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ON AI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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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8.
“왜 그런 눈으로 보냐? 아빠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문구는 마치 재롱잔치에서 딸의 공연을 보는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성숙했다고 해도 그의 눈엔 아직 어린아이였다.
이수빈이 투정을 부렸다.
“반쯤은 못 올 곳 맞잖아요. 여긴 촬영장인데.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들어오는 게 뭐 대수라고. 내 딸이 촬영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
“농담하지 마시구요.”
“원 녀석도. 카메라 앞에서는 그렇게 사근사근 잘 이야기하면서 아빠한테는 투덜거리는구나. 실은 친구가 여기 국장으로 있다. 부탁해서 들어온 거야.”
그래도 이수빈의 얼굴에서 불만이 떠나지 않았다. 민우가 잘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문구가 누구인가. 수빈의 아버지다. 딸의 마음을 보는 건 일도 아니다.
“그렇게 노려볼 거 없다. 곧 갈 거니까. 지나가다가 생각나서 잠시 들른 거야.”
“지금 오신 거예요?”
“그래.”
사실 촬영 처음부터 민우와 수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엄한 교수였지만, 밖에서는 딸을 둔 평범한 아버지였다. 딸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면서도 걱정이 됐다.
이문구가 이번엔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슬쩍 손을 내밀었다.
“자네는 좀 오랜만이군.”
“안녕하십니까.”
민우가 꾸벅 인사했고, 악수를 나눴다.
역시 좀 어색했다.
지금까지 수빈의 부모님께 안부 전화와 문자를 몇 번 하긴 했다. 명절 때는 선물도 보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어때, 요즘 정신이 없지? 수빈이가 애인 자랑을 얼마나 하는지. 이번에 좋은 소식도 있는 것 같고.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민우는 수빈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하고 다니냐고 추궁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죄송합니다. 한번 뵙자고 말씀만 드리고 매번 넘어가 버렸네요.”
“괜찮네. 명절 때마다 선물도 보내주고. 우리 와이프 생일까지 챙겨주고. 그때마다 참 고맙더군.”
“사실 처음에 생각을 못 하고 있다가…… 수빈이가 먼저 저희 어머니 챙겨주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하게 됐습니다.”
“그래?”
이문구가 의외라는 듯 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혀를 슬쩍 내밀었다. 그렇게 반대를 했는데도 이렇게 잘 만나고 있지 않냐는 무언의 시위였다.
“저희 어머니가 어쩜 그렇게 딸을 잘 키우셨냐고 매번 칭찬하세요.”
“하하하. 뭐 내가 키운 게 있나. 지가 알아서 잘 컸지.”
“그럼요. 제가 알아서 잘 컸죠.”
“인석이.”
그래도 부모님이 잘 키워 주셨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딸이 그렇게 나오자 이문구는 아쉬운 마음에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이따 저녁에 괜찮으면 한잔할까? 내가 자주 가는 포차가 있는데 말이야.”
“좋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가람대 정문에서 보지. 제자들하고 자주 가는 곳인데 자네도 마음에 들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수빈이랑 촬영 마치고 같이 갈게요.”
“아니. 자네만 와.”
“저만요?”
“그래.”
이문구는 떨지 말고 잘하라고 한마디 남긴 뒤 스튜디오를 나갔다. 이수빈은 툴툴거리면서도 아버지를 방송국 앞까지 배웅했다.
잠시 후 그녀가 돌아왔다.
“근데 오빠 안 바빠요? 저녁에 스케줄 없나?”
“미팅은 없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님 말씀인데 다른 일 제쳐두고라도 가야지.”
“이상해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시지? 나한텐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는데.”
“왠지 촉이 온다.”
“어떤?”
“봉투 꺼내시면서 우리 딸과 이만 헤어져 주게. 라고 하실지도.”
“그럼 그 봉투 받아와요.”
“응?”
민우는 농담으로 꺼낸 말인데, 이수빈은 진담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이수빈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으면 되지 뭐. 요즘 용돈도 못 받았는데 잘됐다.”
“너 아버님 너무 미워하는 거 아니냐.”
“괜찮아요. 백 번 툴툴대도 한 번만 애교 부려드리면 다 풀리거든요. 쉬운 남자셔서.”
왠지 딸을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민우는 딸 둘이었던 자녀 계획을 아들 하나 딸 하나로 슬쩍 바꾸었다.
“자자! 이제 촬영 들어갑시다!”
장영한 PD가 시작 사인을 보냈다. 카메라가 움직이고, 스태프들이 다시 분주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민우와 수빈은 재빨리 세트장에 올랐다.
* * *
촬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장영한 PD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는 직접 세트장까지 올라와 민우를 칭찬했다.
“민우 씨! 대박이야, 대박. 아주 잘했어요! 우리 카메라 감독님이 웬만해서는 칭찬 안 하는데 엄지 척을 다 하시네.”
확실히 민우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방송경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전문성 때문이었다.
번역특집으로 특별히 초빙된 것이긴 했지만, 번역이라는 개념을 알기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 대단했다. 주로 국내 도서만을 소개해왔던 프로그램의 외연이 민우라는 사람에 의해 훨씬 더 넓어진 것이다.
장영한 PD는 자신의 계획을 확고히 정했다. 민우를 앞으로 고정 출연시키기로.
물론 이번 방송분 시청률 추이와 인터넷 반응을 살펴야겠지만 말이다.
“확실히 대학에서 강의해서 그런지 설명하는 방식이 아주 좋아요. 제스처도 자연스럽고 매력적인 저음도 인상적이고. 응? 인터넷에서 아주 난리가 나겠어!”
“빈말이라도 감사하네요. 너무 긴장해서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부분 없었나요? 컷이 거의 안 나와서…….”
“아이구, 엄살은! 이번 번역특집 덕에 시청률이 팍팍 오를 거 같은 느낌입니다. 반응 좋으면 고정으로 나오셔야지?”
“고정이요?”
“수빈 씨하고도 케미가 좋고. 젊은 번역가 캐릭터가 하나 있으면 프로그램이 훨씬 풍부해지니까 말입니다. 어때요?”
“으음, 그건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시청자들 반응이 어떨지 모르니까요.”
“보나 마나지. 방송 나가면 아주 뜨거워질걸? 하하하.”
<태엽시계>와 <더 위자드>는 두꺼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작품이었고, 이미 장영한 PD는 보도자료를 준비해 언론에 널리 알린 상황이었다.
이미 이수빈이라는 여신의 존재로 인해 화제가 된 프로그램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된 것.
‘전에 피디님이 말한 윈윈이라는 게 이런 거였나?’
방송국은 시청률과 인지도를 챙기고, 자신은 공중파에 출연해서 얼굴을 알린다.
‘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지. 내가 번역한 작품을 해설하는 것. 이것도 번역의 일부가 아닐까?’
민우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상업 프로그램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교양 프로그램이었으니까.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고정 건은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고. 오늘 촬영 피드백을 좀 해볼까요? 수빈 씨도 이쪽으로.”
장영한 PD는 주로 잘된 점을 나열하며 민우와 수빈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두 사람은 조언을 마음에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드백이 끝나자 장영한 PD가 주변을 둘러보며 박수를 쳤다.
“그럼 다음 촬영 때 봅시다. 다들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피디님!”
장영한 PD가 스튜디오를 나갔다. 이수빈이 뚱한 표정으로 민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까 대기실에서는 떨려서 죽겠다고 한 사람이 어쩜 그렇게 잘했어요?”
“난 실전에 강한 타입이거든.”
“어휴, 말이라도 못하면 또 몰라.”
씨익 웃은 민우는 루카치의 만년필을 안주머니에서 꺼내 가방에 소중히 보관했다.
두 사람이 세트장을 나서려고 하자 허윤이 불렀다.
“바로 가시려고요? 민우 씨 첫 촬영인데 뒤풀이하고 가시지. 괜찮으심 제가 스태프분들 모아서 자리 마련해 볼게요.”
“아, 감사하지만 다음에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이거 아쉽네요. 민우 씨랑 꼭 한잔하고 싶었는데.”
어느 정도는 진심이겠지만, 다른 목적도 있을 것이다. 민우는 그의 속내를 파악했지만 얌전히 웃기만 했다.
“근데 아까 휴식 시간에 왔던 남자분은 누구예요?”
“장인어른이요.”
“네?”
허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민우가 친절히 웃으며 다시 대답해 주었다.
“수빈이 아버님이에요. 이쪽 국장님하고 친분이 있으셔서 잠시 들어오셨더라고요.”
“그, 그렇군요.”
“그럼 윤 씨. 다음 주 촬영 때 봐요. 가자. 자기야.”
수빈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1년 넘게 사귀어오고 있었지만, ‘자기야’라는 표현은 처음이었다. 뜻밖이라 마음이 설렜다.
환하게 웃은 수빈이 민우와 팔짱을 꼈다. 그리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 * *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요. 울 아빠 엄청 많이 드시니까.”
“나도 어디 가서 술로는 안 집니다. 조심히 들어가고.”
수빈과 헤어진 민우는 바로 가람대로 이동했다. 정문에 도착한 다음 바로 전화를 걸었다.
10분 뒤쯤 이문구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민우를 학교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로 데려갔다. 허름한 곳이었는데 맛이 좋은지 학생들로 가득했다. 다행히 한 자리는 남아 있었다.
“소주 괜찮지?”
“좋죠.”
민우는 소주 한 병과 안주를 시켰다. 민우는 오늘 촬영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대학원에서 구를 대로 구른 그였다. 교수들 비위 맞추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문구는 전공이 다르긴 해도 교수라는 본질은 같았다.
소주 한 병은 금방 동났다.
민우는 한 병을 추가로 시켰다. 병을 쥐고 공손히 이문구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잔이 가득 차니 이번엔 이문구가 민우의 빈 잔을 채웠다.
“이번 달 말쯤에 괜찮으면 집에 한번 놀러 와. 우리 와이프가 저녁 대접하고 싶다고 하는군.”
“예, 꼭 가겠습니다.”
“매번 예 소리만 하네. 눈치 보지 말고 바쁘면 좀 미뤄도 돼.”
술이 많이 취했다면 어떻게 눈치를 안 볼 수 있겠냐고 했을 것이다.
“정말 괜찮습니다. 밥 한 끼 먹는 건데요. 꼭 가겠습니다.”
“그래.”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2년 전쯤이었나. 아파트 앞에서 우연히 민우를 만나 집안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때가.
이문구는 그때를 회상했다.
‘참 당차고 솔직한 친구였지.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기도 했고.’
그때는 교제를 반대하려고 했었다. 그만큼 선입견이란 게 무서웠다. 만약 와이프가 아니었다면 수빈의 미래는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역시 와이프가 사람 보는 눈은 훨씬 좋아. 좀 배워야겠어.’
이문구가 웃었다. 민우는 그가 갑자기 왜 웃는지 몰라 일단 술잔만 들었다.
“요즘 큰일 하고 있다면서? 센트럴 북스 쪽하고 번역 프로젝트 하나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젝트인가?”
“그게…… 쉽게 말씀드리면 번역서를 콘텐츠화시키는 작업입니다. 지음사 오픈 라이브러리 시스템을 이용해서 누구나 무료로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 플랫폼을 개발하는 거예요, 추후에 구굴 쪽하고도 연계해서 국제적인 규모로 진행될 거고요.”
“구굴까지? 젊은 친구가 크게 노는데. 벌이가 제법 쏠쏠하겠어.”
민우는 겸손히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건배를 청했다. 쨍,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럼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건가?”
“아뇨. 아직 시간강사일 뿐인데요.”
“아니, 그거 말고. 경제적으로 말이야.”
안주를 집으려던 민우가 젓가락을 멈췄다. 그만큼 이문구의 한마디는 묵직하게 울렸다. 단순히 궁금해서 꺼낸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인센티브도 많이 받았고…… 번역한 것들도 꾸준히 팔리고 있어서 인세도 좀 들어오는 편입니다. 제 나이 또래에 비한다면 많이 버는 편이죠.”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진 않았지만 민우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돈은 평균 500만 원 내외였다. 혼자 쓰기엔 충분했다.
“굳이 교수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군그래.”
“사실 그렇긴 하죠.”
민우는 어느새 잔이 빈 걸 확인하고 이문구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하지만 먹고 살려고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건 아닙니다. 박사 논문도 슬슬 구상해야 하고, 박사를 딴 이후의 일들도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야 하고요. 기회가 된다면 학계를 좀 젊게 바꿔 나가고 싶기도 합니다. 이번에 미국 가서 배운 게 많거든요. 이거 말씀 드리다 보니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네요. 하하하.”
민우를 바라보는 이문구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순수한 열정이 느껴진 것이다. 그 모습에 이문구는 결정을 내렸다.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건 좋은 거지. 젊을 때일수록 더더욱. 하지만…… 인생을 놓고 본다면 그것들보다 중요한 일도 있어.”
술잔을 단번에 비운 그가 민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민우는 허리를 세우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자네는 우리 수빈이를 어떻게 생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