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스포트라이트 (2)
(2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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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스포트라이트 (2)
2022.05.12.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온 민우는 오전에 연구실 정리를 도와준 후배들을 불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쩨쩨하게 학식을 산다는 불평이 일부 있었으나, 다음 학기에 국문과 전공 강의를 할지도 모른다는 민우의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불평이 사라지고 아부가 쏟아졌다.
점심 식사 후에는 대학국어를 듣는 학생들이 찾아와 수업 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돌아갔다.
공부 이야기만 줄곧 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고 가는 학생들도 있었고, 취업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고학번 후배들도 있었다.
공부에 대한 것은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지만, 취업 문제는 좀 달랐다. 민우가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출판 쪽으로 방향을 잡은 후배들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괜찮은 친구들은 특별히 라온북스나 지음사에 추천을 해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손님들을 한바탕 치르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민우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휴우, 교수 일도 쉬운 게 아니구만.’
연구실이 없었던 시간강사 때와는 많이 달랐다. 이제는 전용 연구실이 생겼다. 흔히들 말하는 오피스 아워(office hour)가 생겼고, 찾아올 사람들이 생겼다. 늘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민우가 씨익 웃었다.
‘그래도 즐겁다. 언젠가 이렇게 되기를 꿈꿔왔었으니까.’
따르르릉―
그때 내선이 울렸다. 민우는 재빨리 책상으로 돌아와 전화를 받았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세요. 교수님. 비서실의 한주연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비서실이라면 총장실에서 온 전화였다. 민우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 다름이 아니라 최산호 총장님께서 잠시 올라오라고 하시는데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총장님께서요?”
안 그래도 언제 총장실에 가야 하나 타이밍을 잡고 있었는데 먼저 전화가 와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건수를 만들지 않아도 되니까.
민우는 웃으며 컵을 내려놓았다.
“언제든 괜찮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 예. 그럼 곧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민우는 거울 앞에서 옷을 갖춰 입고 연구실을 나섰다. 때마침 국문과 행정조교 구서현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선생님! 어디 가세요?”
“총장실에. 왜, 무슨 일 있어?”
“아까 말씀하신 테이블이랑 의자요. 시설과에 문의해 보니까 남는 거 있다길래 바로 갖다 놓으려고요. 학생회장한테 말해 놨으니까 곧 가져올 거예요.”
“고맙다.”
자대 출신 교수의 장점이었다. 후배들이 많으니 일을 부탁하기가 편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맨입으로 일 시키는 건 좀 그래서 다음에 교수님이 술 한잔 산다고 이야기해놨어요. 잘했죠?”
“이야, 우리 구 조교 일 잘하네 아주…… 선배 뜯어 먹는 데 선수였구나.”
“후훗. 제가 좀!”
앞으로 이런 일이 한두 번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돈이 아깝진 않았다.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 시상식 다녀와서 자리 한번 만들자. 부를 사람 있으면 다 불러. 너도 끼고”
“진짜 다 불러요? 이야. 요즘 교수님 수입이 장난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보네요. 책도 잘 나가고 TV에도 나오고. 으음, 나 그냥 교수님한테 시집갈까?”
“대기표 뽑아 놔라. 줄이 좀 길 거다.”
민우의 농담에 구서현은 깔깔거리며 조교실로 돌아갔다. 인문대 건물을 나선 민우는 걸음을 좀 더 빨리 옮겼다.
* * *
총장실에서는 이미 회합이 열리고 있었다. 중년의 사내가 최산호 총장 곁에 서서 보고를 하고 있었다. 그는 홍보과장 명재희였다.
“이번 박민우 교수의 수상으로 인해 우리 대학의 홍보 효과는 수억 원대에 달할 것으로 보입니다. 공식적으로 명인대가 아니라 상아대 겸임교수로 보도가 나갔으니 말입니다.”
“흐음, 그래도 생각보다 적은데?”
“박민우 교수가 전임이었다면 더 효과가 컸을 겁니다. 아무래도 겸임, 1년 계약직이다 보니 이직의 여지가 있으니까요.”
“그야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래도 박민우 교수가 명인대보다 우리 대학에 재직 중이라는 걸 강조해 줘서 일 처리가 쉬웠습니다. 우리 대학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최산호 총장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 생각 이상의 성과였다. 민우가 수상한 덕분에 국제번역전공 신설에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에서도 제안이 오고 있었다. 이번 전공 신설은 물론 향후 번역 관련 사업에 지원하겠다고 나선 상황이었다.
“이번 시상식 인터뷰가 화두겠군.”
“그렇습니다. 그래서 홍보과 차원에서 대응 매뉴얼을 만들었습니다.”
명재희 과장이 두툼한 서류를 건넸다. 최산호 총장이 안경을 벗고는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나쁘지 않군. 고생했네.”
“그나저나 박민우 교수가 협조적으로 나서야 할 텐데요.”
“걱정할 거 없네. 애교심이 있는 친구니까 말이야. 무엇보다도 우리 대학을 위해 이것저것 많이 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고.”
최산호 총장은 얼마 전 민우와 면담을 했던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민우를 내보내고 그의 이력서를 보던 그때를.
‘벌써부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있는 겁니까? 박 선생.’
실로 흥미로운 전개였다.
처음에는 젊은 학자의 혈기라고 치부했었다. 하지만 민우는 하나하나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굵직한 사건으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최산호 총장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이대로라면 박 선생을 전임으로 승진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겠어.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재단 이사회다. 중장기적으로 상아대 인문대는 통폐합될 운명이었다. 그 상황에서 전임교수를 늘리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민우가 달성한 업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여지를 남겼다. 대학이나 재단 입장에서도 그를 임용해서 나쁠 게 전혀 없어진 것이다.
‘박 선생이 박사학위만 딴다면 슬슬 이야기가 나오겠군.’
보고를 들으며 최산호 총장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상아대만이 아닐 것이다. 다른 대학들도 민우와 접촉할 것이다.
국내 대학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국내 대학에서만 민우에게 관심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최근 소르본대에서 민우와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전에 박 선생을 우리 쪽으로 완전히 끌어들여야겠어. 그러려면 뭔가 카드를 제시해야 할 텐데…….’
재단 쪽에 계약 갱신에 대한 요청을 올렸지만 아직 이사회에서는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사실 교수 한 명 임용하는 권한 정도는 자신에게도 있었지만 재단이 내세운 중장기 발전 정책에 반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사회의 재가가 필요했다.
상아대에서도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이공계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신규 교수 임용도 주로 공대 쪽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최근 3년간 인문대에서 새로운 교수가 임용된 사례는 없었다.
띠리리리―
그때 내선이 울렸다. 명재희 과장이 잠시 보고를 멈추었고, 최산호 총장이 버튼을 눌렀다.
― 총장님. 박민우 교수님 왔습니다.
“모셔요.”
곧 문이 열리고 민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최산호 총장이 명재희 과장의 어깨를 다독였다.
“수고했네. 이만 가 봐.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총장님. 추가로 필요한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명재희 과장은 꾸벅 인사하며 총장실을 나섰다. 나가는 길에 민우와도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이제 총장실엔 민우와 최산호 총장 둘만 남았다.
“안녕하십니까. 총장님.”
“그래요. 그쪽에 앉지요.”
최산호 총장은 명재희 과장이 남기고 간 매뉴얼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민우는 허리를 쭉 펴고 정중히 자세를 잡았다.
“에…… 방금 나간 사람이 우리 학교 홍보과장입니다. 박 선생의 수상 덕분에 우리 학교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고 하는군요. 개인적으로 무척 기쁩니다. 좀 늦은 느낌이지만 수상 축하합니다.”
총장의 말과 표정을 통해 생각보다 상아대에서 이번 일을 크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우는 해맑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모교에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시상식은 목요일이었던가요?”
“맞습니다. 내일모레 출국할 예정입니다. 시상식 마치고 바로 귀국할 계획이라 휴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건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좋은 일로 자리를 비우는 건데요. 그나저나 이것 좀.”
최산호 총장이 매뉴얼을 민우에게 건넸다. 민우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아까 인사 나눈 홍보과장이 작성한 인터뷰 대응 매뉴얼입니다. 기자 회견할 때 참고할 부분이 있다면 쓰도록 하세요.”
“돌아가는 대로 꼼꼼히 확인하겠습니다.”
“우리 대학에 대해 잘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게 우리 대학은 물론 박 선생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인데 허무하게 날릴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민우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시상식이 끝나면 자신의 신변에 많은 변화가 생길 것 같은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이틀 후, 민우는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영국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
입국 수속은 금방 끝났다. 몇몇 보도자료 덕분에 담당 직원이 민우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의 위엄을 다시금 실감했다.
레아의 입국 수속은 조금 길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두 사람이 약속 지점에서 합류했다.
민우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가면 되죠?”
“경비는 지음사에서 모두 나오니까 굳이 아낄 필요는 없겠죠. 택시를 타고 40분 정도 이동하면 숙소에 도착할 거예요.”
“그럼 그렇게 하죠.”
두 사람은 터미널에서 나와 클래식한 느낌의 검은 택시에 올랐다. 레아가 설명하길, 영국의 명물 택시인 블랙캡(Black cab)이라고 했다.
레아가 목적지를 설명하자 중년의 택시 기사가 미소를 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민우가 한숨을 돌리며 차창 너머를 살폈다.
“비가 오려나 보네요. 흐릿하네.”
“영국은 소나기가 많이 내려요. 그래서 어디 가려면 우산이 필수죠.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니까요.”
“그렇군요.”
민우는 공항에서 집어온 휴대용 여행 가이드를 펼쳤다. 런던 곳곳의 명소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일정만 넉넉하면 프리미어리그 경기라도 볼 텐데. 때마침 이번 주에 북런던 더비도 있고. 아깝네.’
하지만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상을 타고 바로 돌아가 선집 작업을 도와야 했다. 아쉽지만 프리미어리그 경기 관람은 다음으로 미뤘다.
숙소는 시상식이 열리는 영국국립도서관 바로 옆에 있는 풀먼 호텔이었다. 민우와 레아는 체크인한 후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 소나기가 내렸다. 창밖에서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감미롭게 들렸다.
비는 금방 그쳤다.
흐릿한 하늘 저편에서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때마침 민우도 눈을 떴다. 두 시간 정도 자고 나니 피로가 좀 가셨다.
‘안에만 있기도 뭐하니 잠깐 나갔다 올까?’
민우는 레아에게 잠시 외출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호텔을 나섰다. 시간이 될 때 조금이라도 구경을 하고 싶었다.
민우는 도로에 서서 주변 전망을 한눈에 담았다.
‘옛날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잘 어우러져 있구나. 뉴욕처럼 높은 빌딩은 별로 없네.’
민우는 핸드폰의 지도 앱도 켜지 않고 그저 발 가는 대로 움직였다.
영국국립도서관을 지나쳐 오설스톤 스트리트에 늘어선 건물을 눈으로 훑었다. 뉴욕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한적한 마을을 보는 것 같은 아담함이 있었다.
‘이렇게 헤매듯 걷는 것도 나쁘진 않네. 이번엔 저쪽으로 가볼까?’
소머스 타운을 지나 미들랜드 로드 너머로 심상치 않은 건물이 나타났다. 하늘 높이 솟은 푸른 첨탑과 고급스러운 붉은 벽돌이 웅장해 보였다.
민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알림판을 찾았다.
‘오, 여기가 세인트 판크라스 역이구나. 멋있네!’
민우는 잠시 멈춰서 풍경을 감상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그 뒤편으로 영국국립도서관 건물이 보였다. 작게 한 바퀴 돌았다는 것을 깨달은 민우는 반대편으로 가보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마침 맞은편에 한국에서도 유명한 커피 체인이 있었다. 민우는 안으로 들어가 아이스커피를 하나 사서 밖으로 나오는 여유를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pardon me.”
사진기를 어깨에 건 금발의 남자가 민우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민우는 주변 풍경을 감상하느라 뒤돌아보지 않았다.
금발의 남자는 뒤에서 민우를 살짝 건드렸다. 그제야 민우가 돌아섰다.
「무슨 일이시죠?」
「혹시 한국에서 온 박민우 씨인가요?」
「네. 맞습니다만.」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조슈아예요. 편하게 조쉬라고 불러 주시죠.」
금발의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민우는 멍한 표정으로 그의 악수를 받았다. 대체 누구지? 그런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