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 스포트라이트 (3) (201/500)


201. 스포트라이트 (3)
2022.05.13.


민우가 섣불리 대응하지 못하자 조슈아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이런. 스마트한 분일 줄 알았는데 평범하시네.」

정감이 가는 미소라 그런지 비꼬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제야 민우는 자신이 너무 멍하니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민우가 멋쩍게 웃으며 말문을 텄다.

「얼떨떨한 게 당연하죠. 런던 한복판에서 절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조슈아 씨라고 했나요? 절 어떻게 알아보셨나요?」

「기자니까요. 민우 씨 사진을 여러 장 봤죠. 구별이 쉽지는 않았는데 정면에서 보니 확신이 서더라고요.」

조슈아가 엄지로 카페를 가리켰다. 민우가 커피를 들고나올 때 정면에서 얼굴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한편 기자라는 말에 민우는 다시금 그가 메고 있는 카메라에 시선이 갔다. 확실히 일반인이 쓰기에는 렌즈의 크기가 컸다.

바디도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우연이네요. 아무튼 반가워요. 조슈아 씨.」

「우연은 만드는 겁니다.」

「네?」

흰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조슈아는 영국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특종은 아무나 무는 게 아니죠. 민우 씨 숙소가 풀먼 호텔이라는 건 어떻게 듣긴 했는데 동선 파악은 안 되더라고요. 터미널에서 놓쳤어요. 혹시 블랙캡 탔나요?」

「맞아요.」

「이런. 아무튼 그래서 호텔 앞에서 줄창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마침 민우 씨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왔고. 아, 오해는 마십쇼. 게이는 아니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유쾌했다.

조슈아는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자신에게 말을 걸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알고 보니 호텔에서 나올 때부터 따라다녔다고 했다.

「뭐 그렇게 된 겁니다. 일단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조슈아 벨라미입니다. 어라? 명함을 어디다 뒀더라.」

조슈아가 안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명함을 꺼냈다. 신문사 이름을 읽은 민우는 살짝 놀랐다. 그 이름은 한국에서도 유명했으니까.

‘설마 했는데 가디언지 기자였다니…….’

행색은 동네 지방지 기자였는데 알고 보니 영국 유력 일간지 기자였다.

하지만 민우의 태도엔 변화가 없었다.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피곤했다. 인터뷰와 기자회견은 시상식 이후에 잡혀 있었다. 벌써부터 기자들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하지만 미안하단 말을 해야겠네요. 지금은 인터뷰에 응하고 싶지 않아요. 이따 시상식 이후에 기자회견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때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을까요?」

「오, 물론이죠. 당신의 여행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민우 씨가 핫도그라도 하나 사드셔야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핫.」

「뭔가 살짝 핀트가 어긋난 것 같지만 말이 잘 통해서 좋네요.」

「하지만 가이드가 필요하실 거 같은데요?」

조슈아는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바쁘게 넘겨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조사하기로 민우 씨가 해외에 나선 것은 작년 미국 IAHS가 처음. 즉 이곳 런던엔 처음이라는 거죠. 괜찮으시면 제가 좀 안내를 해 드려도 될까요? 가이드 비는 공짜지만 팁은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 그게.」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슈아의 눈빛과 미소에 밀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당하겠네요. 좋습니다. 시상식까지는 앞으로 세 시간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잘 부탁드리죠. 조슈아 씨.」

「조쉬! 조쉬입니다! 자. 가시죠.」

그가 앞장을 섰다. 민우는 재빨리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조슈아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영국국립도서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곧 푸른 녹원이 펼쳐졌다. 콘크리트 건물 숲 한가운데 공원이 있었다. 에우스턴 스퀘어 가든스를 걸으며 두 사람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쿠르릉―

그때 하늘에서 묵직한 천둥소리가 들렸다. 민우가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또 비가 오려나 모르겠네요. 숙소에 우산 두고 왔는데.」

「저 우산 있으니 걱정은 붙들어 매시길. 그나저나 한국은 어떻습니까?」

「여기처럼 날씨가 변덕스럽진 않죠.」

「아니, 날씨 말고요. 수상 이후 반응. 톱스타가 되셨을 거 같은데?」

과연 노련한 기자였다.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금세 화제를 인터뷰 쪽으로 바꾸었다. 민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 사이 조슈아가 덧붙였다.

「제가 본 한국은 그렇습니다. 으음,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한 감상을 말하면요. 상을 탄 작품보다는 상 자체에 무게를 두는 면이 있지요. 10월만 되면 유독 노벨문학상에 관련한 기사들이 줄곧 쏟아지더군요.」

외국인답지 않은 날카로운 분석력이었다. 민우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면이 없잖아 있어요. 성과주의라고 할까요. 한국엔 그런 문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문학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크진 않아서 잠깐 반짝이다가 가라앉겠죠.」

「아쉽겠네요.」

「아뇨. 조금도 아쉽지 않습니다. 목표를 이뤘는데요.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죠. 아쉬울 겨를도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할 때쯤 빗방울이 하나둘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슈아가 잽싸게 백팩을 앞으로 둘러매고 우산을 꺼냈다.

「그림은 별로 안 좋겠지만 일단 같이 쓰시죠.」

곧 공원의 끝자락이 보였다. 길을 나서 다시 도심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도로를 건너 맞은편으로 이동했다. 민우는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목적지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처럼 움직이네. 도통 주변을 둘러볼 시간이 없잖아? 어디에 들르는 것도 아니고.’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다.

명함 하나만 철석같이 믿고 그를 따라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만약 조슈아가 자신을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면 어땠을까.

‘다행히 사람도 많고 한데…… 온통 비슷한 건물뿐이라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민우의 초조한 기색을 읽었는지 조슈아가 씨익 웃었다. 그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생각보다 비가 많이 오네요. 어떻습니까. 잠시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어디로요?」

「사실 민우 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 ‘보스’가 계셔서 말이죠.」

민우가 걸음을 멈췄다. 조슈아가 능숙하게 멈춰 서 민우의 머리에 우산을 대 주었다. 아직 비는 그칠 기색이 없었다.

「보, 보스요?」

「이런, 뭔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내가 마피아가 된 기분이네. 오해는 마십쇼. 총기 같은 건 없습니다. 하하하.」

「누가 절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겁니까?」

「가 보면 압니다. 때마침 비도 내리고 하니까 어서 가시죠. 금방 그칠 것 같진 않네요. 이런 날씨엔 안으로 들어가야죠.」

조슈아가 채근했다. 마치 그는 처음부터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문득 출발하기 전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조슈아가 횡단보도를 건너더니 의미심장하게 한 발 내디뎠다.

「‘유니버시티 오브 런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프로페서.」

University of London.

그 한마디에 민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 * *

조슈아는 런던대 안에 위치한 동양아프리카연구소(SOAS,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멈춰 섰다. 민우에겐 말로만 듣던 전설 같은 곳이었다.

천장이 길게 늘어져 있어 비는 더 이상 들치지 않았다. 조슈아가 우산을 접고 털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 씨. 무슨 문제라도?」

「아뇨. 여기가 진짜 소아즈인가 해서요. 와, 진짜 말로만 듣던 곳이라 정말 신기하네요. 생각지도 못했어요. 여기에 있다는 걸.」

「하하핫!」

마치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을 보듯이 한바탕 웃은 조슈아는 민우를 기다려 주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민우의 시선이 SOAS 로고에 다시 고정되었다.

그 상태로 민우가 물었다.

「여기에 한국인 강사들이 꽤 있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아까 말씀하신 보스라는 그분도 한국인인가요?」

「굳이 여기까지 와서 같은 나라 사람 만나면 재미없잖습니까. 시간을 좀 더 소중히 쓰시라는 의미에서 다른 분을 소개해 드리죠.」

「누군지 기대되는데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민우가 입구로 들어섰다. 조슈아는 많이 와본 사람처럼 안내판도 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토했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이곳까지 데려오는 게 자연스럽지는 않았을 거라는 영양가 없는 농담이었다.

3층에 도착하자 조슈아가 계단을 벗어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곧 ‘예술·인문학부’ 간판이 보였고, 누군가의 연구실이 나타났다.

Dr. Federico Sanctis

‘페데리코 산치스?’

눈에 익은 이름은 아니었다.

그런데 명패 위에 수식어가 하나 달려 있었다. 영어에 능통한 민우가 그 단어 하나를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Dean이라면…… 학장?’

생각보다 높은 사람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조슈아가 노크하더니 문을 열어 버렸다. 안은 살짝 어두컴컴했다.

백발의 노인이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오, 조쉬. 왔는가?」

「모셔오느라 고생깨나 했습니다. 나중에 크게 청구할 겁니다.」

「허허, 운이 좋았구만.」

산치스 교수는 이태리 출신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멋지게 늙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이 좋았다. 패션 감각도 괜찮았다.

민우가 가까이 다가가 인사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박민우입니다.」

「처음이지만 처음은 아니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실례지만 전에 뵌 적이 있었던가요?」

민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산치스 교수를 본 기억은 없었다.

「아무래도 힌트가 필요하겠군. 작년 봄에 자네가 예일대의 스톤 교수를 멋지게 박살 낸 모습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할까?」

「스톤 교수님이라면…… 아!」

그제야 감을 잡았다. 예일대의 스톤 교수를 만난 건 작년 소르본의 밤 행사 때였다. 산치스 교수도 그때 참가한 모양이었다.

한편 조슈아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교수님의 작년 봄 스케줄이라면 IAHS인데. 거기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정확히는 소르본의 밤이었지. 젊은 데다 당돌해 보여서 인상에 남았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큰일을 해냈구만. 축하하네.」

그제야 민우는 산치스 교수와 악수했다. 왠지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조슈아가 나섰다.

「분위기 좋은데요?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시길. 민우 씨는 이따 기자회견장에서 뵙지요. 아, 민우 씨. 오는 길에 한 얘기는 기사로 써도 됩니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좋은 만남을 주선해 줬는데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윙크를 남긴 조슈아가 문을 닫고 자리를 떠났다.

「커피 한잔할 텐가?」

「좋습니다.」

곧 산치스 교수가 커피를 준비해 주었다. 잔을 내려다본 민우는 아차 싶었다. 즐겨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에스프레소였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조금씩 입에 흘려 넣었다.

「어떤가? 소아즈에 온 감상은.」

「설레네요. 멋지기도 하고요. 언젠간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아예 건너오지 그래?」

「하하하. 제안은 감사하지만 아직 박사과정이 안 끝나서요.」

「과연 랑느 박사의 말대로군. 설득이 쉽지 않겠어.」

민우는 이미 소르본대에서도 다시 제안을 받은 상황이었다. 랑느 박사는 흔히들 말하는 ‘포닥’, 박사 후 과정에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

「소르본 쪽에도 확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려고요. 아직 한국에서 해야 할 일도 많고 해서요.」

「이를테면?」

「외국 경험도 도움이 되겠지만…… 역시 한국에서 제자들을 좀 키워보고 싶어요. 외국에 나오는 건 나중에 교환교수 기회도 있을 테니 그때 해도 괜찮으니까요.」

「나름 계획을 세워 놨군. 박사 논문은 언제쯤 들어가나?」

「내후년 정도에 발표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갈 길이 멀군그래.」

민우는 멋쩍게 웃으며 잔을 비웠다. 마셔보니 에스프레소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탈리아 사람이 내준 커피라 그런 걸까.

한편, 잠시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긴 산치스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본론을 꺼냈다.

「소아즈도 자네의 옵션 중 하나로 넣어줄 수 있겠나? 박사를 딴 이후에 말이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고맙군.」

「그러는 의미에서 한 잔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민우가 작은 잔을 내밀었다.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그였다.

* * *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시상식은 영국국립도서관 콘퍼런스 센터에서 열렸다. 출판문화가 발달한 나라답게 많은 사람이 운집했다.

시상식 이후에 사인 행사가 준비되어 있어서인지 방문객들의 손에 <태엽시계>가 한 부씩 들려 있었다.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강당에 수많은 기자들과 관계자들이 모였다.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인 김영화 작가도 있었다. 민우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준비한 대로만 하자. 침착하게.’

그렇게 되뇐 민우가 눈을 떴다. 수상자의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드디어 이름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스포트라이트가 움직였다. 그중 하나를 받으며, 민우는 무대에 사뿐히 올랐다.

왕의 대관식이 시작되었다.

16557840713112.jpg

1655784071311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