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위업을 달성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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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위업을 달성하다 (3)
2022.04.25.
그것은 초대장이었다.
내용이 길지는 않아 민우는 순식간에 다 읽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과 서명이 들어가 있는 맨 마지막 부분에 시선이 멈췄다.
‘장관이 직접 보낸 거네.’
정부 고위인사의 서한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라 왠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다. 2018년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을 축하하는 말과 함께 이번 주 금요일 밤에 국내 번역 유망주들과 함께하는 ‘번역인의 밤’ 행사를 마련했다고 적혀 있었다.
요약하자면, 그 행사에 참여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는 서한이었다.
‘하긴. 문광부에서 지금까지 번역 사업에 투자를 많이 하긴 했지.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그래도 길게 봐야 하는 사업이니까.’
사실 민우는 정부에서 주관하는 번역 사업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아니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업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보통 피칭(pitching)을 열어 외국 업체와 계약을 중계한다. 하지만 <태엽시계>는 지음사에서 직접 폴라베어 북스와 계약을 했다.
그렇다고 민우가 번역가 양성 사업에 참여하여 번역가로 데뷔한 것도 아니고, 안경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을 곁들여 만들어 낸 결과였으니 초대장을 받았을 때 좀 거리감을 느꼈다.
‘왠지 알맹이만 쏙 빼먹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우는 마음이 끌렸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와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번역가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고, 업계 정보도 교환할 수 있을 것이다.
‘좋게 생각하자. 장영한 피디님 식으로 표현하자면 윈윈이겠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장관 만나 보겠어? 참석하는 걸로 하자.’
민우는 초대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때 전화가 왔다. 기다리고 있던 전화라 침대에 편히 드러누워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집에 왔어요?
“지금 막 들어왔어.”
― 들어가자마자 누워 있나 보네.
“헐, 뭐야. 내 방에 CCTV라도 달았나? 어떻게 알았어?”
― 누워서 전화 받으면 오빠 목소리 좀 가라앉는 편이거든. 약간 졸린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미묘한 차이긴 해도 금방 알 수 있지.
“소름 돋네.”
그래도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에 대해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거니까. 민우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 서지훈 선생님이랑은 연락 됐어요?
“아까 오후에 전화하시더라고. 일이 좀 있으신가 봐. 그간 학교에 못 오셨대.”
― 무슨 일인데요?
“글쎄. 말씀을 안 하시네. 목소리도 별로 안 좋아 보이시고…….”
그냥 학교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명인대 국문과 어학 쪽 교수들과 뭔가 충돌이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거기까지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민우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방송은 봤어?”
― 당근요. 생방송인데 안 떨고 잘하던데? 무슨 강의하는 줄 알았어요. 어버버버 해야 재미있는데 말야. 놀릴 거리를 못 찾았네.
“생각보다 그렇게 안 떨리더라고. 그 상황을 즐겼지.”
― 오빠 은근 방송 체질인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카메라 앞에 처음 섰을 때는 긴장이 많이 됐는데,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들떴다.
장영한 PD 덕분이었다. 그가 카메라를 학생이라고 생각하라고 한마디 해줬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이 기회에 방송인으로 전업해 볼까?”
― 오빤 얼굴이 안 되니까 힘들지.
“아아, 그렇지 참. 못생겨서 죄송하네요.”
수빈은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 그래도 독서의 밤에 출연한 게 좀 도움이 되지 않았어?
“도움이 많이 됐지. 아 맞다. 독서의 밤이 있었네.”
― 왜? 무슨 일 있어?
민우는 책상에 놓아둔 편지를 펼쳤다. 거기엔 금요일 오후 6시에 행사가 시작된다고 적혀 있었다.
매주 금요일엔 ‘독서의 밤’ 촬영이 있다. 다행히 행사는 서울에서 열린다. 방송국에서 행사장까지의 동선을 계산해 보니 적어도 오후 5시엔 출발을 해야 했다.
“오늘 문체부 장관님께 초대를 받았거든. 금요일에 번역 관련 행사가 열린다고 해서 거기 가 보려고. 그런데 행사가 촬영하고 겹치네.”
― 장관님이? 와, 잘됐네요. 꼭 가야겠네. 일단 피디님께 연락해서 스케줄 조정해 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관이 보낸 초대장인데 무시하긴 좀 그렇잖아. 분명 오빠가 주인공일 텐데.
‘주인공’이라는 말에 연단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설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벅찬 느낌.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벌써부터 고민되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 스케줄부터 해결을 해야지.’
민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 반. 전화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잠시 고민하다 문득 재미있는 것을 떠올린 민우가 말했다.
“그 전에 윤 씨한테 물어보는 게 좋겠어. 출연자들 중 제일 바쁜 사람이니까 먼저 조정 가능하냐고 물어봐야지. 혹시 연락처 알아?”
― 연락처 교환은 안 했어요. 피디님한테 여쭤볼까?
“괜찮아. 나 알고 있어.”
― 응? 알고 있는데 왜 물어?
“둘이 번호 교환했나 떠보려고 모른 척했지. 울 애기 양심은 있네. 그럼 이따 자기 전에 다시 연락할게. 안녕.”
― 오빠!
민우는 실실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바로 허윤에게 장문의 톡을 보냈다. 사정을 솔직하게 설명했고 녹화 시간을 당겨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오케이였다.
그뿐이 아니라 수상을 축하한다며 선물 쿠폰까지 함께 보내왔다. 영화 쿠폰 두 장이었는데 허윤은 이수빈과 함께 다녀오라고 덧붙였다.
‘의외로 쿨하네. 좋아. 그럼 피디님께는 내일 전화 드리는 걸로 하고.’
책상으로 자리를 옮긴 민우는 전공서를 펼쳤다.
내일 수업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머릿속에 전공지식이 가득 차 있는 그였지만, 늘 가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게 그의 철학이었다.
* * *
명인대학교 입구에 도착한 민우는 레아의 차에서 내렸다. 정문을 지나쳐 들어가는데 못 보던 현수막이 이목을 끌었다.
평소 잘 걸리지 않던 현수막이 정문에 길게 가로질러 있었다.
미소가 걸렸다.
자신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을 알리는 현수막이었다. 국문과가 아니라 대학본부에서 걸어준 것이라 의미가 컸다.
9시 뉴스 출연과 각종 인터뷰, 신문 기사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예전 인문학 강의가 SNS에서 화제가 되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을 알아보았다.
“형!”
310호에 막 들어가려던 차에 석사과정생 김성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 왔냐?”
“오늘 저녁 시간 되심까?”
“너도 많이 컸다. 만나자마자 용건부터 꺼내고. 저녁? 글쎄. 오늘 대전에 강의 갔다가 학교에 있긴 할 건데. 무슨 일 있어?”
“선배 수상 기념으로 저희가 작은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김성욱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마치 빨리 칭찬을 해 달라는 그런 눈빛으로 민우를 바라본다. 민우는 피식 웃었다.
후배들이 이렇게 자리까지 마련해 준다는데 거절하기가 뭐했다.
“알았어. 8시쯤 들르마. 장소 잡으면 연락하고.”
“옙. 그럼 오늘도 고생하십쇼!”
“수고.”
민우는 사물함에서 필요한 것들을 꺼내고 바로 수업에 참여했다. 오늘 오전엔 민영환 교수의 수업이 있었다.
현대소설을 전공하는 모든 박사과정생들이 듣는 수업이었다. 치열한 논쟁이 한바탕 벌어졌고, 민영환 교수가 핵심을 정리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나서야 수업이 끝났다. 다들 지친 얼굴로 짐을 정리하며 자리를 떴다. 물론 민우의 표정만 멀쩡했다.
그는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수빈이 물었다.
“바로 대전으로 가요?”
“그래야지. 오늘 계약하는 날이라 좀 일찍 가야 해.”
“겸임교수?”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앞쪽에 앉아 있던 민영환 교수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새로 생긴 전공이 아니라 국문과로 간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그쪽에서 자리를 잡아도 되겠구나. 한눈팔지 말고 전공실적 부지런히 쌓아라.”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번역이라면 비교문학 쪽으로 연구해 보는 것도 좋겠는데? 그쪽이라면 우리 분야 연구실적으로도 쳐 주니까. 한번 고민해 봐라.”
“네. 선생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사과정 지도교수를 서지훈 교수로 선택해 마음이 언짢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민영환 교수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곤 했다.
‘안 그래도 요즘 번역 쪽에 무게가 많이 실린 느낌이야. 이번 일이 정리되는 대로 학회에 발표할 논문도 좀 써야겠다.’
민우는 바로 대전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촉박해서 오늘은 KTX를 탔다. 기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자신과 관련된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던 도중, 민우의 이목을 끄는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 상아대학교, 박민우 번역가 겸임교수로 초빙. 신설 전공을 위한 큰 투자!
― 상아대학교 국제번역전공. 정부와 협력하여 번역 전문가 양성에 총력을 기울일 계획. 최산호 총장의 중장기 발전계획의 첫 단추.
‘신설 전공을 위한 큰 투자’라는 부분에서 민우는 씁쓸히 웃었다.
‘뭐가 큰 투자라는 거야? 겸임교수 월급이 얼마나 한다고. 전임교수 보장도 못 받았는데.’
박사학위가 없으니 당분간 전임은 어렵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석사학위만 있어도 교수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석박사 100만 명 시대다.
민우는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관련 기사를 더 찾아보았다.
특히 9시 뉴스 특별 초대석에 관한 기사를 찾았다. 기자들이 어떻게 썼냐 보다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burn*** : 아시아 최초? 나는 서버 최초 네임드 킬 칭호 있음 노깝ㅋ
└ 1000*** : 아재요
└ leem*** : 와우하시나요? 어디썹임
└ sbum*** : 아즈샤라 대기번호 뜨네 아
metb*** : 우리 엄마가 이 기사를 보면 안 되는데!!
└ biz3*** : 서른 살에 맨부커라니… 난 서른 살에 뭐 했더라?
└ mg8u*** : 뭐 하긴 쳐 놀았겠지
└ biz3*** : 왜 시비냐? 너 신고
cosm*** : 2016년에 한강 작가가 한번 상 타고나서 번역 붐이 일어나더니 드디어 결실을 맺네. 정부가 놀고만 있는 거 아닌 듯.
└ rain*** : 이번에 상 탄 사람 아카데미 출신 아니라던데? 정부가 끼어들 여지가 있었나?
└ time*** : ㅇㅇ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임
ppal*** : 너님들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데 박민우 저 사람 불어랑 일본어 중국어에 독일어까지 능수능란함. 다른 상 받을 가능성이 앞으로도 많이 열려 있다는. 그래서 더 무서운 신인.
대강 분위기는 이랬다.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가 많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기차는 대전역에 도착했다. 민우는 짐을 챙기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상아대도 급하긴 했나 보네. 아직 계약서에 사인도 안 했는데 보도자료를 낸 걸 보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자신이 계약을 번복하면 정말 큰 파장이 일어나는 일이니까. 상아대가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됐어. 괜히 정치에 휘말리지 말자. 우리 과에서 어떻게 후배들 가르칠까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해.’
민우는 버스에서 내려 상아대로 들어갔다. 대학본부에 위치한 교무과에서 담당 직원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계약을 체결했다.
“직번하고 카드는 발급에 좀 시간이 걸릴 겁니다. 자세한 사항은 제가 메일로 전달해 드릴게요.”
“예,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수상 축하드리고요.”
민우는 기분 좋게 교무과를 나섰다. 이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제자들이 모인 강의실로 갈 차례였다.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 가벼웠다.
* * *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니 저녁 7시가 넘었다. 민우는 310호에서 짐을 정리하고 잠시 서지훈 교수 연구실에 들렀다.
그런데 마그네틱이 ‘퇴근’으로 되어 있었다.
‘요즘 계속 학교에 안 나오시네.’
돌아서려던 민우는 마침 가져가야 할 책을 떠올리고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문을 열었는데, 민우는 흠칫 놀랐다.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책상과 테이블, 소파와 의자에 온갖 인쇄물과 책들이 널려 있었다. 마치 자료 창고에 온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 중심엔 서지훈 교수가 서 있었다.
“선생님 계셨네요?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
서지훈 교수는 보던 책을 덮었다. 얼굴이 초췌하고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아, 책 놓고 간 게 있어서요. 그거 가지러 왔어요.”
“그래.”
민우는 자신의 책을 챙기면서도 무슨 일일까 머리를 굴렸다. 서지훈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무엇인지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료를 벌려 놓을 만한 건 없었다.
그래서 민우가 방을 나서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