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 시대를 초월한 마음 (1) (194/500)


194. 시대를 초월한 마음 (1)
2022.04.28.


“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이냐?”

“자료가 이렇게 산더미인데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게 이상한 거죠. 논문을 쓰실 때도 이러진 않으셨잖아요. 이거 스케일만 보면 완전 국책연구사업급인데.”

서지훈 교수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지금 연구실 안은 온통 어질러져 있었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민우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송승현에게 자신 있게 떠들긴 했지만, 실제 작업에 들어가 보니 손을 대야 하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도와달라고 하면 민우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은 자신이 해결할 문제였고, 민우는 앞으로 걸어 나가야 했다. 이런 기회는 또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일이었는데 그걸 좀 급하게 하게 됐어.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봐라. 안 그래도 바쁜 녀석이.”

“그렇게 안 바빠요. 센트럴 북스에서 특별 휴가 줬거든요.”

민우는 테이블에 놓인 자료를 살펴보았다. 눈에 익은 제목이었다. 저자를 보니 송현우 교수였다. 수업 때 본 자료였다.

“한국현대소설사를 개관한 자료네요. 안 그래도 제 박사논문 테마가 문학사인데 저한테도 도움이 좀 되겠는데요? 정리하실 거면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이건 내 일이다.”

너무나 단호했다. 민우는 혼난 아이처럼 자료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냉정하리만치 선을 긋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서지훈 교수와는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남이 된 것 같았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서지훈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돌렸다.

“근데 오늘 저녁에 파티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까 김성욱이가 완전 신나서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니던데 말이다.”

“안 그래도 슬슬 가보려던 참이에요. 그런데 선생님이 늦게까지 고생하시는데 저만 먹고 마시며 즐길 순 없지 않습니까.”

“가서 놀아 인마. 한창 좋을 때 일하지 말고. 피할 수 있을 때 피해야지.”

서지훈 교수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그의 모습은 평소와는 좀, 아니 많이 달랐다. 뭔가에 쫓기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민우가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시면 꼭 연락 주세요.”

“오냐.”

민우는 문을 열고 연구실에서 나왔다. 하지만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왠지 뭔가 숨기고 계신 것 같단 말이지.’

이런저런 생각을 다 해 보았다. 힌트가 없으니 답을 찾는 일은 요원했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발목을 붙들었지만, 더 할 일이 없었기에 그는 인문관을 나섰다. 그리고 김성욱이 알려준 술집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명인대 입구에 위치한 단골 술집이었다. 한옥식 인테리어로 되어 있었고, 동동주와 파전, 그리고 보쌈이 기가 막힌 곳이었다,

민우는 2층 구석에 위치한 단체석으로 움직였다. 거기에 다들 모여 있었다.

“다들 벌써 취했구나?”

“앗! 선배! 오셨어요?”

“안 오시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렇게 자리까지 만들어 줬는데 안 올 수는 없지.”

벌써부터 거하게 판을 벌여 놓았다. 안주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다들 술에 취해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김성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뭘 늦어? 8시 전인데.”

“하하하! 농담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김성욱이 자리를 비켜 상석을 만들어 주었다.

여덟 명이나 모여 있었다. 다들 석사였는데, 평소 민우와 가까이 지내거나 이번 기회에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학생들이었다.

김성욱이 주전자를 들며 물었다.

“형, 동동주로 하실 거죠?”

“좋지.”

“그럼 제가 대표로 한잔 올리겠습니다. 어? 빈 잔이 없네. 사장님! 여기 술잔 좀 하나 갖다 주세요!”

곧 알바생이 작은 사발을 가져왔다. 김성욱이 민우에게 술을 따랐다. 걸쭉한 동동주가 사발에 가득 찼다.

“술도 찼으니 이제 한 말씀 하시죠.”

“꼭 해야 해?”

“에헤이! 당연히 하셔야죠! 아시아 최초로 번역가로 맨부커상을 받으신 형님의 주옥같은 말씀을 들으려고 이렇게 모인 건데. 못 와서 아쉬워한 애들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오버하지 말고.”

“진짠데.”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수상을 축하해 주었지만 이렇게 후배들이 직접 챙겨주는 것은 또 달랐다.

민우는 술잔을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그 사이 테이블은 완전 조용해졌다. 이내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이야기엔 시작이 있는 법이니까. 그때로 되돌아갔다.

“몇몇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우리학교 대학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정말 고생 많이 했어. 천덕꾸러기, 낙제생, 3류대 출신이라고 무시도 많이 당했지. 서자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고 말야. 돈은 돈대로 나가고 노력한 거에 비해 실력은 늘지도 않아서 그냥 포기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 어쩌다 한 번 지각하는 날엔 아주 박살이 났고.”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감추고 싶은 과거일 수도 있는데 민우는 웃으며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역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 왜 선생님들이 가끔 그런 말씀 하시지? 대학원생은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고.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한다고.”

“그렇죠. 형은 노력의 상징입니다.”

민우는 옆에 앉은 김성욱의 어깨를 다독였다. 적절한 추임새였다.

“당장 어려운 일이 닥치면 막막하고 힘들지. 선생님들이나 선배한테 박살 나면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랬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어. 우린 아직 성숙하지 못한 존재니까.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물론 나도 덜 익었어. 반숙이야.”

민우가 가볍게 농담을 던지자 후배들이 웃었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틈에 민우가 계속 말했다.

“뚝심을 잃지 말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착실히 걸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완성시켜 나가면 되거든.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 없어. 조급할 필요도 없고. 나는 어려울 때 진섭이와 수빈이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 그러니 너희들도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동기나 선후배들한테 기대도록 해. 잠깐은 괜찮아.”

민우가 사발을 들었다.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던 후배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하나둘 사발을 들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다들 열심히,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자. 알았지?”

“넵!”

“자, 건배!”

사발이 세게 부딪히며 술이 넘실거렸다. 그만큼 다들 감동에 차 있었다.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말에서 진심을 느낀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성공해낸 것이 후배들의 마음을 자극했다.

민우는 술로 가득 찬 사발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며 느끼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후배들에게 전해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 * *

“형. 오늘 와 주셔서 정말 감사했슴다.”

김성욱은 비틀거렸다. 하지만 실실 웃으며 어떻게든 균형을 잡았다. 민우가 돌아갈 시간이라 2차를 끝내고 다들 밖으로 나왔다.

“다음에 또 한잔하자.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석사 논문 써야 하는 거 잊지 마라.”

“아 형! 진짜 너무하시네. 오늘 같은 날은 논문 같은 거 잊고 실컷 놀아야죠.”

“덧붙여서 현실 도피하지 말고.”

후배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명인대 정문 앞에 세워진 하얀 차를 확인한 민우는 지갑을 꺼내 5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꺼냈다.

“이거 3차에 보태라.”

지폐가 김성욱의 손에 들어갔다. 그가 깜짝 놀랐다.

“아니, 형! 저희를 어떻게 보시고 이렇게 큰돈을…… 이러시면 진짜 감사하죠.”

“하하하하!”

“그럼 다들 재밌게 놀아!”

“조심히 들어가세요오오!”

후배들과 헤어진 민우는 정문에 세워진 흰색 차에 올랐다.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레아는 지적인 미소를 지으며 민우를 맞았다.

“안 오셔도 된다니까 오셨네요.”

“근처에 일이 있어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가는 길에 모시고 가면 좋잖아요.”

“오래 기다린 건 아니죠?”

“저야 기다리는 게 일이죠.”

민우는 안전벨트를 맸다. 몇 잔을 마셨는지 기억도 안 났다. 약간 어지러울 정도니까 소주로 치면 세 병 정도는 마신 것 같았다. 주량이 네 병이니 아직 한 병 정도는 더 마실 수 있었다.

“미안해요. 술 냄새 많이 나죠.”

“술 드셨는데 술 냄새 나는 건 당연한 거죠.”

레아가 기어를 넣고 차를 움직였다. 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수빈인가 싶어 핸드폰을 꺼냈는데, 의외의 사람이었다. 최민식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지?’

민우는 전화를 받았다.

“예, 매형. 무슨 일이세요? 이렇게 늦게.”

― 후배들하고 술 마시고 있다는 얘길 들어서. 안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와, 소문 대박 빠르네요. 지금 막 술자리 끝내고 집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애들은 3차 갔고요.”

― 그렇군. 그나저나 너 그 소식 들었냐? 송현우 선생님 이야기.

“예? 아뇨. 아무 얘기도 못 들었는데. 무슨 일 있으시대요?”

― 그게 말이다.

최민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민우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종국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민우가 되물었다.

“폐암 말기요?”

― 그래. 나도 재환이 형한테 듣고 놀라서 확인해보니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고 하더구나. 근데 진짜 서지훈 선생님이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어?

“예. 조금도 못 들었어요.”

그때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사건들.

이해하지 못했던 사건의 편린들이 하나둘 민우의 머릿속에서 맞춰지기 시작했다.

큰 상을 수상하게 됐는데도 연락이 없었던 서지훈 교수와 송승현 실장.

그리고 오늘, 어질러진 연구실에서 냉정하게 내뱉었던 서지훈 교수의 한마디.

“이건 내 일이다.”

그 말을 곱씹으며 차창 너머를 바라보던 민우의 눈에 총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 듣고 있냐?

“아, 예. 매형. 아무튼 알겠습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 서지훈 선생님 상심이 크실 거야. 보통 관계가 아니라서. 그러니 네가 옆에서 잘 보좌해 드려라.

“예.”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한참 동안 핸드폰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건 내 일이라고 선을 그었던 서지훈 교수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송현우 선생님의 연구물을 정리하시려는 거였구나. 서두르시는 걸 보면 생전에 완성하겠다는 거고. 그런데…… 과연 그게 선생님만의 일일까?’

의문이 커지기 시작하고,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민우가 레아에게 부탁했다.

“차 돌려주세요.”

“네?”

“명인대로요. 어서.”

레아가 고개를 돌려 민우를 바라보았다. 취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엔 집념이 가득했다. 진심이 보였다.

레아는 주저 없이 유턴 신호를 받고 차를 돌렸다.

인문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민우가 차에서 내렸다. 차창이 내려갔고, 민우가 말했다.

“레아 씨.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세요.”

“하지만.”

“아마 오늘 들어가긴 어려울 겁니다.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미안해요. 모처럼 이렇게 신경을 써서 데리러 와 주셨는데.”

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엔 민우와 함께 하는 것이 일이었지만, 요즘은 조금 달랐다. 일 이상의 즐거움이 있었다.

레아가 살짝 묵례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운전 조심하세요.”

차가 사라지자마자 민우가 인문관을 뛰어 올라갔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 서지훈 교수 연구실 앞에 섰다. 문틈 사이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노크한 다음 열쇠로 문을 열었다. 역시 서지훈 교수는 안에 있었다. 그가 살짝 놀라며 책을 덮었다.

“뭐야? 술 마셨으면 얌전히 집에 들어가서 쉬어야지.”

“송현우 선생님 얘기는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매형한테요.”

“녀석,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는군.”

서지훈 교수가 혀를 찼지만 민우는 굽히지 않고 계속 말했다.

“송현우 선생님 선집 편찬하시려는 거죠? 이렇게 무리하시는 거 보니 생전에 완성을 하시려는 거고요.”

서지훈 교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민우가 다가오더니 책상에 널려 있는 자료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내 일이라니까?”

단호한 건 서지훈 교수만이 아니었다. 민우도 그랬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만의 일은 아니죠. 선생님의 선생님은…… 저에게 있어서도 선생님입니다. 그동안 받기만 했는데 이럴 때 갚지 않으면 언제 갚겠어요?”

당돌한 한마디에 서지훈 교수는 할 말을 잃었다. 민우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복잡하게 널린 자료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맙다.”

“간지럽게 왜 그러십니까.”

든든함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서지훈 교수는 어느새 훌쩍 자란 자신의 제자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이다. 기왕 도울 거면 제대로 도와. 제2저자로.”

“영광이네요.”

“좋아. 그럼 어디 한번 제대로 시작해 볼까?”

서지훈 교수도 민우의 옆에서 손을 거들었다. 그날 밤, 연구실의 불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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