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 승부수 (2) (190/500)


190. 승부수 (2)
2022.04.18.


침묵은 길지 않았다.

“의지라.”

최산호 총장이 짧게 중얼거렸다.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웃는 것인지 찡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묘한 표정이었다.

“듣기 좋은 말이군요. 젊음이 느껴집니다.”

“물론 학계 선배님들에 비하면 어립니다만, 철없는 제안을 드린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뭐랄까…… 열정이라고 할까요? 사실 그 나이의 연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하지요. 내가 학계를, 대학을, 세상을 바꿔 보겠다. 이 손으로.”

오른손을 한번 쥐었다 펴더니 돌연 빙긋 웃었다.

최산호 총장은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등을 소파에 기댄 채 맞은편 천장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어느새 회한에 젖어 있었다.

민우는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최산호 총장은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기엔 총장님도 포함되는 겁니까? 한때 교직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워낙 오래전 일이라서.”

그는 대답을 흘렸다.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으로 손을 뻗을 뿐이다.

“어쨌든 우리의 대학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바꾸지 못했지요. 앞으로도 더욱 어려워질 것은 자명한 사실.”

엄숙한 선언에 이어 그의 입에서 한숨이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아까 박 선생의 표현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은 자본에 잠식되고 있지요. 취업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는 표현도…… 이제는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듣는 말들입니다. 단기간의 성과를 중시하는 기업형 조직이 될 가능성이 크지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크다는 것 정도는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총장님. 제가 드리는 말씀은…….”

“압니다.”

최산호 총장이 손을 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우는 입을 다물고 한발 물러섰다.

“알아요. 그냥, 딱 한 가지만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박 선생의 선배들이, 선학들이 그렇게 못나지 않았다는 것만 말이죠.”

달칵.

최산호 총장이 다기를 가볍게 접시에 놓았다. 그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민우를 바라보았다.

“현실에 타협하고 둥그렇게 무뎌져야만 하는 게 본인의 선택으로만 되는 건 아니니까요. 때론 파도가 몰아치고…… 낭떠러지 앞까지 몰리게 되는 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직 어려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인생이라면.”

민우는 말을 멈췄다.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지금 이 눅눅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렵다.’

최산호 총장의 한마디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것을 떨쳐내기엔 경험이, 연륜이 부족했다.

인간답지 않은 삶이라는, 그런 교과서적인 답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민우가 말을 겨우 이었다.

“그런 게 인생이라면 왠지 좀 슬플 것 같네요.”

“하하하하!”

최산호 총장이 크게 웃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터진 웃음이라 민우는 살짝 놀랐다.

최산호 총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의 입에서 그럴듯한 이상론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 점이 최산호 총장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본인 스스로 의지가 있다고 했으니 한번 지켜보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좋아요. 박 선생을 국문과 겸임교수로 초빙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장님.”

“다만. 전임교수 임용 건에 대해서는 나도 확답을 할 수 없겠군요.”

민우는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인문대의 존속 여부는 불투명하다. 당장 통폐합 논의에 들어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별로 없다. 전임교수의 숫자를 줄이는 건 당연한 수순.

‘하지만 그건 대학 총장 자리도 마찬가지겠지. 재단이 뒤에 버티고 있는 한…….’

시대가 변하며 모범적인 교육자의 모습에서 행정가 혹은 기업가에 가까운 면모를 보이는 총장들이 늘어가고 있다. 운영자금 확보 능력을 최우선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솔직하게 확답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해 주시는 게 고맙네. 이 정도면 충분해.’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것이었다. 일단 국문과 겸임교수로 임용되는 목표를 달성했으니 상념을 털었다.

“확답을 해 주시진 않으셔도 됩니다. 오누스 프로밴디(onus probandi). 입증의 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죠. 저 스스로 가치를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기대하지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민우가 꾸벅 인사하고 총장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최산호 총장은 창가로 움직여 밖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학생들이 저마다의 목적지로 걸어가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학생들이 향하는 곳이 과연 올바른 길인가?’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일상이었다. 하지만 민우의 한마디가 무언가를 바꿔 놓았다. 자리로 돌아온 최산호 총장이 인터폰을 눌렀다.

「예, 총장님.」

“교무처장 올라오라고 해요. 지금 바로.”

「알겠습니다.」

의자에 편히 앉은 최산호 총장이 인쇄물을 집었다. 민우의 프로파일이 정리되어 있는 자료였다. 그는 내용을 차분히 눈에 담았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겠다는 당당한 민우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앞으로 이 이력서에 어떤 경력이 추가가 될지 기대해 보지요. 박민우 선생.”

최산호 총장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눈앞에 민우가 있다는 듯이.

* * *

“얘기는 잘 풀렸냐?”

“예. 총장님께서 국문과 겸임교수로 임용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군. 그래도 너무 긴장 풀고 있지 마. 막판에 뒤집힐 수도 있으니까.”

“뒤집힌다고요?”

민우가 되묻자 담배를 입에 문 서지훈 교수가 씁쓸히 웃으며 라이터를 당겼다.

“총장님이 채용하겠다고 했으니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재단에서 태클을 걸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교원인사위원회를 통과해야 하거든. 요즘 대학들이 어려우니 합격 통보를 받고도 번복되는 사례도 있어. 임용장 받기 전까지는 안심하지 마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교수 안 해도 먹고살 만하잖아? 안 되면 공부에 집중하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받아들여. 내 일도 좀 도와주고 말이다. 주예린 고 녀석도 요즘 원고 쓴다 뭐 한다 바쁘다고 코빼기도 안 비추고 말이야. 이래서 제자들 키워봐야 소용이 없다니깐.”

서지훈 교수가 웃으며 연기를 내뿜었다. 덕분에 민우의 마음이 한결 놓였다.

맞는 말이다. 안 되면 공부나 하면 된다. 굳이 교수직에 목맬 필요는 없었다.

“근데 조성진 선생님은 별말씀 없으셨고?”

“좋아하시더라고요. 생각 잘했다고. 다른 선생님들도 뵙고 왔는데 다들 반겨 주셨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비전임이라도 한 명 더 있는 게 과에 도움이 되니까. 무엇보다도 자대 출신이기도 하고. 금의환향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

그때 진동이 울렸다.

민우가 먼저 주머니를 뒤졌는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이어 서지훈 교수가 액정을 확인하더니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이 바쁜 시간에.”

여자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지음사 송승현 실장의 전화인 것 같았다.

요즘 종종 회사에서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둘이 연애하는 것 같다는 장철호 주임의 톡이 떠올랐다.

‘두 분도 잘되셨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서지훈 교수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뭐라고?”

핸드폰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민우를 힐끗 바라본 서지훈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직이 말했다.

“일단 내가 그쪽으로 갈게.”

전화를 끊은 서지훈 교수는 옷걸이에서 재킷을 꺼내 걸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 민우도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외출하세요?”

“일이 좀 생겼다. 오늘 못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연구실 지키고 있지 마. 가서 볼일 봐라.”

“예, 알겠습니다.”

서지훈 교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연구실을 나섰다. 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증이 들었지만 답을 알 수는 없었다.

* * *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후, 민우는 상아대학교 교원인사위원회로부터 초빙 확정 통보를 받았다.

민우는 즉시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다. 역시 가장 기뻐한 건 어머니였다.

“그럼 우리 아들 이제 교수된 거야? 응?”

“아니. 교수는 아니고 강사랑 비슷한 거야.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방학에도 월급 받는 강사?”

“그래도 대단한 거 아니니?”

“엄마 아들 원래 대단했습니다. 하하핫.”

“까분다.”

보다 못한 박민아가 일침을 날리자 민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때 대악마로 불렸던 사람이었다. 잔소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박 교수님? 거기 고기 타는데 좀 잘 뒤집으시죠. 배 속에 있는 조카에게 탄 음식을 먹일 생각이 아니라면.”

“넵.”

민우가 재빨리 집게를 놀렸다. 평소라면 한마디 대들었겠지만 조카를 먼저 생각했다.

치이이익―

불판 위에서 고기가 잘 익어갔다. 오늘은 민우의 임용을 축하하기 위해 누나와 최민식이 집에 들렀다. 오랜만에 모여 삼겹살을 먹는 중이다.

최민식이 소주병을 쥐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우리 처남 구박해서 되겠어? 자, 한 잔 받아라! 축하한다.”

민우가 잔을 두 손으로 들었다. 최민식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환하게 웃으며 술을 따랐다.

“장모님. 겸임교수가 말입니다. 강사 대우긴 해도 정말 대단한 겁니다. 보통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을 받아야 초빙되는 거거든요. 다른 곳도 아니고 대학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거지요.”

“그렇지. 뭐. 동생은 슬슬 치고 올라가는데 누구는 만년 시간강사네.”

“얘. 최 서방이 뭐가 어때서 그러니?”

“엄마는 참, 나랑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농담도 구분 못하남?”

“하하하. 장모님. 저희는 집에서 늘 이렇게 놀아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최민식은 웃어넘겼다. 같이 살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누나만의 애정 표현을 잘 캐치한 것 같았다. 민우가 웃으며 매형의 빈 잔을 채웠다.

“아직 좋은 소식 없으세요?”

“이번 학기는 텄고 다음 학기 준비 중이야. 경문대에 초빙교수 자리가 났다고 해서 서류 좀 넣어볼까 생각 중이다.”

“경문대라면…… 재환 선배 계신 곳이죠?”

“그렇지.”

“선배님이 끌어주면 잘 풀릴 수도 있겠네요.”

“모르지. 요즘 워낙 구직자들이 많아서. 그나마 우리 과는 좀 나아. 해외파랑 경쟁 안 해도 되잖아. 공대 쪽은 어마어마하다던데.”

“그쪽은 국내 박사로는 어림도 없다던데요.”

그때 벨소리가 들렸다. 올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민우가 나가 현관을 열었다. 이수빈이 숨을 몰아쉬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늦었지? 미안. 바로 왔는데 차가 너무 막혔어. 휴우.”

“고생했네. 지금 막 시작했어. 들어 와.”

“잠깐. 이거 선물.”

수빈은 백화점 쇼핑백을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상자가 들어 있었는데, 뭔지 감이 서지 않았다.

“뭔데?”

상자를 꺼내던 민우가 겉면에 써진 브랜드를 보곤 흠칫 놀랐다.

“시계?”

“이제 교수님인데 그럴싸하게 보여야죠.”

“누가 들으면 전임교수 된 줄 알겠다.”

꽤 유명한 브랜드였다. 좀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비싼 것이었다. 민우는 상자를 꺼내 슬쩍 열어보았다.

“이거…….”

민우는 은빛 시계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전에 지나가듯 마음에 든다고 말했던 시계와 똑같은 물건이 상자에 놓여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어?”

“당연하죠. 오빠 일은 내 일이기도 하니까.”

시계보다 그 한마디가 더 감동이었다. 민우는 상자를 품에 안았다. 이걸 또 어떻게 갚아줘야 하나. 걱정이 되면서도 마음이 들떴다.

그때 수빈이 코를 킁킁거렸다.

“근데 고기 구워요? 맛있는 냄새 난다.”

“삼겹살. 어서 들어 와.”

“와아!”

수빈은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야무지게 인사하며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민아와는 원래 친했고, 민식과도 학부 선후배 사이였으니 어색함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족들이 TV 앞에 모였다.

과일을 먹으며 그간 밀렸던 이야기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최근 화제는 역시 방송 출연이었다. 수빈은 방송국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꺼내며 웃음을 자아냈다.

그때 민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는 아니었다. 톡이 여러 개 오는 듯한 빠른 진동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민우는 신경 쓰지 않고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진동은 계속 울렸다.

‘아, 뭐야? 누가 단톡방에 초대라도 했나? 주예린 이게 쓰라는 글은 안 쓰고.’

민우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었다.

“어?”

뭔가 이상했다. 단톡방이 아니었다. 친구들에게서 톡이 잔뜩 와 있었다. 민우가 확인하는 도중에도 톡은 계속 쌓였다.

― 될 놈은 된다더니… 더러운 세상

― 됐고 언제 쏠 거야?

― 와 지금 뉴스에 떴다 ㅋㅋㅋㅋㅋ 개신기해

― 네 친구라는 게 자랑스럽다

― 박 선생님! 소식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 교수님~ 수상 기념으로 다음 주 휴강요>_<

― 존경합니다 선배님 제 차기작도 잘 부탁드립니다 (굽신)

“어?”

민우는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러나 곧이어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민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결국 해내셨군요. 민우 씨. 정말…… 정말 축하드립니다.

지음사의 고두열 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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