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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스포트라이트 (1) (199/500)


199. 스포트라이트 (1)
2022.05.09.


“기억나요. 근데 대강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그래?”

“그때는 워낙 놀라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까요.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선배에게 할 부탁은 딱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두 사람이 포옹을 풀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했다. 송승현 실장의 볼이 살짝 붉어져 있다. 그 상태로 그녀가 말했다.

“결혼…… 이야기였죠?”

“맞아. 너를 잘 부탁한다고 하셨지.”

“끝까지 못난 딸 걱정만 하시네요. 난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는데.”

송승현 실장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순간 동그란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서지훈 교수는 소매로 눈물을 훔쳐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빨리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못했던 건 나름 이유가 있었어. 아버님의 목숨을 이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고민을 좀 했었지.”

“이해해요.”

“네 생각은 어때? 네가 유학을 가기 전의 감정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서지훈 교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문학박사 학위 따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건 송승현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입을 앙다문 채 말을 하지 못했다.

한참 후,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선배에 대한 감정은 그대로예요. 입학할 때부터 지금까지. 가끔은 툴툴거리고 못나게 굴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고맙군.”

“나만 얘기하고 끝이에요? 불공평하잖아요. 선배는…….”

“변했다면 이런 이야기를 너에게 꺼냈을까?”

확신에 찬 한마디였다. 송승현 실장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잖아요. 우리. 나이도 많이 먹었고 또 해온 일도 다르고.”

“아버님의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우리의 감정에 충실하자.”

“그래도 될까요?”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늘 든든했다. 마음이 절로 풀릴 정도로. 그래서일까. 짓궂은 질문이 나왔다.

“나, 신붓감으로 괜찮겠어요? 나 벌써 서른일곱인데. 나이 먹을 대로 먹었다고요. 피부도 예전 같지 않고. 눈가엔 벌써 주름살도 있고요.”

“괜찮아. 내 눈에는 신입생이었던 스무 살 시절 그대로니까.”

송승현 실장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선수네요.”

두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그것을 신호로 진한 키스가 시작됐다. 송승현 실장은 그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서로를 탐닉하며 충만함을 느꼈다.

그렇게 10년 이상 이어져 왔던 애매했던 관계는 모두 정리되었다.

두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 *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다.

민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전에 내려갈 준비를 했다. 오늘부로 상아대 시간강사가 아니라 겸임교수로 출근하게 되었다.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고 정장 재킷을 걸쳤다. 민우가 밖으로 나오자 때마침 설거지를 마치고 어머니가 거실로 따라 나왔다.

양손에 짐이 좀 많았다. 무거운 짐은 이미 택배로 보내 놓았지만 뒤늦게 챙긴 장식품이나 집기 같은 것은 직접 들고 가야 했다.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짐이 많구나. 괜찮겠니? 엄마가 터미널까지 들어다 줄까?”

“괜찮아. 뭐 이 정도 가지고.”

민우는 씩씩하게 짐을 들어 보였다.

작년부터 꾸준히 해온 운동의 성과였다. 만약 한여름에 쓰러지지 않아 건강에 대한 자각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체력을 소홀히 생각하는 후배들이 많았다. 민우는 후배들에게 나중에 보따리장수 노릇을 하려면 체력이 중요하다고 늘 강조했다.

지방에 오가는 건 물론, 계속 서서 강의를 하는 것은 상당한 고역이다.

“오늘 일찍 들어오니?”

“좀 늦을 거 같아. 상아대 국문과 선생님들하고 회식 있거든. 기다리지 말고 저녁 드세요.”

“너무 많이 마시진 말고. 응? 버스 타고 올라오려면 힘들잖아.”

“알아서 할게. 아들 술 마시는 거 하루 이틀인가? 그럼 다녀올게요.”

민우는 현관문을 열고 빌라를 나섰다.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본 흰 세단이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곧 운전석의 차창이 내려갔다.

민우는 깜짝 놀랐다.

“레아 씨. 아침부터 웬일이에요? 오늘은 휴무라고 알고 있는데.”

“매니저님 연구실 나오는 날인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 타세요. 상아대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안 타시면 제가 휴무를 쓴 이유가 없어져요. 짐은 뒤에 실으시고요. 어서요.”

그래서 휴가를 쓴 거였구나.

민우는 미안하면서도 내심 고마웠다. 처음 봤을 때의 그 어색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레아와의 친분은 더욱 두터워지고 있었다.

“그럼 좀 실례할게요.”

민우는 짐을 트렁크에 싣고 보조석에 올랐다. 레아는 내비게이션을 상아대로 맞추고 액셀을 밟았다.

“출국 준비는 문제없으시죠?”

“예. 뭐 금방 다녀오는 거니까요. 작년에 미국 갔다 온 게 좋은 경험이 됐네요. 남의 손 안 빌려도 될 거 같습니다.”

“수상 소감 준비는 잘하셨고요?”

“대충은요.”

말은 대충이라고 했지만 민우는 심혈을 기울였다. 국내 유력 일간지 인터뷰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전 세계 언론에 자신의 소감이 인용될 가능성이 높다.

아마 평소보다 취재 열기가 뜨거울 것이다. 비영어권 국가에서 번역부문 수상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민우는 예상 질문을 뽑아서 철저히 연습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서지훈 교수에게서 온 전화였다.

“예, 선생님.”

― 내려가고 있냐?

“지금 막 집에서 나왔어요.”

― 그렇군. 뭐 좀 하나 부탁하려고 전화했는데.

“부탁이요?”

서지훈 교수의 입에서 부탁이란 말은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늘 자기가 알아서 하곤 했으니 말이다.

― 네 주민번호랑 주소 좀 톡으로 보내 봐.

“이야, 연구비 신청해 주시게요? 감사합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릴게요.”

― 나보다 잘 버는 녀석이 무슨 연구비 타령이야? 증인이 필요해서 그래. 혼인신고서 작성 중이거든.

“어…… 제가 증인이 될 짬이 될까요?”

― 그냥 형식적인 거야.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다 사인받아도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지훈 교수는 민우의 이름을 꼭 넣고 싶었다. 자신과 송승현 실장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준 일등 공신이 바로 민우였으니까.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보내드릴게요.”

― 근데 반응이 좀 싱겁다? 누구랑 결혼하는지 안 묻네?

민우는 씨익 웃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송 실장님께도 축하한다고 전해 주세요. 식은 조금 서두르시겠네요? 송현우 선생님 건강 생각하면요.”

― 최대한 빨리할 거야. 걸으실 수 있을 때 해야지. 다음 달 정도로 보고 있다.

“옙. 제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고요.”

전화를 끊은 민우는 바로 톡으로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보냈다. 고맙다는 답장이 왔다.

‘뭔가 급진전한 느낌이긴 하지만 두 분 잘 어울리시니까. 잘된 일이야.’

민우는 어떤 선물을 할까 고민하며 이 소식을 수빈에게 전했다.

축의금과는 별도로 뭔가를 해 드리고 싶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족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의 결혼식이었으니까.

애기♡: 축가 어때요?^~^

― 오 그거 좋네. 둘이 듀엣으로 해볼까?

애기♡: 것두 좋은데 예린이도 같이 하는 게 좋지 않아요? 은사님 결혼식이니까.

― 걔 노래는 별로;; 노래방 기피자야

애기♡: 마음이 중요한 거잖아요. 일단 소환해 봐.

<박민우 님이 주님 님을 초대하셨습니다.>

― 주님아

주님: ㅇ?

― 곧 서지훈 선생님 결혼하시는데 축가 같이 ㄱㄱ?

주님: ?????

바로 주예린에게 전화가 왔다. 웬 결혼이냐고. 민우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선물로 축가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 아항.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근데 선배. 나 노래 못하는 거 알잖아요. 왜 확인 사살하고 그래요?

“입만 뻥끗해도 돼. 정성이 중요한 거다.

― 입만 뻥끗하는 게 무슨 정성이에요. 흐응, 그냥 제가 반주하면 안 돼요? 나 피아노 좀 치는데.

“너 피아노도 칠 줄 알아?”

― 엣헴. 예술가라면 적어도 악기 하나는 다를 줄 알아야죠. 그게 바로 선배와 저의 차이랄까요. 후후후.

“아, 그렇구나. 수준 차이가 나니까 안 되겠네. <세계수> 2부 번역은 다른 분께 맡기세요. 수고.”

― 서, 선배애애!!!

전화를 툭 끊었다. 이어 걸려오는 전화를 몇 번 무시하니 장문의 반성문이 톡으로 날아왔다. 민우는 이번 한 번만 봐주기로 했다.

민우는 바로 서지훈 교수에게 연락해 축가를 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허락을 받았다. 세 사람은 다음 주부터 연습을 하기로 했다.

상황이 좀 정리되자 레아가 물었다.

“누가 결혼하시나 봐요?”

“제 지도교수님이요. 올해 마흔이신데 늦장가 가시는 거죠.”

“매니저님도 슬슬 결혼 준비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서른이면 적은 나이는 아닌데.”

“한국에서는 적은 나이 맞아요. 빨리 가는 사람도 있긴 한데 그건 일부고, 대부분은 서른 넘어서들 많이 하더라고요. 제 친구 중에서도 결혼한 사람 아직 없어요.”

“그렇군요.”

그렇게 세 시간쯤 달려 차가 상아대 주차장에 도착했다. 짐이 많아서 레아는 인문대 건물과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웠다.

“고생하셨어요. 시간 남으면 같이 식사라도 할 텐데 좀 아슬아슬하네. 다음에 한턱 근사하게 낼게요. 그럼 운전 조심하시고요.”

“짐은 제가 같이 들어드릴게요. 교수님이 되셨는데 캠퍼스 내에서는 품위 있게 행동하셔야죠.”

“하하, 그런가요?”

레아는 인문대 건물까지 짐을 들어 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덕분에 민우는 편하게 연구실 앞까지 올 수 있었다.

민우는 연구실 문 좌측에 걸려 있는 명패를 바라보았다.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 박민우

이제야 좀 실감이 났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명패였지만 차오르는 감동은 그 이상이었다.

민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연구실 안에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행정조교 구서현과 화석급 고학번 후배들이었다.

“선배 축하해요. 휘우! 출세하셨네요! 이렇게 근사한 연구실도 받으시고.”

“출세는 무슨. 그런데 다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뭐 하긴요. 축하 파티하러 왔지.”

구서현이 뒤에 숨겨 놓았던 케이크를 꺼냈다. 긴 촛대 하나가 가운데 꽂혀 있었다. 옆에 있던 한호석이 불을 붙였다.

구서현이 케이크를 민우 쪽으로 내밀었다.

“전임교수까지 힘내시라고 준비했어요. 내년까지 잘 버티시면 제가 특별히 촛대 두 개 꽂아드릴게요.”

“눈물 나게 고맙네. 잠깐, 야. 한호석. 폭죽은 쏘지 마! 청소하기 귀찮으니까.”

“하하하!”

다들 기분 좋게 웃었다. 케이크를 들고 있던 구서현이 채근했다.

“자자, 어서 불 끄시라구요.”

“알았어. 후우.”

촛불이 꺼지자 모두 박수하며 좋아했다.

뒤에서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레아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외국에서 오래도록 생활했던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신선하게 보였다.

‘역시 매니저님은 어딜 가든 존경받는 사람이었군요.’

새삼스레 민우라는 사람이 더욱 대단해 보였던 그녀였다.

* * *

연구실 정리를 대강 마치고 민우는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미리 보낸 책들은 후배들이 도와줘서 금방 정리를 끝냈다.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과 화분을 보니 이제야 진짜 연구실 같은 티가 났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넓고 좋다.’

겸임교수라 공동으로 연구실을 사용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전용 연구실이었고, 면적도 꽤 넓어 책상을 더 들여도 될 것 같았다.

지금은 작은 소파 세 개에 원형 테이블 하나만 놓였는데 이걸로는 부족했다.

‘학생들하고 세미나 같은 걸 하려면 긴 책상이 하나 필요할 거 같네. 이따 서현이한테 비품이 있나 물어봐야겠다.’

똑똑―

노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민우가 들어오라고 말했다. 조성진 교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후배들이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갔으니까.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 왔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조성진 교수가 아니라 국문과 신입생 차민재였다. 조금 의외였지만 민우는 반갑게 그를 맞았다.

“뭔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인데? 앉아라.”

민재의 손엔 작은 화분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는 원형 테이블 위에 화분을 놓았다.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잘 어울렸다.

음료수를 꺼내 온 민우가 한마디 던졌다.

“뭘 그런 걸 다 사 오고 그래?”

“연구실 생기셨는데 뭐라도 사 오는 게 제자로서의 도리잖아요.”

“공부 열심히 하는 거 이상의 도리는 없지. 앞으로 자주 얼굴 비춰라.”

“그러는 의미에서 저 책 좀 봐도 돼요?”

“얼마든지.”

한참 동안 책장을 서성이던 차민재가 책을 하나 꺼냈다. 얇고 오래된 책이었다.

“교수님. 저 이거 빌려 가서 봐도 될까요?”

차민재가 꺼낸 책은 공교롭게도 죄르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었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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