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 < 78장. The big picture (2) >
“저는 여기 오면 안 되나요?”
연주가 웃으며 되물었다. 평소의 그녀와는 다른 당찬 모습이었다. 세련된 드레스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내가 아는 정연주 맞나?”
“왜요? 어디 이상해요?”
연주는 옷매무새를 살피며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어딘가 부족한지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다. 이대로라면 거울을 꺼낼 기세다.
그 전에 민우가 말렸다.
“그런 의미로 물은 거 아니잖아. 뭔가 평소랑 분위기가 좀 다른 거 같아서 그래. 못 본 사이에 좀 변한 거 같기도 하고.”
꽤 오랜만이었다.
민우가 상아대에서 강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보지 못했으니까, 거의 석 달 만에 만난 것이었다. 5천 마일이 넘는 타국에서 말이다.
“그게. 저······ 큰 결심을 하고 왔거든요.”
“큰 결심?”
끄덕끄덕.
연주가 부끄럽게 웃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호기심이 들었다. 민우가 이어 말했다.
“그렇다면 당장 들어봐야겠는데? 하지만 장소가 적당치 않네. 숙소는 어디야?”
“세인트 판크라스 르네상스에 있어요.”
“판크라스 르네상스? 혹시 판크라스 역 쪽에 있는 건가?”
“맞아요. 거기.”
기억이 났다. 오늘 오후에 그쪽 주변을 둘러볼 때 분명 있었다. 민우는 연주의 뒤에 끝없이 이어진 줄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따 시간 괜찮으면 커피나 한잔 하자. 끝나고 톡으로 연락할게. 아 참, 유 실장님도 같이 왔어?”
“아뇨. 혼자 왔어요.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연주가 자리를 비키자 그제야 멈춰 있던 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영국 사람들이었고, 간혹 한국인도 보였다.
민우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만났다. 궁금한 것을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악수를 청하거나 사진을 찍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민우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해주었다. 그러다보니 준비된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으아. 팔 떨어지겠다. 사인이 이렇게 힘든 건지는 몰랐네.’
손가락이 시큰거렸고, 팔목이 저릿했다. 민우는 왼팔로 오른팔을 주무르며 한숨을 돌렸다.
직원이 마이크를 들었다.
「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이제 사인회를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쉽지만 작가님과 번역가님께 작별인사를 부탁드립니다. 」
「 조금만 더 해주세요! 」
「 내 앞에서 끊는 게 어디 있나! 사인 받으려고 에딘버러에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
신사의 나라라는 건 편견이었다. 어딜 가나 극성인 사람들은 있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며 김영화 작가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박 선생. 기왕 팔 아픈 거 조금 더 하는 건 어떨까요?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대로 가기가 너무 미안해서.”
“좋은 생각이십니다.”
김영화 작가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민우가 진행자를 불렀다.
「 김영화 작가님과 이야기를 해 봤는데 이대로 마무리하는 건 좀 미안하네요. 30분 정도 더 할게요. 줄 미리 끊어 주시고 기다리는 분 없게 해주실 수 있나요? 」
「 오, 그래주시면 저희야 감사드리죠.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이봐 칼튼! 차단봉 들고 와! 」
직원 두 명이 재빨리 적당한 줄에 라인을 구획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30분 뒤 모든 행사가 끝났다.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시상식 이후의 여운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민우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이거 나이 먹고 할 짓이 못되는군요. 허허허. 박 선생은 바로 숙소로 갑니까?”
“아뇨. 아는 사람 좀 만나고 숙소에 갈 생각입니다.”
“호오? 영국에 지인이 있는 모양이군요. 아니면 술이나 한잔 같이 하자고 하려고 했더니.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룹시다.”
“선생님은 영국에 좀 오래 체류하실 거지요? 전 내일 바로 비행기로 귀국을 해야 해서요.”
“한국에서 만나는 걸로 해야겠군요.”
민우는 김영화 작가와 대강 약속을 정하고 먼저 식장을 빠져나왔다.
시상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민우에게 따라붙었다. 덕분에 행사장을 나서며 민우는 영국 시민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느냐부터 시작해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좀 정신이 없었지만 침착히 대답해 주었다.
곧 모든 사람들이 흩어지고 민우 홀로 남았다.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어.’
민우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밝았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 기분이었다. 오늘 느꼈던 감정을 마음속에 새기며 걸음을 옮겼다.
‘참, 연주한테 연락해야지?’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톡을 보냈다. 잠시 후 답장과 함께 약도가 하나 날아왔다.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 조슈아 씨! 」
「 조쉬라고 부르라니까요. 」
「 아, 미안해요. 그런데 아직 안 가고 있었어요? 인터뷰는 한참 전에 끝났는데. 」
그는 사람 좋게 웃었다. 여전히 어깨엔 대포 같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 안 그래도 지금 회사로 돌아가려고요. 인터뷰 기사는 송고하긴 했는데 마무리해야 할 게 있어서. 그나저나 우리 프로페서께서는 어딜 가십니까? 펍에서 한잔 하시나요? 아니면 클럽? 」
「 아뇨. 우연히 지인을 만나서요. 잠깐 찻집에 들렀다 숙소로 갈 겁니다. 」
「 휘우! 건전하게 노시는군요. 그런데 보스하곤 얘기 잘 됐습니까? 」
보스라는 표현이 생소했다. 하지만 그 단어가 페데리코 산치스 교수를 뜻하는 말이라는 건 민우도 잘 알고 있었다.
「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연락 드리기로 했어요. 덕분에 런던대 구경도 잘했고요. 이 근처에 있는 줄 알았으면 저 혼자라도 갔을 겁니다. 」
「 제가 남 좋은 일을 좀 잘하는 편이죠. 」
그렇게 말을 던진 조슈아가 카메라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뷰모드를 작동시켜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 그래서 기왕 하는 김에 일을 하나 더 해보려고 하는데. 으음······ 오케이. 찾았다. 이 사진 좀 봐주십쇼. 」
「 뭔데요? 」
민우가 카메라 액정을 살폈다. 수상 소감을 말할 때의 사진이었다. 이메일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조슈아가 덧붙였다.
「 방송을 안 보는 사람도 많고 하니까, 이 사진을 신문에 좀 실어볼까 하는데요. 민우 씨의 빅 픽쳐가 마음에 들어서 말입니다. 1면에 내보내긴 어렵겠지만 도움이 될 거예요. 」
「 감사합니다. 」
조슈아가 페이지를 하나 더 넘겼다. 살짝 다른 각도에서 찍힌 같은 사진이었다.
「 이건 민우 씨 메일 주소로 보내드릴 테니 개인적으로 쓰십쇼. 」
「 그래도 되나요? 」
「 작은 선물 정도로 생각하세요. 뭔가 제게 답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시면 보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면 됩니다. 실은 저도 소아즈 출신이라서. 자, 그럼 서로 갈 길 갑시다. 밤이 늦었네요. 」
싱긋 웃은 조슈아가 손을 들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갑자기 손가락을 튕기더니 한마디 했다.
「 비 조심하시고요. 」
「 네? 」
무슨 말인가 생각하는 그 순간.
쏴아아아―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민우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치고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조쉬 씨 덕분에 번역 기구 설립에 탄력을 받을 수 있겠다. 영국 쪽에서 많이 연락이 오겠어.’
앞으로의 계획을 차분히 정리하며 길을 걸었다.
핸드폰 앱을 이용하니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곧 앤티크한 인테리어로 장식된 소규모 카페가 나타났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딸랑―
민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연주가 손을 들어보였다.
“언제부터 여기서 죽치고 있었던 거야?”
“행사 끝나자마자 바로 왔어요. 마침 읽을 책도 있고 해서요. 근데 비 와요?”
“소나기. 지금은 그쳤어.”
민우는 젖은 우산을 잘 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연주는 태블릿의 전원을 끄고 가방에 넣으며 다소곳이 앉았다.
“뭐 시키셔야죠? 여기 애플티가 괜찮아요. 한번 드셔 보세요.”
“그럴까?”
민우는 카운터로 가 주문을 하고 다시 돌아왔다. 직원이 직접 서빙을 해주는 곳이었다. 민우는 앉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많이 힘드시죠.”
“어. 뻥 안치고 죽을 거 같아. 김영화 선생님이 조금 더 하자고 하셔서 무리했거든.”
“그래도 기분은 좋죠?”
“당근.”
잠시 후 새콤한 풍미가 가득한 애플티가 나왔다. 그런데 자그마한 조각 케이크가 함께 나왔다.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 이건 안 시켰는데요? 」
점원에게 물으니 그녀의 입에서 ‘맨부커 프라이즈’라는 단어가 나왔다.
「 저도 <태엽시계> 읽었거든요. 완전 팬이에요. 신문에서 봤는데 박민우 씨 맞으시죠? 수상 축하드려요. 작지만 서비스입니다!
「 아, 감사합니다. 」
생각보다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점원이 돌아가자 민우는 애플티를 한 모금 마셨다. 과연 맛이 좋았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큰 결심이라니. 무슨 소리야?”
“정말 궁금하셨나보네요.”
연주가 입을 가리며 소박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변한 게 맞다. 이 상황에서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너라면 안 궁금하겠어? 못 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보기 좋게 변한 걸 보니 안 좋은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질문을 받은 연주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찻잔을 흔들었다.
“그냥. 제가 그동안 너무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어요. 부족한 것 없이 자라왔잖아요. 그에 비해 오빠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아, 오해하지 마세요. 오빠를 흉보는 건 아니니까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민우도 잘 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해내셨잖아요. 상 받아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고······ 그에 비해 전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찝찝한 느낌도 들었고.”
“너도 마냥 놀고 있었던 건 아니잖아. 집안 반대 이겨내면서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 너무 자기의 노력을 비하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오빠에 비하면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소리야? 너도 너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거잖아. 그럼 됐어.”
이제야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된 것 같다. 민우는 못 본 사이에 자신뿐만 아니라 연주도 훌쩍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떤 큰일을 하고 싶은데?”
“사업 하나 해보려고요.”
연주가 예쁘게 웃었다. 그래서일까. 사업이라는 단어가 사전적인 의미로 들리지 않았다.
“교육 사업이요. 우리 그룹에 대학재단이 하나 있는데 그쪽에서 일을 해볼까 해요. 바로는 아니고 박사 마치고 나서 본격적으로요.”
“대학재단에서?”
전혀 뜻밖의 계획이었다. 민우가 잠시 뭐라고 물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대한그룹 밑에 있는 대학이라면 청문대학교······.’
서울에 위치한 사립대학이다. 모기업이 워낙 좋은 기업이라 평판도 좋다. 하지만 명인대나 한일대에 비하면 조금 뒤처지는 게 사실이다.
민우가 물었다.
“공부는 더 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공부는 일하면서 틈틈이 할 거예요. 그리고 제가 하려는 일이 공부랑 아예 연관이 없는 일은 아니잖아요. 즐거울 거 같아요.”
“자신은 있고?”
연주는 잠시 뜸을 들였다. 두 손을 모으고 무릎에 올린 채 생각에 잠긴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전에······ 2년 전쯤이었나요. 오빠랑 인문관 지하 카페에서 이야기한 적 있잖아요. 제가 대학원에 온 거 후회하지 않냐고 물었던 그때요.”
“으음.”
기억이 났다. 아마 지음사에 처음 가던 날에 잠깐 이야기를 나눴던 그때였을 것이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서두를 같이 읊었던.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없을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했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한번 그렇게 생각해 보려고요. 그럼 잘되겠죠.”
“까딱해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 탓이 될 분위긴데?”
두 사람이 가벼이 웃었다. 그 와중에도 연주는 자신의 계획의 일부를 드러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오빠가 많이 도와주세요. 나중에 우리 대학에 강의도 나와 주시고.”
“안 그래도 오라는 데 많아서 머리 아프다. 그래도 네 부탁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
“고마워요.”
그렇게 런던의 밤이 깊어져갔다.
다음 날, 민우는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