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위업을 달성하다 (2)
(1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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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위업을 달성하다 (2)
2022.04.22.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서지훈 교수였지만 갈피를 잡지 못했다. 상황이 좀 심각하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껴졌다.
문득 대학원 시절 송현우 교수가 자신에게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셨던가.’
서지훈 교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기고 있었던 건가, 하는 짧은 상념이 뇌리를 스쳤다.
며칠 전에 만났을 때는 별 이상이 없었다. 계단에서 넘어졌다는 대답을 순진하게 믿었다. 송승현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좀 더 꼼꼼히 살폈어야 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송승현 쪽으로 돌렸다.
“승현아.”
그녀는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다만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조용히 병실을 나설 뿐이다.
우는 모습은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공항에서 기약 없는 작별 인사를 건네던 그때.
“……언제 왔나?”
송현우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지훈 교수는 침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몸을 기울였다.
“방금 왔습니다. 좀 괜찮으십니까? 정말 놀랐습니다.”
“놀라기까지야. 사람이…… 아플 수도 있는 거지.”
송현우 교수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고통스러운지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몸이 예전 같지 않군. 쿨럭!”
기침이 격렬했다.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 서지훈 교수는 너스 콜을 누르려고 했는데 송현우 교수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그제야 기침이 멈췄다.
“말씀은 그만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됐네. 어차피 누가 뭐라고 해도…… 곧 하지 못하게 될 목숨이야.”
송현우 교수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서지훈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송현우 교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함께 해 온 세월이 적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깨닫고 조용히 입술을 뗐다.
“폐암 말기네.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늦었어. 온몸에 전이가 되었지. 3개월 남았다고 하더군.”
“치료를 왜 받지 않으신 겁니까? 승현이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던데요.”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게 싫었네. 사람답게 살다가 사람답게 가야지. 자연으로…….”
서지훈 교수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흔 살도 안 된 나이였다. 이대로 보내기에는 스승이 이뤄 놓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왜냐고 따지지 못했다.
송현우 교수는 자신보다 늘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이니까. 그의 선택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존중해줄 수밖에 없었다.
“재미없는 병 이야기는 그만하지. 학교에는…… 별일 없나?”
“박민우 선생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습니다.”
흐뭇하게 웃은 송현우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짐작하기라도 하듯이.
“이제 자네도 좀 마음을 놓을 수 있겠군. 자신의 모든 것을 전해 줄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 정도면 자격이 충분하지 않나?”
“아직 멀었습니다. 좀 더 혹독하게 가르쳐야죠. 선생님도 예전에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가볍게 기침을 두어 번 한 송현우 교수가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서지훈 교수와 눈을 마주쳤다.
송현우 교수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두 가지.”
“말씀하십시오.”
“내 저술들을 하나의 책으로 편찬해 주게. 자네만 한 적임자가 또 없군. 언젠가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어.”
“안 그래도 조금씩 준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크게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송현우 교수가 씨익 웃었다. 서지훈다운 대답이었다. 그는 늘 준비가 철저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송현우 교수의 학문적 정수를 모두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학자의 일생을 정리할 자격이 충분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거야. 하지만 자네라면 해낼 거라고 믿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송현우 교수가 힘겹게 입을 움직였다.
짧은 한마디를 들은 서지훈 교수는 씁쓸히 웃었다. 힘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유쾌하지는 못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선생님. 푹 쉬시고 무리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자주 오진 말게. 바쁜 사람이.”
인사 대신 스승의 손을 꼭 잡은 서지훈 교수가 병실을 나섰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송승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너스 스테이션에 들러 상황을 전한 그는 본관을 나서 정원을 둘러보았다. 휠체어를 탄 환자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서지훈 교수는 화단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왠지 그곳에 있을 것 같았는데 정답이었다. 송승현은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선생님 깨어나셨다.”
서지훈 교수가 그녀의 옆에 앉으며 한마디 던졌다. 그러나 묵묵부답. 아무래도 충격이 큰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일찍 세상을 떴으니까. 외동이었으니 송현우 교수마저 타계한다면 혼자가 되는 것이다.
“곁에 있어 드려. 지금 선생님께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치료잖아.”
“다…… 들었어요?”
“그래.”
“치료 안 받으신대요.”
“그것도 들었어.”
송승현이 고개를 홱 돌렸다.
“뭐라고 대답했어요? 치료받으시라고 설득해 봤어요?”
“딸도 하지 못한 걸 내가 어떻게 해? 분하고 억울하지만. 선생님의 뜻이니.”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솔직한 감정이 실렸다. 그랬기에 송승현은 따지지 못했다. 그 또한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것이다.
그녀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10년 넘게 아버지를 외면하면서 살아왔어요. 정말 하찮은 일로요.”
“그게 왜 하찮아? 큰일이었지.”
두 부녀의 사이가 틀어진 건 민영환 교수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 간 것을 아버지가 묵과했던 게 발단이 됐다.
그래서 유학을 결심하게 됐고, 귀국한 이후로도 분가하여 아버지와 담을 쌓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이나 기념일에도 찾아가지 않았다.
그게 해일처럼 후회가 되어 몰려와 눈물로 흘렀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유학도 가지 않았을 거구, 아버지께 좀, 살갑게 대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지나간 일은 잊어.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금쪽같이 쓰면 되는 거야. 남은 시간을.”
서지훈 교수는 손수건을 꺼내 엉망이 된 송승현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아버님이 두 가지 부탁을 하셨어.”
“어떤…… 부탁이요?”
“일생의 저술을 책으로 묶는 거. 편찬은 내가 맡아야 할 것 같아. 그러니 기획은 네가 해. 지음사에서 책을 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송현우라는 학자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그 어떤 출판사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책이 완성되면 무덤에 하나 갖다 달라고. 하지만 난 그러지 않을 생각이야.”
“네?”
“삼 개월 안에 모든 걸 끝낸다. 그리고 살아계신 아버님 손에 쥐여드리는 거야. 그게 내 목표다.”
송승현이 깜짝 놀랐다.
아버지의 저술은 논문과 단행본, 칼럼 등을 모두 포함하면 수백 개가 넘는다. 자료를 정리하는 것은 물론, 편찬하는 것도 어림잡아 이삼 년은 걸렸다.
그런데 그걸 삼 개월 안에 해내겠다고 나섰다. 송승현도 문학을 전공하고 출판업계에서 경력을 오래 쌓은 사람이었다.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서지훈 교수의 태도는 진지했고, 그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이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것은 그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허황된 말을 하면서도, 그걸 현실로 바꾸는 능력이 있는 천재가 바로 그였으니까.
“그러니까 빨리 기운 차려서 출판기획서 써.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정말 가능하겠어요?”
서지훈 교수가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내가 언제 실없는 이야기 떠들고 다니는 거 봤어? 시간이 늦었군. 어서 병실로 돌아가 봐. 아버님 기다리시겠다.”
“잠깐만요!”
송승현도 따라 일어섰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이 다시 마주했다.
“아버지가 두 가지 부탁을 하셨다고 했잖아요. 나머지 하나는 뭐예요?”
“그건…… 천천히.”
손을 들어 보인 서지훈 교수가 공원을 빠져나왔다. 대로로 이어진 내리막길을 걸으며 그가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통화목록을 터치했다.
여러 리스트 중 하나를 주목했다. 아까 민우에게 받은 전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녀석이 도와준다면 조금 더 수월할 텐데.’
조금이 아니었다.
학부 시절부터 손발을 맞춰 온 사이였다. 1할, 아니 적어도 3할 정도의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를 맞이했어. 괜히 내 일로 방해할 수는 없지.’
병원을 나서는 서지훈 교수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 * *
그날 밤, KBC 9시 뉴스에서는 생방송으로 특별 초대석 코너가 진행되었다. 스태프와 카메라의 초점이 한 곳을 주목했다.
그곳엔 민우와 김영화 작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렇게 자리해 주셔서 감사하단 말씀 먼저 드립니다. 두 분, 모두 수상 축하드립니다!”
두 주인공이 가볍게 묵례했다. 젊은 아나운서가 미소를 지으며 본격적으로 코너를 시작했다.
“이번 수상 발표는 작년과는 달리 공식 홈페이지에 수상 사실을 게시했는데요. 결과를 들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김영화 작가님.”
“아, 장난인 줄 알았죠. 누가 장난을 친다고. 소설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습니다.”
갈색 베레모와 긴 턱수염이 인상적이었다. 딱 봐도 작가라는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그렇게 남자 아나운서는 잠시간 김영화와 대화를 나눴다.
“역시 박민우 씨도 마찬가지셨겠죠?”
“그렇죠.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여기저기서 연락이 와서 당황스럽기도 했고요.”
민우가 소탈하게 대답했다. 생방송이라 조금 긴장되긴 했지만 ‘독서의 밤’ 코너에서 방송을 경험한 게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역시 민우 씨의 수상은 기념비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번역가 수상은 아시아 최초입니다. 소감이 어떠신지.”
“최초라는 수식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문학이 세계에서도 통한다는 가능성을 본 것으로 만족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나운서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영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전공은 국문학인데 말이죠. 문학을 전공한 게 번역에 도움이 좀 되었습니까?”
“도움이 되긴 했지만 크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문학적 감수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문학도 예술이니까요. 작곡을 배우지 않아도 음악을 들을 때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번역도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저와 잘 맞는 작품을 찾은 거고, 또 그만큼의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작가와 번역가가 공평하게 받는 상인데, 뭔가 김영화 작가님께만 공을 몰아주시는 느낌이네요.”
민우가 멋쩍게 웃었고, 김영화 작가는 직접 나서 민우의 공을 챙겼다. 그는 진심으로 민우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민우 씨에게 하나 더 여쭙고 싶네요. 소설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이 잘못 온 거 아닌가요? 김영화 작가님께 가야 할 질문인 거 같은데.”
민우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문학도이자 번역가로서 하고 싶은 말 정도는 있었다. 그래서 바로 말을 이었다.
“소설이란 말 그대로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국경과 문화를 초월하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 소설이죠. 하지만 다른 언어로 쓰였을 때 간극이 생기고 맙니다. 그 간극을 좁히기는 쉽지 않죠. 그것을 좁히는 것이 바로 번역가의 책무가 아닐까 합니다.”
민우가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 당찬 모습이 카메라를 타고 전국으로 송출되었고, 그것이 또 다른 파장을 만들고 말았다.
방송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민우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전달받았다. 오후에 등기로 온 것이라고 했다.
겉면을 보니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온 편지였다.
‘왜 왔지? 번역 사업이라도 하려나?’
막연한 생각과 함께 봉투를 뜯어 내용을 살펴본 민우는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