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ON AI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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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4.
‘내가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옵션이 상아대 국문과인데…… 이번 제안을 거절하면 나중에 임용 때 불이익이 있을 가능성이 커.’
그래서 쉽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명인대 국문과 임용은 사실상 어렵다. 지금까지 비명인대 출신이 국문과 교수로 임용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대 출신을 임용하는 게 일종의 관습처럼 굳어진 상황.
물론 그것이 앞으로도 깨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현실적으로 민우가 생각할 수 있는 베스트는 상아대였다. 자대였으니까.
다른 대학도 기웃거려볼 수는 있지만 확률은 높지 않다. 연구업적과 강의경력보다 출신 학부를 우선으로 보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이 문제는 서지훈 선생님과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겠어.’
고민을 끝내고 표정을 밝게 바꾼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식사 전이시죠?”
“어? 그렇지. 일찍 올라오느라 밥을 못 먹었구나.”
“그럼 가시죠. 제가 괜찮은 데 알고 있어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가 모셔야죠.”
“좋지.”
그렇게 조성진 교수와 점심을 먹은 민우는 바로 명인대로 돌아왔다. 조성진 교수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시간을 오래 빼앗지 않았다.
토요일이라 인문관은 한산했다. 그런데 310호에 논문에 열중하는 학생이 하나 있었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한진섭이었다.
“해가 서쪽에서 떴나?”
민우의 한마디에 한진섭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냐. 어? 학생이 말이야. 주말에도 쉬지 말고 공부를 해야지. 그럼 뭘 해?”
“딱 보니 주님 원고 마감 걸려서 데이트 까인 거 같은데.”
“쳇.”
한진섭이 한숨을 내쉬며 보던 논문을 덮었다. 민우를 알게 된 지는 이제 2년이 지났을 뿐인데 자신에 대해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마치 학창시절 친구를 대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진섭은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적어도 허물없이 공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진섭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야말로 이 좋은 날에 도서관에 공부하러 안 가고 여긴 웬일이냐?”
“상아대 은사님이 올라오셔서 잠깐 뵙고 왔어. 용산에서 바로 오는 길이야. 이따 가 봐야지.”
“점심은?”
“먹었지.”
“젠장. 오랜만에 밥이나 좀 뜯어 먹을까 했는데. 오늘도 혼밥인가. 그런데 강의 청탁이라도 들어왔어? 직접 여기까지 오시고.”
가방에서 <인문과학총서> 3권 원서를 꺼내던 민우가 살짝 놀랐다. 눈을 깜빡이며 한진섭을 쳐다봤다.
“야, 너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진심.”
“진짜 청탁 들어온 거냐?”
“상아대에 전공 하나 신설되는데…… 거기 겸임교수로 와 달래. 가칭 국제번역전공이고 협동과정 식으로 운영되는 학과인가 봐.”
겸임교수라는 표현에 진섭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비전임교수이긴 해도 시간강사보다는 대우가 좋으니까.
물론, 민우가 번역 업계에서 세운 업적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한진섭이 배배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문과대학 대 통폐합 시대인데 용기 있게 문과 쪽 학과를 만들려고 하네. 과연 박 선생을 배출한 상아대다운 행보군.”
“지원 사업 따내기 쉽고 학제 간 융합연구도 가능하니까 나름 비전이 있다고 생각했겠지.”
“으으, 그놈의 융합 소리 이제 지긋지긋해. 그만 좀 듣고 싶다. 기초학문에 좀 투자하라고! 기초가 무너지고 있는데 뭘 융합해? 어? 무슨 학문이 연금술이야?”
민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책갈피를 꽂아둔 페이지를 펼쳤다. 깨알 같은 영어의 향연이 펼쳐졌지만, 민우에겐 한국어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민우는 가벼운 마음으로 원고를 읽어 나갔다. 하지만 곧 한진섭의 방해를 받았다.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할 거냐?”
“아니. 번역을 직접 하는 거면 몰라도 가르치는 건 달라서. 안 할 거야.”
“하긴. 전공하고 좀 거리가 있긴 하니까. 그런데 결정을 한 사람 치고 표정에 고민이 가득인데?”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 고민 중이야. 윗선에 밉보이기 딱 좋은 케이스잖아. 다음 학기에는 교양 말고 전공과목 좀 받아볼까 하는데…… 이대로라면 시간강사 자리도 짤리기 쉬우니까.”
팔짱을 낀 진섭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친구이길 떠나서 민우의 고민은 나중에 자신의 고민이 될 수 있었으니까.
“어렵네. 그렇다고 다른 학교에서 전공 강의받기도 쉽지 않을 거고…… 그냥 니네 국문과에서 강의하면서 서브로 번역 전공 강의하면 안 되나?”
“……어?”
메모를 하던 민우의 손이 우뚝 멈췄다. 한진섭이 던진 한마디가 머릿속에 번개를 내리쳤다. 순간 민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몇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가지 분명한 길이 펼쳐졌다. 민우는 처음부터 다시 확인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 순간, 민우가 책상을 탁 쳤다.
“아! 왜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지?”
“무슨?”
민우가 재빨리 책을 덮었다. 그리고 가방을 챙기고 일어나 한진섭과 어깨동무를 했다. 힘을 꽉 주면서 어깨를 다독였다.
“덕분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일 잘 풀리면 형이 근사한 곳에서 거하게 쏘마.”
“뭔데? 야! 말은 해 주고 가야 할 거 아냐! 사람 궁금하게! 나 궁금하면 잠 못 잔단 말야!”
“잠 못 자면 그 시간에 논문 읽으면 되겠네. 수고.”
민우는 한진섭의 절규를 뒤로하고 310호에서 나섰다. 그리고 바로 핸드폰을 꺼내 서지훈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주말에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댁으로 찾아뵈어도 될까요?”
「안 그래도 지금 전화하려던 참이다. 교수 초빙 건 때문에 그러지? 조성진 선생님께 연락받았다.」
“예. 맞습니다.”
「너 지금 어디냐?」
“인문관입니다.”
「지금 학교에 다 와 간다. 연구실에서 보자. 문 열어 놓고.」
“알겠습니다.”
민우는 4층으로 올라가 서지훈 교수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보조키를 가지고 있었다. 수제자인 민우에게만 허락된 유일한 특권이었다.
민우는 우선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렸다.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아 필터에 덜어 커피를 내릴 준비를 마쳤다.
구수한 커피 향이 연구실에 가득 찰 무렵, 서지훈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 냄새 좋다. 타이밍 좋게 왔네. 나도 한 잔 줘.”
“옙.”
민우는 커피 두 잔을 준비해 가운데 소파에 앉았다. 겉옷을 벗은 서지훈 교수도 곧 합석했다. 깨끗하게 다림질된 흰색 와이셔츠가 빛나 보였다.
“얘기는 대강 들었으니 설명은 더 할 건 없고. 어떻게 할 거냐? 길게 갈 거 없이 한다 안 한다로만 대답해.”
“할 겁니다.”
“뭐?”
자신의 예상과는 벗어난 대답이었다. 민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서지훈 교수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다.
“너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구나?”
“재미있는 일이 될지 재미없는 일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해보려고요.”
해본다. 그 한마디에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이렇게 된다면 답은 하나다.
“어디 한번 들어보자.”
“그게요.”
민우는 자신의 계획을 짧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서지훈 교수는 무릎을 탁 치며 큰 소리로 웃었다.
“와하하하! 이거 완전 재미있는데? 거기까진 나도 생각을 못 했는데 말이다. 할 수 있겠어? 일개 시간강사가 총장 면담 잡기가 쉽지 않을 텐데?”
“졸업생인데 안 될 거 뭐 있습니까? 요즘 학생들하고도 면담 많이 한다면서요. 졸업생 겸 시간강사로 면담 신청해 보죠. 뭐.”
“뭐 그건 부차적인 문제니까 알아서 하고. 아무튼, 조성진 선생님 가운데서 난처하지 않게 잘해봐. 너무 잡아당기지 말고. 줄 끊어진다. 무슨 의민지 알지?”
“예. 맡겨만 주세요.”
커피를 싹 비운 민우는 연구실을 나섰다. 이제 계획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갈 때였다. 민우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조성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민우인데요. 예. 다름이 아니라 아까 제안 주신 거 때문에요. 혹시 제가 총장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 * *
한 주가 지나고 다시 돌아온 금요일 밤.
민우와 수빈이 동반 출연한 ‘독서의 밤’은 순조롭게 방영되었다. 307호 멤버들은 한진섭의 자취방에 모여 함께 방송을 시청했다.
“생각보다 잘했는데? 박민우 완전 프로네. 수빈이도 야무지게 말 잘하고. 허윤 쟤도 감초처럼 애드립이 좋네.”
한진섭은 TV를 잘 챙겨보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균형감 있게 평가를 내렸다.
“나도 TV에 나가고 싶당…….”
“나중에 피디님한테 작가 특집으로 한번 섭외해 달라고 해볼까?”
“정말?”
주예린이 반색했고, 이수빈은 물론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서의 밤’에는 작가들이 초청되기도 한다. 이번에 국내 반응도 좋으니, 해외에서도 터져준다면 충분히 방송 거리가 나올 것이다.
그때 한진섭이 손뼉을 짝 쳤다.
“자, 그럼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인터넷 반응 좀 살펴볼까나?”
네 사람이 컴퓨터 앞에 모여 앉았다.
기사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조용히 묻혔겠지만, 장영한 PD가 미리 손을 쓴 덕에 기자들이 기사를 송고하기 시작했다.
― ‘독서의 밤’ 교양을 넘어 문화를 읽다!
― 이수빈 평론가에 이어 박민우 번역가 합류. 시청률 상승에 호재
― 인기 번역가 박민우. <태엽시계>를 통해 한국 번역문학의 미래를 논하다
그때 이수빈이 뭔가를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근데 이 기사…….”
한진섭이 마우스를 움직여 기사를 클릭했다. 제목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한진섭이 소리 내어 기사 제목을 읽었다.
“여신 이수빈 평론가. 번역가 박민우 씨와 열애 중. 캠퍼스 커플이 선보이는 최강의 케미?”
수빈이 의문을 표했다.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방송에서는 따로 이야기를 안 했는데.”
“피디님이 아시잖아. 윤 씨도 아는 내용이고. 소문 금방 퍼졌을걸?”
“하긴, 것도 그러네.”
사실 그 기사는 민우가 기획한 것이었다.
경한신문에서 나온 기사였고, 작성한 기자는 민우와 친분이 있던 박윤지 기자였다. 민우는 이 기회에 수빈과의 관계를 확실히 정비해두고 싶었다.
“자, 그럼 다음 기사를.”
진섭이 입맛을 다시며 검색을 시작했다. 기사 몇 개가 걸렸다.
“오오, 입질이 슬슬 오는데? 댓글 달리기 시작했다.”
“사진 잘 나온 걸로 찾아봐. 그게 메인에 갈 확률이 높으니까.”
“오케이.”
진섭이 적당한 기사를 하나 찾았다. 비주얼이 가장 좋은 허윤을 시작으로 이수빈과 민우 순으로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다.
이수빈이야 원래 알아주는 여신이었지만, 민우도 사진이 꽤 잘 나왔다. 메이크업을 받은 탓이 컸다.
한진섭이 감탄했다.
“캬, 사진 쥑이네. 수빈이는 생긴 대로 나왔고. 민우는 인생샷 하나 건졌네. 바로 페이스룩 프사로 올려도 되겠는데?”
“오버하지 말고 스크롤 좀 내려 봐. 댓글.”
민우가 채근하자 진섭이 투덜거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역시나 사진이 잘 나온 기사라 그런지 댓글이 다른 기사에 비해 많았다.
jode*** : 저 흔남이 남친이라고?ㅋㅋㅋㅋㅋㅋㅋ 노어이
└ fbc3*** : 22222222222222
└ appl*** : 333333333333333333
└ cb03*** 원래 흔남이 매력적인 거야
마지막 댓글에 한진섭이 폭소를 터트렸다.
“이거 마지막 대댓글 민우가 단 거 아냐? 푸하하하하하! 흔남이 매력적이래!”
모두가 깔깔거리며 웃는 와중에 민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속이 쓰렸다.
seok*** : 수빈누나 생각 다시 잘 해보세여… 인생은 깁니다…….
└ jame*** : 평론가라고 다 똑똑한 게 아닌 모양
└ drea*** : 헛똑똑이ㅋㅋㅋ
crow*** : 번역가라 나이 많은 줄 알았는데 젊네. 확실히 대형 신인인 듯. 앞으로가 기대된다.
└ poll*** : 날카로운 맨부커각
lest*** : 민우 오빵 <더 위자드> 3부 기대중이예욥♡
└ dese*** : 2부도 재출간 해주세요 ㅠㅠㅠㅠㅠㅠㅠㅠ 시부엉 소설이 뭔 죄냐고!!!
댓글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간혹 수빈을 향한 이상한 댓글도 몇 개 있었지만, 수빈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기사와 댓글을 모두 확인한 네 사람은 다시 거실로 모였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공중파 데뷔라고 할 수 있겠네. 기분이 어떠십니까? 박 선생님.”
“뭐,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하긴. 무투브 때 터진 것보다는 좀 약한가?”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어쩌면 더 강할 수도 있지. 무투브야 지나간 일이지만 방송은 진행 중이잖아. 앞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기대돼.”
민우의 눈에 총기가 번뜩였다. 기왕 방송에 출연하게 된 거, 최선을 다해 활약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