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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시대를 초월한 마음 (2) (195/500)


195. 시대를 초월한 마음 (2)
2022.04.29.


짹짹― 짹―

새소리가 귓가를 간질이자 게슴츠레 눈을 떴다. 곧 민우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서 깜빡 잠든 모양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커튼이 춤을 춘다.

‘이런…… 언제 잠든 거야? 지금 몇 시지?’

핸드폰을 보니 오전 10시가 넘었다.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인 민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서의 밤’ 촬영까지는 앞으로 세 시간. 다행히 늦잠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선생님은 댁에 가셨나?’

연구실엔 불이 꺼져 있었다. 옷걸이를 살펴보니 서지훈 교수가 늘 입고 다니던 재킷이 없었다. 가방도 없는 걸 보니 돌아간 모양이었다.

일단 민우는 보다만 자료를 한쪽으로 정리했다. 연구실 전체에 널려 있는 자료는 손대지 않았다. 당분간은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때 배에서 꾸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민우는 인상을 찡그리며 배를 쓸어 만졌다.

‘어제 적당히 마신 게 다행이네. 슬슬 해장을 해야겠는데. 뭐 없나?’

속이 좀 쓰렸다. 이럴 때 얼큰한 국물이라도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책상에 놓인 컵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 없는 컵라면 발견……이 아니군.’

컵라면 뚜껑에 눈에 익은 글씨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 일이 있어 먼저 간다. 밥은 먹고 다녀라.

서지훈 교수의 메모였다. 센스 있게 컵라면 뒤쪽에 햇반도 하나 놓여 있었다. 민우는 전기 포트에 물을 채우고 컵라면을 뜯었다.

그렇게 든든히 배를 채우고 머리를 대충 정리한 다음 연구실을 나섰다.

때마침 수빈에게 전화가 왔다.

― 어제 술 많이 마셨어요? 톡도 없고 걱정했잖아.

“미안해. 일이 좀 생겨서 학교에 들렀어.”

― 학교에요?

“선생님하고 밤새 작업했어. 후우, 앞으로도 좀 바빠질 거 같아.”

― 무슨 일 있어요?

민우는 최민식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서지훈 교수를 도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설명했다.

안타까운 탄성이 수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세상에. 송승현 선배 마음 아프시겠네요. 어쩌지? 한번 병문안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곧 병원에서 나가신대.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신다고 하더라.”

잠시 침묵이 돌았다. 남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수빈은 학부 시절 송현우 교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 송 선생님 있죠. 가끔 수업 시간에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어요. 퇴임 후에 시골로 내려가서 텃밭 가꾸며 여생을 보내고 싶으시다고.

“그렇게 되긴 힘들어졌지만 제자 농사는 잘하셨으니 든든하실 거야. 서지훈 선생님이 계시니까. 인간으로서는 모르겠지만 학자로서 여한은 없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 그러셨으면 좋겠다.

“분명 그러실 거야. 아무튼, 슬퍼할 시간은 없어. 최대한 빨리 움직여서 송현우 선생님께 책을 안겨 드려야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서지훈 선생님도 마찬가지일 거고.”

잠시간의 침묵. 그 사이 민우는 계단을 내려 인문관을 나섰다. 몇몇 후배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했고, 민우는 가볍게 묵례했다.

곧이어 핸드폰에서 수빈의 목소리가 울렸다.

― 서지훈 선생님도 오빠도 중요한 일을 하게 됐네. 힘내요. 응원할게. 그런데 많이 바쁜데 일 도와드려도 괜찮아요?

“나야 괜찮은데 네가 걱정이지. 당분간은 많이 못 만날 테니.”

민우가 걱정스레 말했는데, 다행히 핸드폰 너머에서 한숨 대신 차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선생님 잘 도와드려. 의미 있는 일이잖아?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한 지성이 남긴 사상을 계승하는 작업이라고 할까.

“누가 평론가 아니랄까 봐 포장은 잘하네.”

조금 짓궂게 대꾸하긴 했어도 민우는 그녀의 표현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단순히 서지훈 교수를 도와주는 일에서 끝낼 게 아니다. 민우는 송현우 교수의 학문적 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박사 논문에 착수한다. 민우가 계획한 박사 논문은 한국현대문학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쓰는 것이다.

‘면접 때 부정적인 평가도 많았었지. 내가 그럴 만한 경륜이 없다는 소리도 들었고.’

박사과정 입학 면접 당시 최철웅 교수는 민우의 연구계획서를 보고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면접장 밖에서도 그런 의문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민우는 굴하지 않고 자신 있게 행동했다. 그리고 계획을 현실로 만들 기회를 얻었다.

‘송현우 선생님의 저술을 하나의 책으로 묶게 됐으니 다른 선생님들도 내 연구 계획에 의문을 표하지 못하실 거야.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들이 상당할 테니까.’

민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물론 그런 의도 때문에 서지훈 교수를 도와주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일이 풀리게 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 오빠?

이수빈의 목소리에 민우가 정신을 차렸다.

“미안. 딴생각 좀 하느라. 뭐라고 말했어?”

― 지금 학교냐구.

“인문관 막 나왔어. 이제 집에 들어가서 씻고 준비해야지. 이따 방송국에서 보자.”

― 응. 이따 봐요.

전화를 끊은 민우는 힘차게 버스에 올랐다.

집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고 말끔히 씻은 민우는 레아의 차를 타고 방송국으로 이동했다.

레아는 자꾸 민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어젠 언제 들어가셨어요?”

민우는 대본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완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답이 조금 늦었다.

“어제가 아니라 오늘 들어갔어요. 열한 시쯤인가. 컵라면에 밥 말아 먹고 집에 들어가서 씻고 나왔죠.”

“그럴 거면 그냥 댁에서 식사하시지 그랬어요.”

“사정이 좀 있어서요.”

민우는 그냥 웃고 말았다. 서지훈 교수가 남긴 쪽지 이야기를 해봐야 그녀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레아가 다시 물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으셨던 거예요?”

“별일은 아니고, 그냥 새롭게 프로젝트 하나 하게 됐어요. 당분간 좀 바빠질 거 같네요. 영국에 가는 것도 시상식만 참여하고 바로 귀국해야 할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스케줄에 더 신경을 써야겠네요.”

“잘 부탁해요.”

레아는 아쉬웠지만, 굳이 입 밖으로 그 감정을 표현하진 않았다.

영국행엔 그녀도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단은 민우의 비서였고, 영국에 체류한 적이 있어 가이드 역할을 하려고 했다.

그에게 점수를 딸 기회였는데 아쉽게도 수포가 된 것.

레아가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어느새 차가 방송국 앞에 섰다. 가방을 챙기는 민우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레아가 말했다.

“오늘도 촬영 잘하고 오세요. 이따 다섯 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차에서 내린 민우는 곧장 스튜디오로 향했다. 환한 조명과 함께 스태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민우가 힘차게 인사했다. 서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출연진이 모두 반갑게 인사했다. 장영한 PD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 민우 씨 안색이 좀 별로네. 어제 뭔 일 있으셨나?”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요. 많이 티 납니까?”

“이대로는 녹화 못 하지. 쯧, 큰일이네. 빨리 메이크업 받고 오세요. 곧 촬영 들어가야 하니까. 미정 씨! 민우 씨 좀 부탁해.”

“예!”

잠시 후 준비가 모두 끝났다.

메이크업의 힘은 위대했다. 다크서클은 물론, 전체적으로 어둑했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빠. 평소에 화장 좀 하고 다니면 안 돼? 완전 사람 달라 보이는데.”

“일 없다.”

“칫.”

민우는 수빈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화장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렇게 촬영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촬영은 별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오후 다섯 시를 넘기면 어쩌나 싶었는데, 네 시 반쯤에 모든 촬영이 끝났다.

“컷! 아주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다들 수고했어요!”

“고생하셨습니다!”

민우는 출연진과 인사를 나눴다. 특히 김영화 작가와는 덕담을 주고받았다. 맨부커상 수상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그럼 선생님, 다음 주에 공항에서 뵙겠습니다.”

“그러지요. 박 선생도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계시고. 술 생각나면 언제든 연락하시지요. 허허허.”

그와 헤어진 민우는 재빨리 무대에서 내려왔다. 마침 장영한 PD가 스태프들에게 잔소리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갔다.

“저기, 피디님.”

“어? 민우 씨. 무슨 일이라도?”

“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시간 괜찮으십니까?”

“타이밍 참 애매하게 오셨네. 크흠, 너희들 민우 씨 덕분에 산 줄 알어!”

입을 씰룩거린 장영한 PD가 사람 좋은 미소로 바꾸고는 자리를 옮기자고 말했다. 마침 출연자 휴게실이 비어 있었다.

두 사람이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십니까? 긴장이 되네요. 계약서에 뭐 문제라도?”

“아뇨. 그게 아니라. 독서의 밤에 출연시키고 싶은 친구가 하나 있어서요.”

“출연을? 누구요?”

“주예린 작가요. <세계수> 쓴 사람.”

잠시 생각에 잠기던 장영한 PD가 박수를 치며 아는 척을 했다.

“아! 그 젊은 작가님? 안 그래도 조연출이 얘기를 꺼내긴 했었지요. 요즘 북미에서 반응이 그렇게 좋다던데?”

“실은 그 친구가 학부 때 후배거든요. 지금 대학원도 같이 다니고 있고. 마침 우리 프로그램도 번역 특집으로 하고 있으니 콘셉트에도 맞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 좋네요.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결정이 되면 따로 연락을 드리죠. 더 하실 말씀은?”

“없습니다.”

“그럼 다음 촬영 때 뵙죠.”

출연자 휴게실에서 나오니 마침 이수빈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사이좋게 방송국을 나섰다. 레아가 공터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빈이 물었다.

“오늘 행사에 장관님도 오신다고 했었나?”

“그렇다고 하더라.”

“이야기 잘하고 와야겠네. 번역 쪽 지원 사업이 많아지긴 했어도 아직 여러모로 힘들다던데.”

골든북스 같은 출판사는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렸다. 아직도 많은 번역가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번 행사를 통해 그것을 개선할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민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볼 생각이었다.

곧 레아가 차에서 내려 정중히 인사했다. 수빈에게 모셔다 드리겠다고 얘기했지만, 약속이 있어 따로 움직인다고 답했다.

“끝나고 전화할게.”

민우가 차에 올랐고, 수빈은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곧 차가 엔진음을 내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 *

‘번역인의 밤’은 코엑스에서 열렸다. 꽤 신경을 썼는지 꽃과 화려한 장식이 즐비했다. 뒤쪽에서는 만찬이 준비되고 있었다.

‘확실히 장관이 온다니까 신경을 쓴 모양이네.’

민우는 안내 데스크에서 이름표를 받고 안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테이블보가 깔린 원형 테이블이 열 개 있었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행사가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박민우 씨!”

“예?”

“죄송해요. 여기 서명 좀 해 주세요. 깜빡했네요.”

민우가 펜을 받아들고 서명을 했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다. 직원이 민우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바람에 이목이 이쪽으로 확 쏠린 것이다.

“박민우? 저 사람 맞지? 이번에 맨부커상 받은.”

“맞는 거 같은데?”

“한번 가보자!”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잠시 가슴이 두근대며 긴장이 들었다.

하지만 민우는 웃었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IAHS에 참여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때는 아예 안면조차 없는 사람들과 토론을 해야 했으니까. 민우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수상 축하드립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번에 <더 위자드> 3부도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대체 비결이 뭐요?”

어떤 질문부터 대답해야 할지 몰라 민우가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박민우 씨.”

무게감이 있었다.

풍채가 좋은 초로의 사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엔 두 명의 수행원이 있었다. 누가 봐도 고위급 간부였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환영합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강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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