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 시대를 초월한 마음 (3) (196/500)


196. 시대를 초월한 마음 (3)
2022.05.02.


민우는 김강현 장관과 악수를 했다. 고위급 정부 관계자와 이렇게 인사를 하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다. 허윤과 만났을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민우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오늘 무대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박민우입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당연히 모셔야지요. 이번에 아주 큰 상을 타셔서 국위 선양도 하시고, 또 우리 문화를 해외에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목소리였다. 역시 4선 의원 출신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민우는 김강현 장관과 잠시 환담을 나눴다.

“사실 예전부터 우리 부처에서는 번역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여러 지원 사업도 추진했고 관련 기관들도 만들어나가고 있지요.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와중이었는데…… 이렇게 민우 씨가 큰일을 해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제 능력보다는 역시 작품이 좋아서 일이 잘 풀린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우는 겸손히 웃었지만 속으로는 의구심을 품었다.

정부에서 여러 사업을 추진한 건 맞다. 그런데 이번 영국 진출 과정에서 정부의 지원을 조금이라도 받은 부분이 있었던가?

‘뭔가 어물쩡 묻어가려는 느낌이 들기는 한데…….’

민우는 상념을 치웠다. 그 부분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좋은 자리였으니까.

“앞으로도 좋은 정책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보기에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거든요. 마침 다른 번역가분들도 많이 오셨으니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셨으면 합니다.”

주변에 몰려들어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번역가들이 내심 감탄했다. 나이가 어린 만큼 들떠서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기에 바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모두를 위한 제안을 하고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민우가 대단히 겸손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김강현 장관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신 것이기도 하고요. 자, 슬슬 행사가 시작되려나 봅니다. 착석하시지요. 이봐 곽 과장. 민우 씨 자리는 준비해 두었나?”

“특별석으로 마련해 두었습니다. 앞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이 나섰다. 민우는 연단 위에 마련된 특별석을 한번 슬쩍 보고는 난색을 표했다.

“그냥 전 이쪽 테이블에 앉겠습니다.”

“예?”

“전 수상자로 이번 행사에 참여한 게 아니라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번역가로 온 거잖아요. 이곳에서 다른 분들하고 친분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기회 흔치 않잖아요.”

특별대우를 받기 싫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곽 과장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강현 장관은 민우를 흥미로운 눈으로 관찰했다.

“독특한 인물이군요. 민우 씨는.”

“죄송합니다. 어렵게 자리 마련해 주셨는데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양해랄 것도 없지요. 곽 과장. 미리 준비한 자리는 내리고 민우 씨 뜻대로 해 주게. 그리고 민우 씨. 행사 끝나고 잠시 시간 좀 내주시죠. 가볍게 와인이나 한잔합시다.”

“옙, 알겠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민우였다. 아마 본 행사보다 그 이야기가 진짜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강현 장관은 특별석에 앉았다. 그 말고도 고위급 인사가 몇 명 더 자리하고 있었다. 국회의원도 있었고, 한국문화예술번역원장의 모습도 보였다.

잠시 후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 바쁘신 와중에도 행사장에 찾아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곧 ‘번역가의 밤’ 본식이 시작됩니다. 귀빈 여러분들께서는 착석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제야 여유를 찾은 민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오늘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대부분 나이가 좀 있으시구나. 하긴, 경력이 있는 분들이 많이들 초대받으셨겠지.’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는 서른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학생들도 있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고 끼리끼리 모여 있었다.

‘어린 친구들도 몇 명 보이네. 저렇게 모여 있는 걸 보니 번역 아카데미 출신이겠지?’

사람들이 거의 다 착석하자 민우도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민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쪽에 앉아달라는 듯이.

어디에 앉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고맙게도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박민우 씨. 이쪽으로 오시죠.”

어떤 남자가 민우를 향해 손짓했다. 마른 체형에 정장을 걸친 사람이었다. 나이는 쉰은 넘어 보였고 두꺼운 뿔테 안경을 썼다.

마침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민우는 가볍게 묵례하며 자리에 앉았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자리 잡기 힘드셨죠? 다들 자기 테이블에 앉아달라고 쳐다만 보고 있으니.”

“조금 난처하더라고요.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사내는 더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뻘쭘해진 민우는 연단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불편했다. 자신을 부른 사내는 별로 호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물을 마시며 무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뭔가 묘한 느낌이다. 거리를 두는 거 같은데…… 뭐지? 괜히 이쪽에 앉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사내의 명찰을 확인했다. 그런데 명찰을 목에 걸고 있지 않았다. 이름은커녕 소속도 알 수 없었다.

민우가 분위기를 환기할 겸 물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명찰을 안 걸고 계셔서요.”

사내가 조금 거만한 태도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내가 목에 뭘 거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김태현입니다. 한번 들어는 봤죠?”

“김태현 님이라면…… 아, <북극성> 번역하신 그 김태현 번역가님 맞으시죠?”

“맞습니다. 번역가라는 소리는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하하. 요즘은 다들 선생님이라고들 해서 원.”

사내는 싱겁게 웃었다. 제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것 같은데, 속된 말로 좀 재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번역가였다. 선생님 소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다른 의미로 신경이 쓰였다.

호칭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태엽시계> 번역을 놓고 경쟁했던 상대가 바로 옆에 있는 김태현 번역가였기 때문이다.

건너 듣기론, 자신의 번역이 탈락한 이후에 격노했다고 한다.

‘이상하네. 내가 불편할 텐데 대체 왜 부른 거야?’

피하거나 무시해야 정상일 텐데 그는 굳이 손을 들며 자신을 여기에 앉게 했다. 왠지 목이 탔다. 민우는 잔을 들고 목을 축였다.

곧 사회자가 행사를 시작했고 제일 먼저 김강현 장관이 축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김태현의 목소리가 축사를 가렸다.

“상 받으니까 어떻습니까?”

“분에 넘치는 상이었습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어요.”

“당연히 분에 넘치시겠지요.”

김태현이 피식 웃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연단 쪽을 향해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요? 솔직히 내 번역본이 선택되지 않은 게 의외이긴 했는데…… 뭐 살다 보면 이런저런 변수가 있기 마련이지. 알고 보니 출판기획실의 송승현 실장이 학교 선배라면서요?”

민우가 표정을 굳혔다. 그 말의 의미는 명백했다. 연줄로 번역을 따낸 것이 아니냐 하는.

민우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했다. 업계 선배이기도 하고 실력이 대단한 번역가였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민우도 웃었다.

“선배긴 하죠. 하지만 같이 학교를 다닌 적도 없고,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닙니다.”

“그래도 학연이라는 게 무섭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에서는.”

“학연보다 더 무서운 게 있죠. 그게 뭔지 아십니까?”

민우가 묻자 김태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도 지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민우의 눈이 빛나는 순간.

“실력.”

그 한마디가 묵직하게 울렸다.

김태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민우는 입으로도 눈으로도 말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보다 낫다고. 실력으로 기회를 잡은 거라고.

민우는 김태현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실력만큼 무서운 게 또 있을까요? <태엽시계> 샘플 검수에 참여한 두 영국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더군요. 영국인이 쓴 한국인에 대한 소설이다…… 전 그 평가에 만족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말이죠.”

“크흠.”

민우의 패기에 눌린 김태현은 헛기침하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본전도 못 찾았다는 표정이었다.

민우는 그저 빙긋 웃을 뿐 그와 말을 섞지 않았다.

장관의 축사가 모두 끝나고 간단한 공연 등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동시에 만찬이 시작되었다.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뵙게 되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러시죠. 기회가 되면 또 봅시다.”

“예. 선생님.”

민우는 ‘선생님’ 칭호에 강조점을 두고 자리를 떴다.

자리를 옮긴 민우는 여러 번역가와 어울렸다.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박민우 씨! 얘긴 많이 들었습니다. 수상 축하드립니다. 맨부커라니. 정말 부럽네요. 저에겐 꿈만 같은 일인데. 그나저나 이번에 <더 위자드> 3부 번역 다시 하신다고요? 라온북스에서.”

“그렇게 됐습니다.”

“골든북스 놈들 탐욕 부리다가 제대로 덤터기 썼지요. 갑질로 유명하거든요. 그쪽하고 일 안 하셔서 다행입니다. 하셨으면 고생깨나 하셨을 거예요.”

“그 정도입니까?”

그때 다른 번역가가 끼어들었다. 그는 마치 지금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골든북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평판이 안 좋은 곳이었구나. 역시 안 하길 잘했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업계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이 보다 확실해진 느낌이었다.

‘다들 한가락씩 하는 사람들이었구나. 번호도 교환했으니 나중에 따로 연락해 봐야겠어. 자, 그럼 슬슬 저쪽으로 가 볼까?’

민우가 주목한 곳은 아카데미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대부분이 또래였고, 이름이 없어서 그런지 소외된 테이블이었다.

민우가 다가가 정중히 청했다.

“저, 괜찮으시면 합석해도 될까요?”

“어머, 박민우 씨! 어서 앉으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우가 나타나자 소란이 일었다. 밖에서는 유명하진 않았지만, 번역 업계에서는 달랐다. 민우는 한마디로 아이돌이었다.

젊은 청년이 용기를 내며 나섰다.

“저기, 죄송한데 악수 한 번만 할 수 있을까요? 민우 씨의 기운을 이어받고 싶습니다!”

“저도요!”

“저도 슬쩍 줄 서봅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결국 민우는 한 명씩 돌아가면서 악수를 했다.

앉자마자 질문이 쏟아졌다.

“민우 씨는 언제부터 번역 일 시작하셨나요?”

“6개 국어 하신다고 들었는데 공부는 언제 하셨어요?”

“영국에서 살다 오셨나요? 번역한 거 봤는데 정말 상 받을 만하더라고요. 완벽했어요!”

“기사에서 여자 친구분 사진 봤는데 너무 미인이에요. 저도 6개 국어 하면 그렇게 예쁜 여친 만들 수 있을까요?”

어디서부터 대답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일단 민우는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번역 일을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여행경비나 좀 벌어볼까 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일이 이렇게 커졌네요. 외국어 공부는 틈틈이 하고 있고, 영국 체류 경험은 없습니다. 여권도 얼마 전에 처음 만들었어요. 그리고 여자 친구는…… 본인도 자기가 이쁘다는 거 압니다. 하하하. 그런데 다들 아카데미 출신이신가요?”

“맞아요. 저희들 모두 아카데미에서 번역 배우고 있어요. 같은 기수고요.”

“앞날이 기대되는 분들이 한자리에 모여 계셨네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민우는 그들과 오래도록 시간을 보냈다. 워낙 분위기가 좋아 동창회에 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자는 제안이 나왔다.

민우는 흔쾌히 수락했다. 인맥은 만들어 둬서 나쁠 게 없으니까.

‘그리고 좀 특별한 친구가 있으면 내 프로젝트로 끌어오면 되고.’

민우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대화가 무르익어갈수록, 준비된 행사도 점점 끝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밤 9시가 될 무렵, ‘번역인의 밤’이 모두 끝났다.

* * *

“이쪽으로 오시죠.”

비서관이 민우를 안내했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김강현 장관을 수행하고 있던 비서관이 민우에게 찾아와 길을 안내한 것이다.

민우가 들어간 곳은 와인 바였다. 은은한 재즈풍의 음악이 감미로웠고, 창가 쪽 외진 테이블에 김강현 장관이 앉아 있었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장관님. 오래 기다리셨죠?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뭐 그 정도야. 일단 앉으시죠.”

민우가 자리에 앉자 수행원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임무를 수행했다.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김강현 장관이 말했다.

“좀 조용한 곳에서 뵙고 싶었는데 근처엔 여기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전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데 어디 불편하십니까? 표정이 아까와는 좀 다른데.”

긴장하던 민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렇게 높으신 분하고 독대를 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이제야 상을 탔다는 느낌이 드네요.”

“하하하. 농도 잘하시는군. 술은 좀 하십니까?”

“못 한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습니다. 문학이 제 전공이라면 술은 제 복수전공이기도 해요.”

“그거 참 마음에 드는 말씀이군요.”

잔을 채운 두 사람이 가볍게 건배했다. 목을 축이고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김강현 장관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상아대에 자리를 잡으셨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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