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 승부수 (1) (189/500)


189. 승부수 (1)
2022.04.15.


민우의 특별 출연 덕인지, 아니면 이수빈의 활약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독서의 밤’의 시청률이 약 2퍼센트나 올랐다는 것. 다시보기 비율도 평소보다 세 배가 늘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장영한 PD의 목소리에서 활력이 느껴졌다.

「비인기 교양 프로그램에서 시청률 2퍼센트가 올랐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허허허! 이번 주에 회식 한번 가시죠?」

“예. 안 그래도 전에 윤 씨가 자리 만들어 준다고 하기도 했고요. 더는 거절을 못 하겠네요.”

「아무튼 말입니다. 시청률을 떠나 프로그램이 보다 풍부해졌다는 게 중론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고정 출연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

“고정이요?”

레아의 차를 타고 일산으로 이동하던 민우는 웃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생각보다 제안이 빨리 왔네요. 사실 별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요.”

「이번에 인터넷에서 이슈가 돼서 눈여겨보는 곳이 좀 생겼을 겁니다. 아마 이수빈 선생께는 여러 제안이 갔을 걸요?」

실제로 여러 기획사와 방송사에서 이수빈과 접촉을 시도했다. 일반인인데도 얼굴이며 몸매며 어느 하나 꿀리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빈은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타협의 여지도 없이. 전공과 관련이 없는 프로그램엔 출연하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입장이었다.

그게 자신에 대한 배려라는 걸 민우는 잘 알고 있었다.

“수빈이랑 제가 같나요. 전 발에 치일 정도로 흔한 사람인데.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요.”

「아뇨, 아닙니다!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푸근한 인상에 저음이 매력적이라는 평이 자자하던데요? 곧 민우 씨 팬카페도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하하하. 너무 앞서가신 느낌이네요.”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팬카페가 생기면 어떤 기분일까. 민우는 잠시나마 공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곧 장영한 PD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저는 묵혀두고 시간 끄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계약은 가능하면 빨리 진행했음 하는데.」

“고정으로 출연한다고 해도 촬영 스케줄은 지금과 크게 달라지는 건 없죠?”

「물론이죠.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금요일에 녹화가 될 겁니다. 가끔 출연자들 스케줄 때문에 당겨지거나 미뤄지긴 하지만 그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죠. 사전 협의를 하니까.」

“그럼 하겠습니다. 계약은 언제 하면 될까요?”

「이번 주 촬영 오실 때 겸사겸사하시죠. 저희가 공영방송사다 보니 많이는 못 드려도…… 음. 서운하지 않게 여러모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시죠? 윈윈.」

출연료 부분에서는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덤으로 얼굴도 알리고 말이다.

민우가 말했다.

“출연료 때문에 나가는 건 아니니 크게 상관없습니다. 피디님이 알아서 잘해주시겠죠. 아무튼 그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옙. 또 연락드리지요.」

전화가 끊겼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레아는 눈치껏 무슨 일인지 파악했지만, 뒷좌석에 앉아 있던 주예린은 그렇지 못했다.

조수석이 막 흔들렸다.

“왜요? 왜요? 고정 계약하재요?”

“응. 그렇게 됐다.”

“세상에…… 인터넷에서 반짝 뜨고 말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중파까지 출연을 하다니. 내가 아는 박민우 선배 맞죠? 클론 아님?”

민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반응도 이해가 간다. 지난 2년 사이에 정말 엄청난 성취를 이뤘으니까.

“그러고 보니 전화한 김에 너 이야기도 해볼 걸 그랬다. 수빈이가 아직 얘기 안 한 것 같던데. 번역문학 특집 기간이라서 살짝 들어가도 상관없을 텐데.”

주예린이 쓴 <세계수> 이야기였다.

그런데 기대했던 리액션이 없었다.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리니 주예린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좀 부담이…… 제가 평소에 좀 양심이 없는 캐릭터긴 하지만 TV에 출연할 만큼은 아닌 거 같아요.”

“이야, 우리 주님 드디어 철 들으셨네. 웬일로 양심고백을?”

“김영화 작가님도 안 나오시는데 제가 나가서 휘젓고 다니는 건 좀 그렇잖아요.”

‘독서의 밤’은 다음 화까지 <태엽시계>와 <더 위자드>를 다룰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그 대작들 사이에 끼기 민망하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민우의 생각은 달랐다.

“벌써 초판 다 팔아치우고 3쇄까지 찍은 작가님이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 쓰겠어?”

<세계수> 1부 초판 4천 세트는 보름 만에 소진되었다. 2쇄도 완판, 현재 3쇄가 나가 있는 상황이다. 당금의 출판시장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하지만 정작 기대하고 있는 건 국내 시장이 아니었다.

북미 출판시장.

지난주부터 정식발매가 시작되었다. 오프라인 서점 반응은 좋았다. 세계 최고 인터넷서점인 프로존에서도 순위권에 진입하는 등 호조를 보였다.

“김영화 작가님은 이미 섭외 끝났다고 들었어. 다음 주에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 발표 나면 바로 촬영 들어갈 거야.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그래요? 그, 그럼 피디님께 살짝. 아주 살짝 달팽이 지나가듯 말씀해 주세요.”

“알았다.”

곧 차가 거대한 오피스 단지에 들어섰다.

옛날의 그 낡은 오피스텔이 아니었다. 한창 주가를 올리던 라온북스는 얼마 전 확장 이전을 했고, 민우는 인사 겸 주예린과 찾아온 것이다.

‘이러다 사옥 지을 기세인데? 그때쯤이면 유리도 편집장이 되어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할 때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췄다. 레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전 그럼 근처 카페에 있겠습니다. 일 다 마치시면 연락 주세요.”

“예. 이따 봐요.”

레아가 먼저 내렸고, 민우는 주예린과 7층에서 내렸다. 바로 왼편에 라온북스 간판이 보였다. 유리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유리 편집자가 제일 먼저 달려 나왔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요. 별일 없었죠? 오늘은 양손 무겁게 왔습니다.”

민우가 박스 두 개를 건넸다. 더치커피 세트와 와인이 든 상자였다. 눈을 동그랗게 든 이유리가 환하게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역시 민우 씨밖에 없다니까.”

“저도 절반 보탰는데?”

“아? 죄, 죄송해요. 작가님. 그게. 하하하…….”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이유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은근 주예린이 갑질에 소질이 있음을 깨달으며 민우는 새로운 사무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새 집기가 늘어나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모던한 느낌이었다. 책도 굉장히 많았다. 그중엔 민우가 번역한 것들도 있었다.

“정말 넓네요. 전에 쓰던 사무실보다 두 배는 넓어진 거 같은데?”

“예전엔 너무 좁아서 힘들었는데, 이제는 너무 넓어서 적응이 잘 안 돼요. 청소도 좀 힘들고요.”

현기혁 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방 출장 건으로 이틀 정도 자리를 비운다고 했다. 노광남 대표도 자리에 없었다.

직원들과 간단히 인사를 한 민우와 주예린은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새로 들어온 막내 여직원이 마실 것을 갖다 주었다.

이유리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반색했다.

“맞다. 민우 씨 얼마 전에 TV에 나온 거 봤어요. 정말 자연스럽게 잘하시던데요? 같은 업종에 있는 친구들한테 제가 잘 아는 분이라고 하니까 완전 놀라던 거 있죠. 소개해 달라고 해서 애먹었어요.”

“메이크업 빨이죠. 실물 보면 친구분들 한 번 더 놀랄 듯요.”

“아이 참. 작가님도. 호호.”

민우는 속으로 탄식했다. 편집자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예린의 비위를 저렇게 열심히 맞추려고 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나중에 받을까 싶어 번호를 확인했는데, 상아대의 조성진 교수에게서 온 전화였다.

‘올 것이 왔구나!’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전화를 하고 오겠다고 하며 밖으로 나갔다.

“네, 선생님.”

「통화 괜찮아?」

“괜찮습니다.”

얼마 전 민우는 상아대 총장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간 연락이 없다가 이제야 전화가 온 걸 보니 답을 얻은 모양이다.

민우는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오케이 사인 떨어졌다. 내일 오후 세 시.」

“세 시요.”

민우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스케줄을 확인했다. 오전에 수업을 끝내고 바로 대전으로 내려가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그럼 오후 세 시에 총장실로 가겠습니다.”

「알았다. 그럼 그렇게 전해 드리지. 그런데 말이다. 왜 총장님을 만나려고 하는 거냐? 한다 안 한다도 결정하지 않고서.」

“가볍게 딜을 해볼 생각입니다.”

「뭐야?」

“조금 조정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서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터무니없는 요구는 아니거든요. 서지훈 선생님도 한번 해보라고 하셨고.”

침음이 들렸다. 걱정이 가득 담긴 한숨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지훈 교수의 이름값을 믿고 민우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뭐 너도 나름 생각이 있겠지. 대신 면담 후에 내 연구실에 들러라. 자초지종 좀 듣게.」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 날, 민우는 대전으로 향하는 KTX에 올랐다.

* * *

총장실은 대학본부 최상층에 있었다. 민우는 안내판을 보고 위치를 확인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7층 버튼을 눌렀다.

‘한 번도 안 와봐서 그런가? 마치 다른 학교에 온 것 같은 느낌이네.’

민우는 엘리베이터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곧 7층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자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바닥에 고급스러운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다. 격식이 제대로 잡힌 느낌. 복도 벽면에 걸린 서양화도 분위기 조성에 한몫했다.

‘왠지 긴장되는데?’

민우는 잠시 멈춰 서 짧게 심호흡을 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긴장할 필요 없어. 딱 할 말만 하고 나오는 거야. 늘 하던 대로.’

고개를 끄덕인 민우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복도를 꺾어 도니 데스크가 보였다. 참한 여직원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민우가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죠?”

“오늘 총장님 뵙기로 한 박민우라고 하는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직원이 인터폰을 누르고 민우의 방문을 알렸다. 모시라는 짧은 대답이 들렸다. 싱긋 웃은 직원이 민우를 안쪽 문까지 안내했다.

문이 열리자 책상에 앉아 집무를 보던 최산호가 안경을 벗었다. 민우는 멀찍이 서서 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민우는 최산호 총장과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독대했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지만, 최산호 총장이 인자하게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직접 보니 참 반갑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 활약이 대단하시다고. 연구도 강의도 모두 훌륭하다고 하더군요. 방송에도 나오고 말이지요.”

“좋은 학교에서 공부한 덕입니다.”

“좋은 학교라…….”

최산호 총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여기에서 오래도록 교수를 했지만 성공하는 학생들은 드물었지요. 아무튼 뭐, 그래서 그런지 박 선생에게 흥미가 가더군요.”

그럴듯한 인사치레가 몇 번 오갔다. 그 사이 직원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 최산호 총장이 먼저 다기를 들자 그제야 민우도 목을 축였다.

“얼마 전에 조성진 선생이 서울에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마음의 결정을 내렸습니까?”

“예. 내렸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는 건 뭔가 다른 이야기를 준비했다는 걸 텐데…….”

품격 있는 목소리로 의문을 표한 최산호 총장. 과연 한 대학의 수장은 달랐다. 민우는 내심 감탄하며 말을 받았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저에게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학교에도 도움이 될 만한 제안을 가져 왔습니다.”

최산호 총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통할까?

그런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민우는 가볍게 떨쳐버리고 어깨를 당당히 폈다.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국제번역전공 겸임교수가 아니라 상아대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로 초빙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으음? 국문과로?”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담담하던 최산호 총장의 눈에 놀람이 섞였다.

“예. 소속을 국문과로 두고 국제번역전공 강의와 국문과 강의를 같이 하겠습니다. 협동과정 형식으로 운영되니 제 소속에는 큰 문제가 없을 줄 압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앞으로 제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성과에 따라 전임교수 임용을 검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최산호 총장이 빙긋 웃었다.

호의적인 미소는 아니었다.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권력의 이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민우는 벽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기로 하고 운을 뗐다. 진심을 전하는 것에 루카치의 만년필은 필요 없었다.

“전 제 모교를 명문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명문이라. 지방이라는 지리적 한계가 있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명문이 아니라 진짜 대학으로서의 명문으로 말입니다. 자본에 잠식되는 곳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아카데미아로.”

최산호 총장이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허를 찔린 것이다. 고작 서른 살 시간강사의 입에서 그런 포부가 나올 줄은 몰랐다.

“흥미롭군. 하지만 철저한 이상론. 그게 말처럼 쉬울까요?”

“이런 일은 할 수 있다는 확신보다 해야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제자들을 키워나가다 보면 우리 대학은 물론 연구 풍토도 많이 달라지겠죠.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십시오.”

그제야 민우가 웃었다.

권력은 없지만, 그에겐 실력과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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