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ON AIR (2)
(187/500)
187. ON AIR (2)
(187/500)
187. ON AIR (2)
2022.04.11.
술자리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민우와 이문구는 밤 열한 시가 좀 넘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두 병씩 나눠 마셨다.
“아버님. 오늘은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어허, 그게 무슨. 내가 해야지.”
“아닙니다. 전에 제가 한번 모신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 됐어! 나한테 쓸 돈 있으면 우리 수빈이한테나 써.”
이문구가 먼저 지폐를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그는 여기 단골이었는지 포장마차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아이고 교수님. 오늘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옆에는 첨 보는 학생이네요? 신입생인가?”
“하하하. 우리 학교 학생 아닙니다. 뭐라고 할까…….”
잠시 민우를 빤히 바라보던 이문구가 웃으며 말했다.
“사위 될 사람입니다.”
“사위요? 이야. 좋으시겠습니다. 따님이 곧 결혼하시나 보군요.”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 같군요.”
“때가 되면 꼭 불러 주십쇼.”
이문구는 껄껄 웃으며 포장마차를 나섰다. 그는 확실히 술이 셌는지 두 병을 빠르게 마셨는데도 비틀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길가로 나왔다.
“자네는 어떻게 가나?”
“아직 차 안 끊겼으니까 지하철 타고 가려고요. 가람대가 좋긴 하네요. 바로 옆에 지하철역이 있어서.”
“비서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부르지 그래.”
“지금은 업무 시간이 아니라서 좀 그렇습니다. 비서라기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입니다.”
“그렇구만. 내가 생각에 짧았군. 허허.”
이문구 교수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불콰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다. 지갑에서 호쾌하게 5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 민우에게 찔러주었다.
“오늘은 택시 타고 들어가. 일도 바쁜 사람인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야지.”
“아아뇨. 괜찮습니다.”
민우는 두 손을 저어 보였다. 하지만 이문구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지폐를 쥔 그의 손이 우악스럽게 주머니로 들어갔다.
“어른 말은 잘 들어야지.”
“감사합니다. 근데 저 안 취해서 진짜 지하철 타고 가도 되는데…….”
“두 병이나 마셨는데도?”
“그 정도는 기본이죠. 네 병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래? 하하하! 마음에 들어!”
이문구는 큰 소리로 웃으며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술 잘 마시는 사람을 싫어하는 어른은 없다. 주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민우는 술을 제대로 배웠다. 꼬박꼬박 두 손으로 술을 따랐고, 상대의 잔이 잠시도 비어있을 때가 없었다. 안주도 어울리게 잘 시켰다.
집에 남자가 없다 보니 거나하게 한잔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문구는 앞으로 종종 민우와 술자리를 함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가 택시 잡아드리겠습니다.”
“그래.”
마침 길가에 택시들이 늘어서 있었다. 민우는 이문구를 뒷좌석에 태우곤 잘 들어가시라며 인사했다. 곧 택시가 엔진음을 내며 달려 나갔다.
그제야 민우는 한숨을 돌렸다.
‘후아…… 뭔가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학교 교수님을 상대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긴장이 풀리자 뒤늦게 취기가 올라왔다.
민우는 수빈에게 이제 끝나고 집에 들어간다는 톡을 남기고 지하철에 올랐다. 하지만 늘 칼 같았던 답장이 오늘은 오지 않았다.
‘벌써 자나?’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을 눈에 담고는 민우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마침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며 빈자리가 생겼다. 자리에 앉은 민우는 눈을 붙일까 생각하다가 가방에서 <인문과학총서> 3권을 꺼냈다.
‘피곤하지만 조금이라도 미리 봐 두는 게 좋겠지.’
송승현 실장에게 속도를 내 보겠다고 한 약속 때문에 미리미리 틈날 때마다 원서를 읽으며 메모를 하고 있었다.
일반서가 아니라 인문서이기 때문에 원문 대조 등 추가 작업이 많다. 민우는 레아의 도움을 받아 검수를 철저히 했다.
사실 잠깐 눈을 붙여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한두 시간 정도 차이 날 뿐이니까.
하지만 민우는 그 잠깐의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몸이 좀 피곤하더라도 할 수 있을 때 해 놓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노력.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민우의 차이점이었다.
‘좋아. 이 부분은 내일 레아 씨에게 맡기면 될 거 같고. 나머지는 문제없겠어.’
3권도 지난 1, 2권처럼 쉽게 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포스트잇과 플래그로 가득한 3권 원서를 가방에 넣은 민우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슬슬 술이 깨려는지 갈증이 생겼다. 편의점에 잠시 들러 커피와 음료수를 몇 개 사 들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
민우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집에 불이 켜져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네. 어머니가 벌써 오신 건가? 사흘 뒤에나 올라오신다고 했는데…… 설마 도둑은 아니겠지?’
어머니는 고향에 내려간 상황이라 집에 아무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불이 켜져 있었고, 민우는 서둘러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어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구두가 보였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다행히 도둑은 아니었다.
“언제 왔어? 톡 답장도 안 하고.”
그렇게 물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TV 소리만 들리고 답은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이수빈이 소파에 기댄 채 잠들어 있다.
일단 민우는 TV를 껐다. 가방을 내려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이수빈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흐응, 언제 왔어요?”
“지금.”
“얼굴 멀쩡하네. 술 별로 안 마셨나?”
“딱 두 병 마셨어.”
민우는 편의점에서 사 온 커피를 수빈이에게 주고, 자신은 음료수를 마셨다. 민우는 수빈의 옆자리에 편히 몸을 기대며 한 소리 했다.
“이젠 자기 집처럼 들락날락하네.”
“예전엔 안 그랬나 뭐.”
“하긴.”
커피를 홀짝이며 이수빈이 민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버지랑 무슨 얘기 했어요?”
“그거 궁금해서 왔구나?”
이수빈은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평소 민우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와 따로 만나겠다고 하니 불안감이 들었던 것이다.
“얘기해 봐요. 무슨 얘기 했는지.”
“집에 뭐 타고 가냐고 하시던데. 그래서 지하철 타고 간다고 하니까 5만 원 주시더라고.”
“아, 그거 말고! 그 전에!”
민우는 은근히 웃으며 이수빈을 놀렸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더 놀렸다가는 옆구리를 꼬집힐 것 같았다.
“너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시더라고. 진지하게.”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그냥 뭐…….”
더는 못 참은 이수빈이 양손을 들고 가위질을 했다. 민우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나한테 아까운 사람이라고 했지.”
“그랬더니?”
민우는 그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이문구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민우를 추궁했었다.
“너무 자신감이 없는 거 아니냐고 혼났어.”
“그럴 만도 하네. 대답도 너무 흔하잖아요. 왜 그랬어요? 평소 오빠답게 자신만만하게 한마디 하지…….”
민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점수를 딸 좋은 기회였는데 그걸 놓쳤다며 이수빈은 많이 아쉬워했다. 하지만 민우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지금 내가 어떻다는 걸 말씀드리는 것보다…… 내가 부족한 걸 알고 널 위해 어떻게 해왔는지를 말씀드리는 게 더 좋을 거 같다고. 그러니까, 아까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내가 더 열심히 하고 있고,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지. 그랬더니 좋아하시더라고.”
“아.”
수빈은 살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얼굴에 감동이 물결쳤다.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면서.
“예전에 아버님이 그러셨지? 연애는 되지만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그렇죠.”
“그 말씀 취소하시겠대.”
“진짜?”
“진짜.”
이문구는 결혼하든 뭘 하든, 이제 두 사람의 뜻에 맡기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수빈은 감격했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늘 마음에 조금씩 걸리던 부분이었는데,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민우가 덧붙였다.
“하지만 결혼은 아직 아닌 거 같다고 했어.”
“……왜?”
“아직 우리 둘 다 학생이기도 하고. 너 이제 스물여섯인데 결혼하긴 좀 이르지 않아?”
잠시 실망하던 이수빈이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간 보는 거 싫어해.”
“그렇지. 그래서 가끔 요리가 싱거울 때가…….”
이수빈이 바로 꼬집었다. 민우는 앗, 소리를 지르며 얌전히 듣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여러 사람 만나보는 게 좋지 않냐고도 하고, 앞으로 더 좋은 사람 나타날 거라고도 하는데 난 그 말 믿지 않아. 이 사람이다 싶으면 잡아야지. 놓치고 싶지 않은걸.”
“우와!”
“왜?”
“드라마 대사 같았어. 배우로 전직해도 되겠는데?”
민우가 엄지를 치켜들자 이수빈이 인상을 쓰며 등짝을 때렸다.
“쫌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면 진지하게 들으라고요!”
“진지하게 듣고 있어.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민우는 그걸 입증하기라도 하듯, 방금 이수빈이 한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읊었다. 보통의 기억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에 수빈은 감격스레 웃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때 민우의 시야에 찬장에 놓인 고급 와인이 들어왔다.
“한잔할래? 얼마 전에 와인 하나 들어왔는데.”
“좋죠.”
민우는 찬장에서 와인을 꺼내 코르크를 땄다. 깨끗하게 닦은 글라스 두 잔에 와인을 따랐다. 달짝시큼한 향이 보랏빛 액체와 함께 흘러나왔다.
가볍게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럼 이제 결혼 날짜 잡으면 되나?”
“그건 좀 생각해 보고요.”
“하,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콧방귀를 뀐 이수빈이 엄한 표정으로 민우를 노려보았다.
“순서가 잘못됐잖아요. 순서가. 아버지한테 좋은 말 들었다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갈 생각 말아요. 프로포즈는 제대로 받을 거니까.”
“그거야 뭐.”
“호오, 자신 있나 봐요? 전직 모태 솔로라 그런 거 잘 못 할 거 같은데?”
뜻밖의 팩트 공격을 당한 민우는 와인잔을 든 채로 고민에 빠졌다.
명인대 수석 졸업에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까지 한 애인에게 어떤 멘트를 들려줘야 허락을 받을 수 있는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네. 그럼 일단 사고부터 쳐 볼까.”
“응? 꺅!”
민우는 수빈을 번쩍 들어 안았다. 수빈이 들고 있던 잔이 흔들리며 바닥에 와인이 쏟아졌다.
하지만 닦으면 그만인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젊은 만큼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했다. 좋은 일이 반복된 탓일까. 그날 밤 민우의 집에선 불이 꺼지지 않았다.
* * *
“너 겁나 피곤해 보인다?”
“아, 예. 잠을 좀 못 잤더니…… 죄송합니다.”
“번역 일 많다더니 밤새운 거야?”
조성진 교수가 걱정스레 물었다. 민우는 아니라고 말하긴 했는데 속으로는 뜨끔했다. 밤새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할 순 없었다.
두 사람은 용산역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조성진 교수가 명인대까지 오겠다는 걸 민우가 말려 역까지 마중을 나간 것이다.
“서지훈 선생은 별일 없지?”
“예. 좀 바쁘신 거 빼고는 특별한 일 없이 잘 지내세요.”
“잘됐군. 하긴, 서지훈 선생은 상아대보단 명인대에 어울리는 양반이었지. 이제 너만 자리를 잘 잡으면 되겠구나.”
“전 아직 멀었죠. 박사도 없는데요.”
“음, 그게 말이다. 기회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런 게 생겼다. 그래서 널 보러 서울까지 올라온 거야.”
기회라는 말에 민우가 정신을 번뜩 차렸다. 찻잔을 내려놓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뭐 우리 사이에 돌려 말하진 않으마. 이번에 국제번역전공이 신설되는데, 거기에 널 겸임교수로 초빙을 하려고 해. 어때. 괜찮겠나?”
“겸임교수요?”
“그래. 아무래도 요즘 네가 번역 쪽으로는 주가가 높으니까. 여러모로 학교에도 도움이 될 거고 너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구나. 총장님이 특별히 지시하신 거야.”
조성진 교수는 국제번역전공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민우는 진지하게 들으며 궁금한 점이 있으면 즉시 물었다.
모든 설명을 들은 민우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취지로 만든 전공이네요. 확실히 제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단순 번역이 아니거든요. 앞으로 번역에 대해서도 학제 간 교류가 있어야 할 겁니다.”
“잘 봤다. 아직 다른 대학에서는 관심이 없어서 우리가 먼저 해보려고 하는 거야.”
“그렇군요.”
민우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번역 전공이면 국문학 쪽과는 거의 관계가 없어. 좋은 제안이긴 한데…… 그렇게 끌리지는 않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결국, 민우는 한발 물러섰다.
“일단 좀 생각을 해볼 수 있을까요? 서지훈 선생님과도 좀 상의를 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얼마든지. 다만 한 가지를 조언해 주자면…….”
조성진 교수는 마치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하는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최산호 총장님이 직접 챙기는 일이야.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겠지?”
“예. 대강은 알 것 같네요.”
“미안하다.”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미안해하실 게 있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생각해 보고 결정을 하겠습니다.”
민우는 웃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까딱 잘못하면 다음 학기 상아대 강의는 날아가게 생겼는데?’
문득 민우는 ‘외통수’라는 단어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