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 위업을 달성하다 (1) (191/500)


191. 위업을 달성하다 (1)
2022.04.21.


― <태엽시계>가…… 2018년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민우 씨도 상을 받게 됐어요. 번역가로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민우 또한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릴 정도였다.

― ……여보세요? 듣고 계시죠?

“아, 예. 듣고 있습니다.”

민우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평소라면 꿈이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 그에겐 그 상을 받을 만한 충분한 실력이 있었으니까.

“오빠!”

거실에서도 한바탕 소란이 났다.

이수빈이 수상 소식을 접한 모양이었다. 그 상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최민식도 수빈과 함께 민우의 방으로 뛰어왔다.

“<태엽시계>가 됐대! 지금 섭이 오빠한테 링크 받았는데 네이비 메인에 올라왔어!”

“짜식. 해냈구나!”

싱긋 웃은 민우는 검지를 입에 댔다. 아직 통화가 끝나지 않았다. 민우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고 싶은, 아니 해야 하는 말을 꺼냈다.

“고 과장님.”

― 예.

“정말, 과장님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고…… 지금까지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사실 기회를 준 것은 송승현 실장이었다.

하지만 실무자로서 모든 작업을 도맡은 것은 고두열 과장이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해도, 가장 먼저 인사를 받아야 하는 건 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우는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했다. 그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웃음소리가 들렸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전 처음에 민우 씨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앨런 씨와 클로에 씨가 샘플을 평가할 때도 김태현 씨의 번역본이 선택될 줄 알았지요.

“그러셨군요.”

― 결과에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잘 안 될 거다.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었죠.

짧은 탄식과 함께 말이 끊겼다.

고두열 과장은 자신의 허물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민우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더욱 집중했다.

― <태엽시계>가 출간된 이후로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제 눈으로 민우 씨의 실력을 확인하고도 계속 의심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습지요? 만약 민우 씨가 이번에 수상하지 못했더라면…… 저 스스로가 저지른 실수를 깨닫지 못했겠지요. 여전히.

“괜찮아요. 이해합니다.”

― 민우 씨.

“그땐 경력도 일천하고 나이도 어렸으니까요. 제가 과장님 입장이어도 그런 의심을 했을 거예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책상에 놓인 파일을 열었다. 그 안엔 얼마 전 지음사에서 보낸 번역 후보작이 인쇄되어 있었다. 모두가 신인들의 작품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운을 뗀 민우는 후보작 중 가장 마음이 갔던 작품을 집었다. 그의 눈이 제목에 고정되었다.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았잖아요? 벌써부터 그러시면 곤란하죠. 과장님. 내년엔 이은 작가의 <무인도>로 가시죠. 이 작품이라면 해볼 만할 것 같습니다.”

― 벌써 고르신 겁니까?

“촉이 왔어요. 아주 강렬하게.”

― 하하하.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 주셔야 하는 일이 하나 있네요.

“무슨 일이요?”

민우가 묻자 고두열 과장은 평소 듣기 힘든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 시상식 가셔야지요! 항공권은 주최사에서 제공할 예정이고, 기타 편의 사항은 저희 지음사에서 모두 부담하겠습니다. 가볍게 여행한다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럼 쉬십시오.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민우는 가족들과 기쁨을 나눌 여유도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연락이 왔다. 덕분에 한참이나 핸드폰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 * *

‘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자정이 지나서야 연락이 좀 뜸해졌다. 핸드폰이 터질 것 같이 뜨끈뜨끈했다.

그 사이 이수빈과 누나 내외는 집으로 돌아갔다. 안방은 조용했다. 어머니는 전화로 친척들에게 한참 자랑을 하다 잠든 모양이었다.

민우는 침대에 누워 통화리스트를 쭉 스크롤 해 보았다.

‘총 서른두 통. 많이도 했네.’

전화가 그 정도였고, 톡과 문자는 셀 수도 없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도 몇 개 있었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축하하거나 배 아파하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였고, 한진섭과 서강일 정도가 후자였다. 물론 두 사람도 민우의 든든한 우군이었다.

상아대와 명인대 사람들도 축전을 보내왔다. 그간 격조했던 이재환에게도 연락이 왔고, 강예진과 정연주도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한때 좋은 추억을 공유했던 지음사와 라온북스 직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장철호 주임과 정은아 대리가 너무 당당하게 밥을 사라고 말해 언제 빚을 졌나 싶었다. 현기혁 팀장과 이유리는 진지하게 영국 진출 이야기를 꺼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축하의 물결은 해외에서도 이어졌다.

소르본의 랑느 박사는 친히 전화했고, 그의 제자인 미셸은 매번 통화 중이라는 불평이 담긴 메일을 보냈다. 센트럴 북스 편집장 제임스도 유쾌한 목소리로 한바탕 떠들었다.

몸은 좀 지쳤지만 마음은 들떴다. 조금 새삼스럽긴 해도 지금까지 참 많은 인연들을 만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건 어쩐다…….’

민우는 부재중 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번호로 열두 통의 전화가 찍혀 있었다.

주인공은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였다.

그녀는 새벽이라도 관계없으니 인터뷰를 해 달라고 장문의 문자까지 보내 놓은 상황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연락이 많이 올 거야. 매스컴 쪽은 누군가 대신 관리를 해 줬으면 하는데…… 아, 레아 씨가 있었지?’

프로젝트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일이긴 해도 스케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민우는 날이 밝는 대로 레아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결코 지나친 반응이 아니었다.

민우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게 되었으니까. 작가가 아닌 번역가로서 첫 번째였다.

민우가 영어권 국가 출신이라면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겠지만 그는 한국인이었다. 그럼에도 영어의 본고장을 감동시켰다.

충분히 이슈가 되고도 남을 만했다.

‘그나저나 선생님은 연락이 없으시네. 전화도 안 받으시고.’

서지훈 교수는 연락이 없었다. 외출 중이라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 싶어 민우가 먼저 전화를 해 보았는데, 그는 받지 않았다.

송승현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도 축하 메시지는 없었다.

‘송 실장님은 관계자라 소식을 바로 들으셨을 텐데. 뭔 일 있으신 건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중 축전을 보내지 않은 것은 두 사람뿐이었다.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민우는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들뜬 기분 탓인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결국 민우는 책상에 멍하니 앉았다. 그러다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렸다.

‘잠깐. 혹시…….’

민우는 가방에서 루카치의 유품을 꺼냈다. 안경은 쓰고 만년필은 손에 쥐었다. 마지막으로 서랍에서 유고를 꺼내 펼쳤다.

‘학문적인 성취가 있을 때마다 유고의 뒤 내용이 보였어. 맨부커상 수상도 하나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면…….’

뒤 내용이 보일 것이다.

그런 추측을 하며 민우는 빠르게 유고를 넘겼다. 곧 마지막 페이지가 나왔고, 빈 페이지를 확인한 민우가 전율했다.

‘보인다!’

환영처럼 꿈틀거리는 글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민우는 페이지를 가늠해 보았다. 족히 열 페이지는 넘어 보였다.

민우는 주저하지 않고 만년필을 움직였다.

서걱서걱.

새벽 늦게까지 종이 위로 펜촉을 휘갈기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 * *

다음 날, 민우는 지음사 방문을 위해 레아의 차에 올랐다. 유고를 이어 씀으로 인해 한 단계 성취를 이뤘지만, 잠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 그런데 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잠을 좀 못 잤어요.”

“그럴 만도 하죠.”

평소보다 레아의 미소가 더욱 싱그러웠다. 수상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바로 전화해 민우에게 축하를 건넨 그녀였다.

민우가 안전벨트를 매자 레아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기분은 어떠세요? 이제 정말 유명한 분이 되셨는데.”

“좋긴 한데 좀 피곤하네요. 귀도 아프고. 전화를 너무 많이 했어요. 아침에도 계속 전화가 오더라고요.”

“후훗.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명언도 있죠.”

민우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피할 수 있는 건 좀 피해 봐야죠. 그래서 말인데,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물론이죠. 매니저님을 돕는 게 제 임무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일단 매스컴 쪽 스케줄 관리를 해 주세요.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엄청 오고 있는데…… 레아 씨 번호를 남겨도 괜찮을까요?”

레아는 엘리트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경험이 풍부한 비서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다.

“우선순위대로 스케줄 잡겠습니다. 가능하면 매니저님께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고마워요.”

“그리고 센트럴 북스 측에 매니저님의 특별 휴가를 요청해 놓았습니다.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는 좀 여유가 없으실 것 같아서요.”

“레아 씨가 있으니 든든한데요?”

민우는 하품을 하면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리곤 매스컴 쪽에 레아의 번호를 남겼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잠든 민우를 태운 차가 지음사 사옥에 도착했다.

“매니저님. 도착했습니다. 매니저님?”

민우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아, 깜짝 잠들었네요.”

“정말 맛있게 주무시던데요? 전화가 계속 오는 거 같아서 전 여기서 잠시 업무 좀 보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차에서 내린 민우는 곧장 출판기획실로 올라갔다. 직원들이 모두 일어서 민우를 맞았다.

“축하드려요. 민우 씨!”

“이거 받으세요.”

싱싱한 꽃다발이었다.

그러다 문득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전남규 차장에게 물었다.

“근데 송 실장님은 안 나오셨나요?”

“오늘 급하게 휴가를 쓰셨습니다. 한 며칠 못 나오실 것 같답니다. 집에 좀 일이 있으신 모양이에요.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예, 그게…….”

그때 15층 입구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누군가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최무진 전무의 모습도 보였다.

“회장님 오십니다!”

지음사의 백지음 회장이 나타났다. 복스러운 인상의 노인이었는데, 풍채가 좋았다. 그가 민우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이거 진즉 좀 뵐 걸 그랬습니다. 얘기를 듣기만 하고 실천에 옮기질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누가 먼저가 중요한 건 아니지요. 이렇게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안 그렇습니까?”

한편 최무진 전무는 민우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를 회사로 데려오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백지음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우리 박 선생께서 위업을 이루셨군요. 회사는 물론이고 한국 문단의 쾌거이자 자랑입니다. 특히 국내 번역 사업이 한 단계 도약할 것 같군요. 허허! 사설이 길었군. 자, 같이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좀 나누시지요. 할 말이 많습니다.”

할 말은 많다고 했지만 실제로 들어보니 별로 영양가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나마 생산적인 이야기는 스카우트 제의였다.

당연히 민우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때마침 상아대 겸임교수로 임용이 된 덕에 그 핑계를 대니 백지음 회장도 더는 밀어붙이지 못했다.

약 한 시간을 담소로 보낸 민우는 14층에 들러 인문사회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김영화 작가님은 이따 저녁에 따로 만나기로 했고. 이제 명인대로 가서 선생님들께 인사 좀 해야겠다. 돌아다니는 것도 일이네. 일.’

민우가 차에 올랐다.

마침 레아는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대단히 사무적인 목소리라 절로 귀가 기울어졌다. 업무 관련 전화인 것 같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그 시간에 스케줄 잡겠습니다. 변동사항 있으면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었다. 레아가 시동 버튼을 누르며 기어를 넣었다.

“어디 전화예요?”

“KBC 9시 뉴스 초대석에서 출연 요청이 왔습니다.”

“……네?”

“KBC 9시 뉴스요. 모르세요?”

“아니, 그게.”

민우는 잠시 롤러코스터에 앉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9시 뉴스라니. 스케일이 커져도 너무 커진 듯한 느낌이었다.

* * *

“어떻게 된 거야?”

병실로 들어온 서지훈 교수가 조용히 물었다. 송승현 실장은 고개를 떨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송승현.”

대답은 없었다.

한숨을 내쉰 서지훈 교수가 침상을 바라보았다. 두 눈으로 보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송현우 교수가 산소 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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