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 시대를 초월한 마음 (4) (197/500)


197. 시대를 초월한 마음 (4)
2022.05.05.


“자리를 잡은 것까지는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겸임교수로 임용된 거라서요. 과도 번역전공이 아니고요.”

“국문과로 가셨지요?”

“예. 앞으로의 커리어를 생각한다면 국제번역 전공보다는 국문학 전공이 더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강의경력도 착실히 쌓아 두지 않으면 곤란하거든요.”

와인을 홀짝인 김강현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대학원에서 박사를 딴 사람이었다. 대학 시스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민우 씨 정도 되는 사람이 커리어를 걱정하다니. 하하하. 확실히 우리나라 대학 제도에 문제가 있긴 한가 봅니다.”

“박사는 따야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석사 정도로는 어림도 없죠.”

방법이 있긴 하다. 이사회를 열어 학칙을 바꾸면 된다. 하지만 민우 하나를 영입하기 위해 그런 수고를 들일 대학은 없었다. 인문계는 이공계에 비해 성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상품성이 없다.

김강현 장관이 넌지시 물었다.

“다른 곳에서 제안은 못 받으셨습니까?”

“업체에서는 많이 왔는데,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는 별다른 제안은 없었습니다. 제일 많이 챙겨준 곳이 제 모교였고요.”

“그래서 상아대로 가신 거고.”

“맞습니다.”

“보통이라면 특기를 살려서 부임처를 정할 텐데…… 뉴스를 보고 좀 의아했습니다. 왜 국문과로 갔을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 민우 씨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해낼까 하는 생각이 말이죠.”

“일단은 계속 문학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려고 대학원에 온 거라서요.”

민우는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이제야 좀 주변이 보일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술이 들어가니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민우가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학문이 그렇지만 국문학도 해외 이론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하거든요. 우리 문학에 맞는 이론을 만드는 것, 그리고 우리의 문학이 세계에서도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번역은 그 과정일 뿐이죠.”

“생각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군요. 실례지만 올해 나이가?”

“이제 서른 살 됐습니다.”

“서른 살. 서른 살이라…… 허허허. 나이에 비해 포부가 정말 크십니다.”

김강현 장관은 진심으로 탄복했다.

루카치의 유품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꿈들. 하지만 그 꿈의 주체는 민우였다. 유품이 없더라도, 그는 끊임없이 꿈을 향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민우가 말을 이었다.

“저도 큰 꿈이라는 걸 알고 있고,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꿈에서까지 한계를 짓고 싶지는 않았어요. 꿈은 클수록 좋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맞아요. 그렇지요. 동감합니다. 목표는 클수록, 높을수록 좋은 법이죠.”

“그래서 이번에 상을 받게 된 거기도 하고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지금 같은 영광은 누리지 못했을 겁니다.”

김강현 장관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가볍게 건배하고 와인잔을 입에 댔다. 민우는 김강현 장관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서론이 얼추 정리된 느낌이다. 이제 슬슬 본론이 나올 것 같은데.’

그 예상은 정확했다. 흘러나오는 재즈풍의 리듬에 맞춰 분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민우를 향한 김강현 장관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 말씀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시군요.”

등을 의자에 편하게 기대고 있던 장관이 몸을 앞으로 슬쩍 숙였다. 민우와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졌다.

“슈퍼 루키라고 해야 할까요. 민우 씨는 느끼지 못하시겠지만 본인은 업계에서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맨부커상을 거머쥠으로 인해서 말이죠. 번역가들에게도, 아카데미 학생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됐지요.”

민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에서까지 겸손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비영어권 국가에서 나고 자란 젊은 번역가가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을 공략했다…… 이 얼마나 센세이셔널한 일입니까?”

“오늘 행사에서 느끼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열기는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이 기세를 어떻게 유지시켜 나가느냐가 관건이겠죠. 장관님을 포함한 정부 관계자분들의 일이기도 하고요.”

“그렇지요. 동감합니다.”

“실은 아까 행사 때 아카데미 학생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좀 소외된 느낌이더군요. 그래서 저라도 도움이 될까 합석했습니다. 이야기가 잘 통해서 앞으로 종종 만나서 정보도 교환하고 스터디도 해 볼 생각입니다.”

김강현 장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치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게 바로 제가 민우 씨에게 바라는 부분입니다. 앞으로 우리 부처에서는 번역 사업에 대한 지원을 한층 더 강화할 예정입니다. 가칭이긴 합니다만 ‘국제번역센터’를 신설할 계획이지요. 아직 오피셜은 아니고.”

민우는 깜짝 놀랐다.

한국문화예술번역원에서 강사 자리 하나 받을 줄 알았는데 번역센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다니. 그것도 장관의 입에서.

하지만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민우가 의문을 표했다.

“장관님. 번역센터라면…… 이미 번역원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아까 행사에 번역원장님도 오신 것 같았습니다만.”

“그렇지요. 쉽게 말해 확장이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의 번역원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력은 물론 예산 규모와 정책적인 면에서요.”

“그렇군요.”

“저는 말이죠. 이번에 민우 씨가 수상하는 것을 보고 결심을 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번역을 하나의 산업으로 키워보자.”

김강현 장관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눈빛에서 열망을 읽을 수 있었다. 루카치의 안경을 끼고 있던 민우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진심임을.

“이미 번역원장과도 이야기를 끝낸 상황입니다. 이번 달 말쯤이면 언론에도 공개가 되겠지요. 그 전에 민우 씨와 좀 말을 맞추고 싶어서.”

“말을 맞춘다고요?”

민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굉장히 흥미로운 시나리오였다. 그 중심에 자신이 서 있는 풍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김강현 장관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친근히 말했다.

“민우 씨의 인터뷰에서 인상 깊게 본 부분이 있습니다. 포부라고 할까요?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창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저를 위해서…… 아니죠. 단어 선택이 잘못됐군요. 우리의 문학을 위해서, 그 힘을 좀 보태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요?”

고개를 끄덕인 김강현 장관이 잔을 내밀었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민우는 쉽게 잔을 부딪치지 않았다. 잔을 살짝 물리며 질문을 던졌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힘을 보태면 됩니까?”

“민우 씨에겐 출중한 강의력이 있습니다. 이미 검증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KOC에서 호평을 받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간단한 산수죠. 거기에 번역 능력을 더하면 어떨까. 완벽한 렉처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제안합니다. 민우 씨를 곧 설립될 국제번역센터의 주임교수로 초빙하고 싶습니다.”

주임교수라면 교수들의 수장. 결코, 가볍지 않은 자리였다. 겨우 서른 살이 된 민우에게 있어서는 가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인 걸까. 김강현 장관은 웃으며 잔을 더 내밀었다. 그러나 민우는 잔을 끝내 부딪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이런…… 예상 밖의 대답이군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거절을 당했지만, 김강현 장관은 웃고 있었다. 기대를 한껏 품은 눈으로.

“번역 기술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자신합니다. 하지만…… 번역은 기술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번역가의 철학이나 경험, 가치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때 명번역이 탄생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번역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겠지요. 기술직도, 학문도 마찬가지. 저보다는 경험이 많은 분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하하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민우 씨는 빈틈이 없는 사람이다.”

김강현 장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쿨하게 물러섰다. 오히려 거절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 말씀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박의 여지를 찾지 못하겠군요.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야겠군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김강현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동상처럼 굳게 서 있던 수행원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민우도 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오늘 좋은 말씀 감사히 들었습니다. 덕분에 비싼 술도 얻어 마시고.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보지요.”

민우와 악수를 한 김강현 장관이 바를 나갔다. 남은 수행원 하나가 계산을 하고 뒤를 따랐다.

홀로 남은 민우는 가방을 어깨에 멨다.

‘주임교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어.’

민우는 유쾌하게 웃으며 바를 나섰다.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나둘 미래가 뚜렷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 더 숙성이 필요해. 오크통의 향이 와인에 스며들듯이 느긋하게 준비를 해 보자. 다음에는 누군가 더 엄청난 제안을 들고 올 테니까.’

민우는 김강현 장관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몸을 사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크게 한 방 터트리기 위해서.

밖으로 나온 민우는 손바닥으로 볼을 찰싹 두드렸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곧 명인대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 * *

‘어떻게 한다.’

서지훈 교수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손엔 서류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의 전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맨 상단에 적힌 글자는 ‘혼인신고서’였다.

일단 자리에 앉아 펜을 들었다. 서류에 자신의 인적사항을 적었다. 서명까지 마치니 이제 처가 될 상대방의 공란만이 남았다.

‘어려운 문제로군.’

쉽게 답을 낼 수 없었다. 송현우 교수의 두 번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허락을 해 줄지는 의문이었다.

공식적인 관계는 그날 공항에서 모두 끝이 났으니까.

최근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애매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일을 이렇게 빠르게 진행할 만큼의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미루다 보니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딸칵―

문이 열렸다. 민우였다. 서지훈 교수는 혼인신고서를 자연스럽게 서랍에 넣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소를 지으며.

“어땠냐?”

“좋았습니다. 장관님하고 독대하고 왔어요.”

“뭐라시디?”

“국제번역센터 주임교수를 맡아주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역시 아무나 장관 하는 거 아니더라고요.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쓸데없는 곳에 예산을 낭비하려고 하는군.”

서지훈 교수가 짓궂게 농담을 던졌다. 민우도 웃으며 그 농담을 받았다.

“그래서 거절하고 왔습니다. 좀 더 경험이 풍부한 분으로 모시라고 조언해 드리고 왔지요.”

“짜식, 많이 컸구나.”

민우는 일단 커피를 내린 뒤 선집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민우는 기초자료를 찾고 서지훈 교수가 집필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민우가 서지훈 교수를 바라보았다.

“어쩌실 거예요?”

없는 척을 할 거냐고 묻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서지훈 교수가 직접 잠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의외의 사람이 나타났다.

“여까지 웬일이야?”

“밤새 굶어가면서 원고 쓸 거 같아서요. 간단히 먹을 것 좀 준비해 왔어요.”

“선생님은?”

“상태는 많이 안정됐어요. 잠깐 친척한테 부탁하고 오는 길이에요.”

송승현 실장이었다. 그녀가 도시락을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잔소리를 곁들이며.

“밤새는 거 나쁜 버릇이에요. 논문도 좋지만 제때 자고 잘 챙겨 먹어야죠. 그러다 폭삭 늙는다고요. 평생 홀애비로…….”

“안녕하세요. 실장님.”

민우가 캐비닛 너머로 불쑥 나타나자 송승현 실장이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민우가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

“미, 민우 씨는 여기에 무슨 일이죠?”

“네? 이상한 질문을 하시네요. 제자가 지도교수님 연구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근데 실장님이야말로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죠. 기획서도 보여줄 겸.”

송승현 실장이 말을 더듬는 건 처음 봤다. 민우는 영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모르는 척 다시 자료 수집에 몰두했다.

한숨을 내쉰 송승현 실장이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서지훈 교수에게 보여주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출판기획서였다.

“출간엔 이제 행정상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내용만 만들어 주면 돼요.”

“맡겨 둬. 금방 끝낼 테니까.”

송승현 실장이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지훈 교수가 물었다.

“바로 안 가려고? 시간 늦었는데.”

“저도 가만히 있을 순 없죠. 돕겠어요.”

“사양하진 않으마.”

“뭐부터 하면 되죠?”

“연도별 저작물 정리는 민우가 할 거야. 굵직하게 원고를 묶어서 시대구분을 의미 있게 한번 해보자고.”

송승현 실장이 팔을 걷어붙였다.

분야별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민우는 든든했다. 그 어떤 것이 와도 두렵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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