨 맨부시 상? 그거 받은 사람 같은데.”

주변 사람들이 민우를 주목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무대가 완성되고 있었다.

“박민우 씨! 인터뷰 좀 부탁합니다!”

“부커 그룹 회장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모종의 제안이 있었습니까?”

“혹시 번역 기구 설립에 후원을 받으신 겁니까? 액수 규모는 어느 정도 되나요?”

여기저기에서 시끄러운 외침이 터졌다. 순식간에 공항이 시장통처럼 변했다. 하나하나 귀담아 듣던 민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고성이 오가는 건 좋은데······ 억측이 난무하기 시작하는군.’

민우는 캐리어를 손에 쥔 채 걸음을 멈췄다. 오랜 비행으로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참았다.

“레아 씨. 먼저 갈래요?”

“아뇨. 매니저님 일정 관리가 제 일인데요. 아무래도 정리를 하고 가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네요. 괜히 도망가는 인상은 줄 필요 없겠죠.”

레아가 민우의 짐을 받아들었다. 민우는 한 발자국 나서서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기자들이 녹음기를 내밀었다.

민우가 또박또박 말했다.

“부커 그룹 회장님과는 가볍게 인사말만 주고받았습니다. 앞으로도 세계 문학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번역 기구 투자금은 사실 무근입니다. 아직 그 어떠한 제안도 없었습니다.”

“김강현 문체부 장관께서도 전화를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냥 축하한다고 하셨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민우는 이 이상은 곤란함을 느꼈다. 레아의 사인을 받고 상황을 정리했다.

“잠깐만요. 잠깐. 죄송한데 오랜 여정으로 많이 피곤합니다. 영국에 가서도 충분히 쉬지 못했어요. 이 점 양해 부탁드리고요. 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분들은 내일 오후 다섯 시에 명인대 인문관 310호로 와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민우가 기자들을 헤치며 공항을 빠져나왔다. 앞서 나간 레아가 지음사에서 보낸 차와 함께 있었다. 기사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민우가 재빨리 차에 올랐다.

“일단 명인대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민우를 태운 차가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숨을 돌린 민우는 핸드폰의 1번을 길게 눌렀다.

“응. 엄마. 지금 막 귀국했어. 잠깐 학교에 들러서 선생님께 인사 좀 드리고 갈게요. 빚진 게 많잖아. 응. 저녁은 들어가서 먹을게. 먹고 싶은 거? 음······ 김치찌개?”

민우는 전화를 끊고 수빈에게도 귀국 보고를 했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다고 했는데 기자들이 몰려들 것을 대비해 일부러 나오지 말라고 말을 해 뒀다.

아니었다면 한진섭이 직접 차를 끌고 307호 멤버들을 모두 태우고 왔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처럼.

레아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바로 댁으로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내일 학교에 나가셔야 하는데. 굳이 일을 두 번 만들 필요는 없어 보여서요.”

“조금이라도 빨리 지도교수님한테 자랑하고 싶네요.”

민우는 그렇게 농을 건넸지만, 선집의 진척 상황이 궁금했다. 두 눈으로 확인을 하고 돌아가야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레아 씨. 집 여기서 근처죠? 먼저 들어가세요.”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기사님. 잠깐 차 좀 저쪽에 세워 주세요.”

민우는 명인대로 가는 도중에 레아를 내려주었다. 마침 지도 앱을 살펴보다가 그녀의 오피스텔 근방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레아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집에서 차 가지고 명인대로 가 있겠습니다. 제가 먼저 쉴 수는 없는 거니까요. 매니저님 짐도 있고.”

“아아뇨. 괜찮으니 내일까지 푹 쉬세요. 특별 휴가입니다.”

“이따 명인대에서 뵙겠습니다.”

레아는 단호했다. 이럴 때는 설득이 어렵다. 하지만 민우는 그녀와 함께 일하며 내성을 키워 왔다. 대처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레아 씨는 매니저 지시를 어기는 그런 사람은 아니죠? 그러니 제 말대로 해주세요. 자, 그럼 이만.”

싱긋 웃은 민우가 차 문을 닫았다. 곧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로부터 30분 뒤, 차가 명인대에 들어섰다.

“수고하셨습니다. 기사님.”

“대기하고 있을 테니 볼일 보고 나오십시오. 오늘 끝까지 모시라는 최 전무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여기가 끝입니다. 바로 돌아가시면 돼요. 걱정하지 마시고요.”

민우는 차에서 내려 인문관을 올랐다. 4층에 도착하니 역시나 서지훈 교수 연구실 문틈으로 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민우는 노크를 한 다음 열쇠로 문을 열었다.

“선생님! 다녀왔습니다!”

서지훈 교수가 깜짝 놀랐다. 송승현 실장인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야? 박민우. 공항에서 바로 이쪽으로 온 거냐? 오늘 저녁 귀국이라면서?”

“상 받은 거 자랑하려고요.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연구실엔 서지훈 교수 혼자였다. 오늘은 송승현 실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민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잘 보관해둔 트로피를 꺼냈다.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직사각형 트로피였다. 민우의 업적이 황금색 글귀로 음각되어 있었다.

트로피를 받아 든 서지훈 교수가 영악하게 웃었다.

“맨부커 상도 별거 아니군. 네가 받을 수 있을 정도라면 말이야.”

“서운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러는 선생님은 못 받으셨으면서.”

“하하하핫!”

민우에게 한 방 먹고는 유쾌하게 웃었다.

서른한 살에 <현대문학론>을 써서 학계의 기린아로 이름을 날린 그였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거머쥐지 못한 것이 바로 눈앞의 트로피였다.

그는 조심스레 트로피를 다시 민우에게 건네주었다.

“수고 많았다.”

“실은······ 선생님께 제일 먼저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바로 왔어요. 선생님이 아니셨다면 제가 이 상을 탈 수 없었을 테니까요.”

“너 혼자 다 해놓고 무슨 겸손이야? 너 그거 악취미야. 알아? 하하하!”

서지훈 교수는 직접 내린 커피를 한 잔 따라 민우에게 건넸다. 자신의 것도 한 잔 챙겼다. 그렇게 두 사람이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민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수상 소감은 인터넷 중계로 봤다. 재미있는 일을 벌이려고 하던데. 누구 아이디어야?”

“제 아이디어죠. 취미 삼아서 한번 해보려고요.”

“취미 치고 너무 크게 벌리는 거 아니냐? 발상은 좋다만 우려의 목소리도 많아. 상을 이용해 기금을 조성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고.”

예상했던 일이었고, 충분히 극복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기자회견장에서 질문이 나오기 전부터 민우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여유가 있었다.

“제가 만들려는 단체는 철저히 비영리로 운영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시상식 기자회견에서도 다 말했는데요. 뭘. 그거 가지고 왈가왈부하면 오히려 이상한 거죠.”

“유독 국내 기자들이 극성이니 문제지.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 모르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그래서 내일 오후에 기자회견 잡았어요. 캐묻고 싶은 사람들은 알아서 오겠죠.”

“제법인데? 이젠 제법 사람 다루는 것도 잘하네. 역시 그 미모의 비서 덕분인가?”

서지훈 교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사리사욕을 챙기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신뢰가 갔다.

“그런데 선집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민우가 묻자 서지훈 교수가 혀를 찼다.

“쯧, 역시 그거 때문에 온 모양이군. 원고 작업은 생각보다 순조롭다. 예정보다 일찍 끝날 수도 있겠어. 원고는 챕터가 완성되는 대로 너에게 넘기마. 그래야 번역하기 수월할 테니까.”

“그래주심 좋죠. 참, 결혼 준비는요?”

“업체에 맡겼으니 알아서 해 주겠지.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냐?”

사실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은 선집이 완성된 이후에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다는 송승현의 한마디에 일정을 당긴 것이다.

별일이 없다면 다음 주 토요일에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신혼여행도 미루신 거예요?”

“미루긴 뭘 미뤄. 신혼여행으론 역시 연구실만한 곳이 없지. 학자들의 요람이자 무덤인 곳이니.”

“그래도 나중에 제대로 다녀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수빈이 말로는 제대로 안 하면 평생 따라다닌다는데. 프로포즈도 신혼여행도요.”

“야. 내가 잡혀 살 위인처럼 보이냐?”

“엄청요.”

서지훈 교수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품에서 담배를 꺼내 조용히 불을 붙였다. 후우, 흰 연기가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 * *

다음 날, 310호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민우는 주예린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전자 키보드가 그녀의 집에 있다는 이유로 축가 연습 장소가 그곳으로 잡혔다.

명인대에서 이수빈과 합류한 민우는 주예린이 보내 준 주소를 지도 앱에 입력했다. 투덜거리면서.

“책 좀 잘 팔리니 아주 배가 불렀네. 어? 대선배가 가는데 말이야. 마중은 못나올망정 주소나 띡 보내고. 말세야, 말세.”

“선배가 교육을 잘못한 거지 뭐.”

“그런가?”

주예린의 <세계수>는 북미에서 대박이 났다. 센트럴 북스가 가진 영향력 탓도 있지만, 작품 자체가 재미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거기에서 민우의 이름이 또 한 번 힘을 더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자의 번역서라는 것이 알려지며 다시 화제가 된 것이다.

덕분에 유럽 진출의 기회가 주어졌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라온북스에 계약을 타진하고 있는 중. 이 기세라면 10여개국 이상 수출이 가능할 것 같다는 게 이유리 편집자의 설명이었다.

“안 되겠어. 나중에 제대로 한 번 뜯어먹어야지.”

“월말에 인세 나오니 한우 먹으러 가자고 하더라구. 그때 잔뜩 먹으면 되겠네.”

“하루 종일 굶고 갈 테다!”

“마음 좀 곱게 먹어요. 그래야 좋은 일도 생기지. 오빠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큰 상 받았잖아.”

“후후후. 그렇긴 하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애 같아? 편의점이나 잠시 들러요. 빈손으로 가기 좀 그러네.”

민우와 수빈은 편의점에 들러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몇 개 집었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올 무렵 핸드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민우는 무심결에 전화를 받았다.

“네, 박민우입니다.”

― 소식이 뜸하군요. 귀국한 다음 연락을 한번 할 줄 알았는데.

“아,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상아대의 최산호 총장이었다. 민우는 걸음을 천천히 하며 통화에 집중했다. 곁에 있던 수빈이 귀를 쫑긋하며 관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다음 주에 내려가는 대로 찾아뵈려고 했었습니다.”

― 그랬군요. 내가 괜히 채근한 건 아닌지.

“괜찮습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요.”

― 아니, 괜찮습니다. 에, 이거 할 얘기가 밀린 느낌이군요. 기자회견 건도 있고. 특히 국제번역기구······ 그 건으로 같이 이야기 좀 해야겠는데.

“알겠습니다. 준비하지요.”

몇 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전화가 끊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입질이 빨리 왔는데? 첫 단추가 잘 꿰어진 건가.’

민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손에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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