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시대를 초월한 마음 (5)
(198/500)
198. 시대를 초월한 마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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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시대를 초월한 마음 (5)
2022.05.06.
송승현 실장의 능력은 민우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뛰어났다. 현직 대학원생이라고 할 만큼 학문적 센스가 대단했다.
‘아무리 자기 아버지가 쓴 글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잘 알 수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민우는 더욱 긴장했다. 짧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송현우 교수의 선집은 점차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곧이어 송승현 실장이 자필로 정리한 내용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대강 시대 구분은 끝난 것 같네요.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눠서 글을 모으고 시기별 논저의 특징을 논하면 되겠어요.”
“좋아. 그렇게 하자. 박민우. 텍스트 정리 오늘 바로 가능하겠어?”
“문제없습니다.”
“오, 든든한데?”
이미 연대별로 발표된 자료를 모두 파악하고 있는 민우였다. 송승현 실장이 구분한 표를 토대로 자료를 넣기만 하면 된다.
타닥타닥―
민우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단순히 자료를 복사해서 정리하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컴퓨터로 정보를 전산화했다.
나이든 인문학자들이 복사물이나 단행본으로 자료를 정리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었다. 쉽게 말해 젊은 방식이었다.
가끔 너무 지나칠 때가 있어 서지훈 교수가 잔소리하곤 하지만, 민우는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의문스럽게 민우를 바라보던 송승현 실장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너무 꼼꼼히 할 필요가 있나요? 여러모로 힘만 들 텐데.”
“오픈 라이브러리 같은 곳에 이용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전산화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미리 정리를 같이해 놓으면 수고를 더니까. 나중에 검색할 때도 엄청 편해요.”
“음, 괜찮은 생각이네요.”
민우는 마치 프로게이머처럼 손을 빠르게 놀렸다. 루카치의 유물이 없어도 엑셀과 워드 프로그램은 이미 마스터한 그였다.
잠시 후 민우가 힘차게 엔터를 쳤다.
“자료 정리 끝났습니다. 메일로 보내드렸으니 확인해 보세요.”
“오케이.”
서지훈 교수와 송승현 실장이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아 모니터에 집중했다.
자료는 표로 보기 좋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누구나 할 수 있었지만, 누구도 이렇게 빠르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 두 사람은 감탄했다.
“잘했다. 이제 이걸 토대로 내용을 만들면 되겠어.”
“시기는 세 개인데 어떻게 나눌까요? 마침 우리가 세 명이니 민우 씨가 한 시기를 맡아 주면 좋긴 한데.”
“안 돼. 내공이 부족해서. 선생님의 이론에 대한 이해도도 낮고. 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거야.”
부정적인 말이었지만 민우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사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래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젝트 개요를 한참이나 바라본 서지훈 교수가 결정을 내렸다.
“초기 사상에 대해서는 승현이 네가 하는 게 좋겠다. 그땐 너도 선생님 글 열심히 보던 시기였잖아.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좋아요. 그럼 나머지 두 시기는 선배가?”
“그래야지. 그럼 얼추 선집 마무리가 끝나겠어. 두 달 목표로 달려보자.”
송승현 실장은 서지훈 교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삼 개월 안에 모든 것을 끝내겠다.
그게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순간이었다. 마음에 격랑이 몰아쳤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민우가 없었더라면 그를 꼭 안았을 것이다.
그때 민우가 손을 슬쩍 들었다.
“저, 선생님. 실장님.”
두 선배가 대화를 멈추고 민우를 주목했다.
“재미있는 생각이 있는데요. 한번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상황 아니니 해 봐요. 뭐든지.”
송승현 실장이 허락하자 민우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송현우 선생님 선집을 영문판으로 동시에 출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영역은 제가 하고요.”
“영문판으로?”
두 사람의 표정이 멍해졌다. 허를 찔린 것이다. 빨리 완성하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민우가 설명을 시작했다.
“예전에 IAHS에 참여했을 때 아틸라이 회장님께 들었어요. 명인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건 송현우 선생님 때문이라고. 그런 분의 사상을 망라하는 책인데…… 당연히 영문판으로도 내야 하지 않겠어요?”
듣고 보니 명분은 확실했다. 그렇게 판단한 서지훈 교수가 송승현 실장을 바라보았다. 가능하냐고 눈으로 물었다.
“글쎄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말이 영문판 출간이지 뚝딱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가 민우에게 물었다.
“절차 문제를 떠나서…… 번역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 않을까요? 게다가 민우 씨 스케줄도 타이트할 텐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건 자신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었다. 민우의 말을 듣고 나니 욕심이 들었다. 영어로도 번역된 책을 손에 쥐여드리고 싶었다.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고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번역을 해 두면 부담이 적을 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이번에 수상하게 되면서 하나 확신한 게 있어요.”
“뭔데?”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여야 한다는 거. 그래야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거 좋은 취미네.”
서지훈 교수가 유쾌하게 웃었다. 찬성의 뜻을 표한 것이다. 하지만 송승현 실장은 성격대로 끝까지 신중했다. 이모저모를 따져보고 있는 것.
“한 가지 걸리는 게 더 있어요. 민우 씨는 제 아버지의 학문 세계를 깊게 이해하고 있지 못해요. 그런데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까요?”
“송현우 선생님의 저술은 모두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틈틈이 읽고 있었습니다. 이해하는 건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해요. 이래 봬도 서지훈 선생님께 제대로 배웠습니다.”
서지훈 교수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걱정하고 있는 건 해외 출간 부분인데…… 오히려 전 그 부분에서 제가 꼭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째서죠?”
“저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자니까요. 해외 출판사나 업계 사람들, 그리고 학회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보증은 없을 겁니다.”
그 한마디를 들은 서지훈 교수는 큰소리로 웃었고, 송승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렇게 민우의 아이디어는 통과되었다.
저술, 출판 그리고 번역.
이 세 가지 분야를 망라하는 드림팀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 * *
그날 작업은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다들 지친 표정이었지만, 누구도 피곤하다고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냈다.
아침 여섯 시가 되자 송승현 실장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를 정리했다.
“다들 아침 식사해야죠? 야식도 안 먹었는데 배고플 거 같네요. 우리 집으로 가요.”
“귀찮게 뭐하러 가? 그냥 근처에서 먹고 들어가면 되지.”
“그래야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이 덜어질 것 같아서요.”
서지훈 교수와 민우는 어떤 보수도 받지 않고 아버지를 위해 밤을 새우고 있었다. 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미안해할 거 없어. 나는 내 공부한다 치면 되니까. 민우도 박사 논문 미리 쓴다는 셈 치면 되고. 그냥 아침은 근처에서…….”
“선배님이 해 주시는 요리 한번 맛보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꼭 가보고 싶습니다!”
“야.”
“선생님. 송 선배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죠.”
서지훈 교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뺀질거리며 웃는 민우의 속내를 짐작한 것이다. 그녀의 요리를 맛보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과 그녀를 어떻게든 이어보려고 하고 있었다.
마침 서랍 안에 놓인 혼인신고서가 떠올랐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재킷을 걸쳤다.
“그럼 가지.”
“차 인문관 앞에 대둘 테니까 천천히 나와요.”
송승현 실장이 먼저 나갔고, 민우도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지훈 교수는 서랍에 넣어 둔 혼인신고서를 가방에 슬쩍 챙겼다.
민우가 일찍 돌아간다면 이야기할 좋은 기회가 생길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송승현 실장의 아우디를 타고 오피스텔로 이동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막힘없이 20분 만에 도착했다.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20평이 넘는 고급스러운 오피스텔이었다. 그녀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는데, 모노톤의 심플한 가구와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었다.
“잠깐 소파에서 좀 쉬고 있어요. 눈 붙여도 되고. 다 되면 깨울게요.”
그렇게 송승현 실장은 주방으로 사라졌다.
서지훈 교수는 겉옷을 익숙하게 옷걸이에 걸고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우가 짓궂게 한마디 던졌다.
“자주 와 보셨나 봐요? 뭔가 정리하시는 게 선생님 댁처럼 자연스러운데.”
“쪼끄만 게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마라.”
“하하하하.”
서지훈 교수는 넥타이를 살짝 풀고 눈을 붙였다. 민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을 집었다. 문화면을 펼치니 자신의 사진이 보였다.
처음엔 굉장히 신기했었다. 유명 일간지에 사진이 들어가는 것이. 하지만 이제는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거품이 빠지기 전에 뭔가 한 건을 해야 하는데…….’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 이후로 상아대 쪽에서 접촉해올 줄 알았다. 이 정도 위업이라면 전임 보장을 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더 이상 기다리는 건 낭비야. 내가 직접 총장님을 찾아뵈는 건 어떨까?’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주에 연구실이 정식으로 배정되니 짐을 옮기는 김에 최산호 총장과 면담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전임 자리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번 수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학교 측의 의중을 파악해 둘 필요는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슬슬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곧 송승현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고, 민우가 서지훈 교수를 흔들어 깨웠다.
“선생님. 음식 다 된 거 같은데요.”
“으음? 아. 그래.”
두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식탁에 앉았다. 앞치마를 두른 송승현 실장의 모습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선배님. 앞치마도 은근 잘 어울리시네요.”
“그렇게 아부한다고 해서 더 맛있는 게 나오진 않는데?”
웬일로 너스레를 떨며 송승현 실장이 음식을 준비했다. 야채를 섞은 볶음밥과 양송이 스프, 그리고 계란프라이가 놓였다. 아침 식사로는 딱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해 놨으니까 부족하면 더 먹어요.”
세 사람이 식사하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와 회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다 민우에 대한 화제로 넘어갔다.
“근데 너 시상식이 언제라고 했지?”
“현지 시간으로 목요일 밤이요. 다음 주에 출국합니다. 당일에 바로 시상식에 참여하고 다음 날 바로 오려고요. 참, 그래서 선생님 수업 한 번 빠져야 하는데 공결을 좀…….”
“결석.”
“와, 너무하시네.”
두 사람이 재미있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도 송승현 실장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다음 날 바로 온다는 민우의 말 때문이었다.
“괜히 미안하네요. 회사에서 여행지원금까지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괜한 일에 휘말려서.”
“괜찮아요. 앞으로 상 탈 일은 많을 테니까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죠. 미국, 영국을 거쳤으니 다음에는 유럽이겠네요. 하하하.”
허풍을 떠는 민우를 보며 송승현 실장이 미소를 지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민우 씨도 많이 변했다고. 재작년이었나. 지음사에서 나랑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러지 않았었는데.”
민우도 그때를 추억했다. 인문학이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았던 그때. 확실히 지금하고는 많이 다르다. 소극적인 면도 있었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니까 적극적으로 변한 거 같네요. 이제 박사만 따면 훨훨 날아갈 겁니다.”
“너무 멀리 날아가지는 말고. 지구에서 놀아라.”
“하하하. 넵.”
식사가 끝나고 민우는 곧장 자리를 떴다. 커피 한잔하고 가라는 청도 뿌리쳤다. 결국, 오피스텔엔 서지훈 교수와 송승현 실장만 남았다.
“승현아. 나 한숨 자고 가도 되나?”
“좋을 대로 하세요.”
별 거부감은 없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옛 추억에 빠진 채 침대에서 사랑을 나눈 적도 있었으니까. 아무도 없을 때 두 사람은 연인처럼 행동했다.
간단히 씻고 나오자 송승현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주었다. 그러더니 그를 꼬옥 안았다.
“갑자기 왜 이래?”
“고마워서요.”
“뭐가.”
“이것저것. 전부다.”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서지훈 교수는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왠지 지금이라면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전에 기억나? 아버님이 했던 두 번째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