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The big pictur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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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The big picture (1)
2022.05.16.
사회자의 진행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막힘없이 매끄럽게 시상이 진행되었다. 부커 그룹과 맨 그룹의 고위 임원들이 각각 민우와 김영화 작가에게 트로피를 전달했다.
「미스터 박. 당신은 우리 영국의 출판문화는 물론, 세계 문학에 이바지한 공로가 큽니다. 축하합니다.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지요!」
나이는 많았지만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다. 억양에 힘이 잔뜩 실렸다.
부커 그룹의 회장이 직접 민우에게 전한 축사였다. 민우는 웃으며 두 손으로 트로피를 받았다. 이어 꽃다발도 그의 품에 안겼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세계 문학을 위해 힘써 보겠습니다.」
「세계 문학이라. 좋은 느낌의 표현이군요. 이따 준비된 만찬에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흥미가 있어요.」
「얼마든지 좋습니다.」
부커 그룹 차원에서의 제안이 또 있을까? 민우는 시상식이 열리기 전 소아즈(SOAS)의 산치스 학부장에게 받았던 제안을 떠올려 보았다.
‘날 필요로 하는 곳이 늘고 있어. 바람직한 현상일까?’
흔히 바쁜 건 좋은 거라고들 한다. 일이 많다는 건 자신을 원하는 곳이 많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민우는 이러한 현상을 경계했다.
지금 벌여놓은 일도 굉장히 많다. 유명세를 이용해 더 일을 늘려 부와 명예를 쌓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민우가 그리는 미래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미래로 향하는 올바른 길은 욕심을 내려놓을 때 보이는 법이지. 지금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그러다 보면…… 길은 저절로 보일 거야.’
민우는 한층 성숙해진 눈으로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더욱 침잠하며 특유의 지성을 발했다. 그렇게 동양에서 온 청년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행사를 계속 진행했다.
「이제 수상자분들의 소감을 듣겠습니다. 먼저 김영화 작가님부터.」
김영화 작가가 소감을 시작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두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수상 소감 시간이 길게 주어졌다.
김영화 작가는 한국어로 천천히, 또박또박 소감을 전했다.
한참 후 민우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이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박민우 씨를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영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이해가 풍부했습니다. 함께 작업하는 내내 즐거웠지요.”
누구나 인정하는 이야기였지만 왠지 들으니 부끄러웠다. 민우가 멋쩍게 웃었다.
‘오히려 내가 해야 하는 말인데. 작가님이 대신해 주시네.’
흔히들 작가들이 무척 까다롭다고들 이야기하는데, 김영화 작가는 달랐다. 나이와 다르게 젊은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한마디로 열려 있었다. 그래서 작업하기가 좀 더 수월했다.
곧 김영화 작가의 차례가 끝나고 민우가 나섰다. 스포트라이트가 일제히 민우를 비췄다. 모든 사람의 시선도 민우에게 향했다.
정면엔 카메라가 있었다. 특별히 이번 시상식은 한국에도 생중계가 된다.
그래도 민우는 태연했다. 이제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런 큰 무대에서 받는 위압감이 크면 더 컸다.
「이거 막막하네요. 앞에서 작가님이 좋은 말씀을 다 해 주시는 바람에 제가 할 말이 별로 없어졌습니다. 하하하.」
민우는 능숙한 영어로 너스레를 떨며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다시 마이크를 가까이했다.
민우는 정면에 있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말했다.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가족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그리고 수상이 결정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해 준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도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하니 괜히 코가 시큰거렸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살아생전에 이 장면을 보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산 자의 시간은 계속 흐르는 법.
민우가 코를 한 번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소감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분들께는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따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서지훈 교수와 수빈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말들이 많았으니까.
민우는 다시 언어를 영어로 바꾸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예전에 누군가가 했던 말을 살짝 비틀어 소감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 상은 한 개인의 상에 불과하지만, 한국 문학에 있어서는 커다란 약진이라고. 그래서일까요? 수상의 기쁨보다도 많은 과제가 남았음을 느낍니다. 어깨가 무겁기도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어떤 일부터 해야 할지 막막한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청중석이 고요해졌다. 셔터가 터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울 뿐이었다.
「그건 비단 제 개인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아마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이 하나둘 생겼겠지요.」
그렇게 운을 뗀 민우가 힘주어 말했다.
「인터넷이 등장한 이후 세계는 유례없이 하나로 뭉쳐지고 있습니다.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서 간단히 통번역을 할 수 있는 어플까지 등장했지요. 하지만 예술의 영역까지는 아직 미치지 못했습니다. 아마 몇십 년이 지나도 문학 번역에 있어서는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히 풀지 못하는 과제로 남을 수도 있지요. 왜냐하면 문학 번역이란, 인간의 감수성과 정신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민우는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고 청중석을 훑어보았다. 턱을 괸 사람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 다양했다.
민우는 준비한 말을 계속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립된 예술을 공유하는 일처럼 멋진 일이 또 있을까요? 지금은 미약하지만, 저는 한국 문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문학을 각국에 알리는 것에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겁니다. 이 상을 계기로 한 템포 더 부지런히 움직이겠습니다. 제 뜻에 동참하는 분들은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바스락―
민우는 품에서 꺼낸 손바닥만 한 종이를 펼쳤다. 거기엔 자신의 새로운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종이를 펼치면서도 궁금증이 떠나질 않았다.
‘과연 몇 명한테나 연락이 올까?’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스팸으로 가득 찰 수도 있다. 혹은 하루 종일 확인해도 끝이 안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실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상 소감에서 이메일을 알리면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
민우가 종이를 접어 다시 품에 넣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이었다. 여러 귀빈이 앉아 있는 VIP석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좋은 상을 주신 맨 그룹과……」
깜짝 놀란 민우는 말을 멈췄다. VIP석 구석에 아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곧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다시 인사를 마무리했다.
「……부커 그룹에 감사 말씀 드립니다. 이상입니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렇게 시상식이 끝나고 주최 측에서 마련한 특별 공연이 시작되었다.
* * *
사인회를 앞두고 민우는 김영화 작가와 기자회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무 곳이 넘는 언론사에서 취재를 나와 회견장이 가득 찼다.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바로 민우를 소아즈로 인도한 조슈아 벨라미였다. 그는 좋은 좌석을 차지하고 노트북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조슈아는 손을 들었다. 민우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고마웠다. 덕분에 페데리코 산치스라는 세계적인 학자와 인연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가운데 좌석에 민우와 김영화 작가가 나란히 앉았다. 기자들이 많이 몰렸고, 수상자가 외국인이라 주최사에서 사회자를 따로 배정했다.
「지금부터 수상 기념 기자회견을 진행하겠습니다. 작품 및 수상과 관계되지 않은 질문은 삼가주십시오. 자, 그럼 손을 들어 주십시오.」
우연일까. 사회자가 조슈아를 지목했다. 조슈아가 무선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가디언의 조슈아입니다. 먼저 수상을 축하드리고…… 박민우 씨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음, 이건 아마 다른 동료들만이 아니라 영국인들도 마찬가지의 의문을 품고 있을 텐데요. 한국 태생임에도 영국 영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데 비결이 뭡니까?」
예상 범위 내에 있던 질문이었다. 민우는 즉시 답했다.
「모든 언어에는 고유의 감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란 한 나라의 문화이자 정신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영국의 감성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고, 어휘를 선택할 때도 그것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습니다. 아마 다른 언어의 번역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책이 읽히기 위해서는 감동이 필요하니까. 독자를, 문화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오, 좋은 답변이네요.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젊은 여성이 손을 들었다. 사회자가 그녀를 지목했다. 그녀는 자신을 크리스티나라고 소개했다. 이번에도 민우가 질문을 받았다.
「수상 소감을 듣고 난 후에 미리 준비한 질문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메일 주소를 공개한 목적이 무엇이지요?」
「같은 뜻을 가진 분들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뭐 모금을 하거나 상업적인 의도로 공개한 건 아닙니다. 그저 국제적인 번역 협력기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있어서요.」
「뭔가 본격적인데요. 구체적으로 계획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직 구체적인 건 없습니다. 그건 마음 맞는 분들과 함께 만들어나갈 예정입니다.」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계획은 이미 세워 놨다.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할 것인지에 대해서. 그런 준비도 하지 않고 이메일을 공개할 민우가 아니었다.
답변이 끝나자마자 민우가 첨언했다.
「너무 질문이 제 쪽으로 몰리는 것 같은데 김영화 작가님께도 질문을 해 주세요. 사실 오늘의 주인공은 <태엽시계>가 아닙니까. 작품에 대한 질문도 많을 것 같은데 말이죠.」
미처 사회자도 챙기지 못한 센스를 발휘했다. 그래서인지 질문이 김영화 작가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작품을 창작하게 된 배경과 의미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한참 뒤에 민우에게 질문이 떨어졌다. 이번엔 한국 기자였다.
「박민우 씨는 상아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이번 상을 계기로 다른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흠, 사실을 말씀드리면 교수직을 제안한 곳은 아직 없습니다.」
민우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실제로 교수직을 제안한 곳은 없었다. 소르본에서 제안한 것은 박사 후 과정 입학과 강사직이었다. 소아즈는 아예 구체적인 제안을 하지 않았었다.
민우는 일전에 최산호 총장이 건네준 매뉴얼의 한 부분을 떠올렸다.
「몇몇 유명한 대학에서 포닥 및 강사직 제안을 하긴 했습니다만…… 전 모교에서 제자를 육성하는 데 당분간 힘을 쓸 계획입니다.」
「그 말씀은 즉 상아대에서 계속 강의를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지방대라는 편견은 버려 주세요. 훌륭한 학생들이 많은 곳입니다. 이번에 북미 지역에서 히트를 친 <세계수> 작가도 상아대 출신이죠. 제 손으로 가능성 있는 인재들을 세상에 내보낼 겁니다. 제가 상아대에 있는 한.」
민우는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매뉴얼엔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상아대에서 가늠하는 자신의 가치를 높여줄 것이다. 아주 크게.
「답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기자회견이 마무리되었다. 민우와 김영화 작가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사인회장으로 이동했다. 시차도 시차였지만 슬슬 지쳤다.
하지만.
‘우와!’
민우는 감탄을 흘렸다. 사인회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민우는 오른팔을 주물럭거리며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어머어마한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박 선생. 사인은 어떻게 하지요?”
“일단 한 페이지에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으음, 선생님께서 위쪽에 하시고 제가 아래쪽에 하는 건 어떻습니까?”
민우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김영화 작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이거 팔이 꽤 아프겠는걸.”
“하하하. 쉬엄쉬엄하시죠.”
첫 손님이 다가왔다. 먼저 김영화 작가에게 사인을 받은 다음 민우에게 책을 내밀었다.
“축하해요.”
“아까 진짜 놀랐어. 너 VIP석에 있는 거 보고. 되게 상투적인 표현이긴 한데 여기에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네. 너 은근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있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능숙하게 사인을 했다. 그리고 책을 덮은 다음 돌려주었다. 책의 주인은 두 손으로 책을 받고 생긋 웃었다.
민우가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