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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7.
갑작스럽게 주목을 받자 조성진 교수는 당황했다.
“에…… 이걸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설마 이 자리에서 민우에 대한 질문이 나올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하지만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발언을 시작했다.
“박민우 선생은 유능하다기보다는 노력파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죠. 저학년 때는 성적이 별로 안 좋았는데, 이후에 모두 만회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명인대로 적을 옮긴 서지훈 선생의 영향이 컸지요.”
“그렇군요. 듣기로는 6개 이상의 외국어를 할 수 있다고 하던데…….”
최산호 총장이 묻자 유희윤 교수가 미리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답했다.
“실제로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된 논문과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원어민 수준으로 번역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호오.”
주변이 웅성거렸다. 그 와중에 유희윤 교수가 조성진 교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원래 외국어를 잘했습니까?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대학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특기자 전형이라든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열심히 하는 친구니까 외국어도 단순히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을 했지요.”
유희윤 교수가 흡족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떻게 끌어올 수 있을까만 생각하면 돼.’
사실 그는 민우라는 사람 자체에 호감이 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필요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유희윤 교수가 다시 물었다.
“현재 대학국어 강의 하나를 맡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평판은 어떻습니까?”
“여러 학생에게 들은 바로는 무척 좋습니다. 아직 강의 평가가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최상위권을 기록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강의력도 출중한가 보군요.”
“예전부터 좀 유명했었지요. 왜 그거 있잖습니까. 동구청에서 주관했던 인문학 강좌.”
“아아.”
몇몇 교수들이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투브에 올라가서 인기를 끌었고, KOC에서 제공 중인 인문교양강좌도 호평을 듣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 제자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잘합니다. 아마 다른 선생들에게 물어도 비슷한 평가를 받을 겁니다.”
“예전에 SNS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그때 강의를 했던 학생이 지금 말하는 박민우 선생입니까?”
“맞을 겁니다.”
“이거 정말 흥미롭군요. 우리 학교 학생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을 줄이야.”
침묵하던 교수들이 한마디씩 꺼냈다. 서로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며 민우가 맞는지 확인하느라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조성진 교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학생들은 꽤 있다. 다만 지방대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뿐.
“훌륭한 학생들은 여럿 있습니다. 이번에 명인대 대학원에 들어간 주예린 선생도 꽤 큰일을 했지요. <세계수>라는 작품을 써서 미국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센트럴 북스와 계약을 했죠.”
“오호, 국문과에 인재들이 많군요?”
“다른 과에도 많을 겁니다. 다만 관심을 덜 받고 있을 뿐이죠.”
조성진 교수가 비판의 목소리를 내자 다른 교수들의 표정이 뚱해졌다. 고개를 슬쩍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도 학생들에게 관심을 좀 가져주시면 어떻습니까? 지방대라는 편견은 버리고 말입니다. 관심 좀 가져준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소신 있는 발언이었다. 조성진 교수는 자대 출신 교수였다. 그래서 명인대 및 해외파 교수들에 비해 애교심이 많았다.
“아무튼, 박민우 선생은 유능한 인재입니다. 여기에 명인대 출신 교수님들도 꽤 계시니까 하는 말인데, 이번에 박사과정을 이명인 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
명인대 출신 교수들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자대생이 아니면 불가능에 가까운데, 상아대 출신으로 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그때 최산호 총장이 나섰다.
“뭐, 그 정도면 됐습니다. 얘기 잘 들었습니다. 스타 강사의 필요성은 나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아마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듯한데…….”
그때였다. 한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중년 사내가 존재감을 표했다.
최산호 총장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잠자코 지켜보겠다던 정일수 이사가 약속을 깨고 나선 것이다. 암묵적인 약속이긴 했지만.
“실례지만 하나 질문해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고맙습니다. 그럼 유희윤 교수께 여쭙지요. 초빙은 거의 결정된 거 같은데 대우는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전임인지 비전임인지.”
“아까 제가 강사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까? 시간강사 대우에 옵션을 붙이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사 학위가 없으니까 초빙교수는 학칙상 불가능하고.”
“그거라면 뭐 상관없겠군요. 어차피 푼돈이니. 계속 진행하시죠.”
푼돈?
지켜보던 조성진 교수는 속으로 웃었다. 겉으로 금칠을 했는데도 대우가 고작 시간강사라니.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율을 보겠다는 기업적 마인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섰다.
아끼는 제자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더 올려주기 위해서.
“그 조건이라면 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다들 침묵에 휩싸였다. 그중 유희윤 교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성진 교수를 쳐다보았다.
“어렵다니. 그건 무슨 의밉니까?”
“박민우 선생은 하는 일이 많습니다. 번역도 하고 있고, 프로젝트도 큰 거 하나 하고 있어요. 원래 국문과에서 2학점 강의와 3학점 강의 두 개를 주려고 했는데…… 본인이 바쁘다 하여 3학점 강의를 뺐습니다.”
“그래서 옵션을 넣으려는 겁니다. 강사료도 좀 올려주고 편의를 봐주면…….”
“하하하! 그 정도로는 센트럴 북스와 비교만 될 뿐이죠. 센트럴 북스가 박민우 선생에게 얼마나 큰 베팅을 했는지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개인 비서에 차량까지 제공하고, 인센티브 규모도 커서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할 정도입니다.”
아무도 대꾸를 못 했다. 민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조성진 교수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쐐기를 박았다.
“전공 관련 강의도 아니고, 강사료라고 해도 큰돈도 아닌데 굳이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박민우 선생 성격이라면 그 시간에 전공 공부와 프로젝트에 집중을 하겠다고 하겠죠. 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일을 어렵게 갈 필요가 있을까요? 초빙교수가 어렵다면 겸임교수 카드를 쓰면 되는데. 돈이 얼마나 더 든다고 그걸 아끼려고 합니까.”
“겸임교수…….”
겸임교수는 비전임교수 중 하나로 다른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교수로 임용될 때 주로 붙는 직함이다. 연봉은 전임교수에 비해 적은 편이지만, 방학 때도 기본급이 나오고 개인 연구실이 배정된다는 점에서 시간강사와는 다르다.
“겸임교수라면 박사 학위가 없는 문제도 자연 해결이 될 거고, 나중에 홍보하기도 좋을 거 아닙니까? 적어도 교수 직함은 있어야 하니까요.”
“일리가 있는 말씀이긴 하네요.”
“확실히 겸임교수라면야.”
주변에 있던 교수들이 동의를 표했다.
그때 최산호 총장이 정일수 이사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었지만, 딱히 나서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고 한번 접촉을 해봅시다. 조성진 교수.”
“예. 총장님.”
“이번 섭외 건을 책임지고 진행해 주시지요.”
“한번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긴 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문학과 관련된 전공도 아닐뿐더러, 민우가 돈과 명예를 좇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설득을 한다? 겸임교수라는 직함에 혹할 만한 녀석은 아닌데.’
회의가 마무리되는 내내 조성진 교수는 민우를 설득할 방법을 구상했다. 하지만 마땅히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 같군. 다음 주까지 기다리는 건 좀 그러니 내가 직접 서울에 올라가야겠어.’
회의실에서 나선 그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KBC 스튜디오 안에서는 ‘독서의 밤’ 촬영이 한창이었다. 환한 조명을 받으며 카메라 세 대가 분주히 돌아갔다.
가운데에서 진행을 맡은 잘생긴 남자 아나운서가 수빈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역시 <태엽시계>라는 작품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김영화 작가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뭐 이런 평가가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문단에서도 대단히 화제가 되었던 작품인데요. 삶에 지친 현대인의 평범한 일상을 담아낸 소설이라는 점에서 조금 특별합니다. 보통은 시대상이랄까, 그런 무거운 주제를 담는 소설들이 많이 나오는 추세라서요.”
“아무래도 각박한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놀랍게도 <태엽시계>는 그런 전형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풍자와 해학이 곁들어져, 우리가 주인공의 시대에 함께 살고 있구나 하는 일체감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죠. <태엽시계>를 말할 때 ‘냄새’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요. 김영화 작가의 소설에서는 공통적으로 특별한 냄새를 느낄 수 있기도 하고요.”
“냄새라. 좀 어려운 느낌인데요……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비슷해요. 문체에는 여러 감각이 있는데, 김영화 작가의 작품엔 특히 후각을 자극하는 표현들이 많죠.”
“맞아요. 라면 먹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어쩜 그렇게 생생하게 표현을 했는지. 매니저 몰래 밤늦게 라면 끓여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말씀하셨으니 이제 혼나시겠는데요?”
“아, 그렇구나…….”
“하하하!”
오늘의 주제는 <태엽시계>였다. 아나운서와 이수빈, 그리고 허윤은 오래도록 손발을 맞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아나운서의 시선이 잠시 소외되어 있던 민우를 향했다.
“그렇다면 말이죠. 이런 개성이 담긴 작품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을 거 같은데. 어떠셨습니까? 번역가의 입장에서.”
카메라가 민우를 잡았다. 민우는 살짝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역시 어려웠습니다. 아까 이수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특유의 개성도 그렇고, 역시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게 행간에 숨겨진 의미였거든요. 여백의 미라고 할까요. 이걸 영어로 잘 살려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게 잘 통한 거겠죠? 지금 현지 반응을 보면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본상 발표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번역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역시 핵심은 작품이 가진 힘이 아닐까 해요. 번역이 잘되어서 좋은 결과가 났다기보다는 원래 작품이 좋아서라고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좋은 작품은 언젠가 빛을 보게 마련이니까요. 시기의 문제죠.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번역가가 더 멋지게 번역을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결국, 중요한 건 작품 그 자체죠.”
민우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와중에도 자신 있게 의견을 말했다. 마치 10년 차 방송인이 빙의하기라도 하듯 몸짓과 표현이 적절했다.
곁에 있던 이수빈과 허윤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방송 시작 전에 긴장하며 엄살을 부리던 민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을 오갔고, 장영한 PD가 일어나 사인을 보냈다.
“커트! 잠시 쉬었다 가시죠!”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스태프들은 쉴 시간도 없이 분주히 움직였다. 메이크업 담당들이 다가와 화장을 손보기 시작했는데, 민우는 잠시 세트장을 내려왔다.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나중에 다시 걸었을 텐데, 조성진 교수에게 온 전화였다. 자주 전화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바빠?」
“지금 촬영 중이긴 한데 잠깐은 괜찮을 거 같아요.”
「아, 그 ‘독서의 밤’ 촬영하는 건가?」
“예.”
「뭐 긴 이야기는 아니고, 내일 서울에 올라갈까 하는데 잠깐 볼 수 있어?」
“서울에요? 무슨 일이신데요?”
「전화로 얘기하긴 좀 그래서 그래. 만나서 이야기하지.」
“아, 예. 알겠습니다.”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민우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시는 거지? 서울까지 올라오시고. 대학국어 강의에 뭐 문제라도 있었나?’
혹시 실수한 게 있나 돌이켜 보았다.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빈이 세트장에서 내려왔다.
“오빠. 무슨 전화인데 그래요?”
“상아대에 계신 선생님께 전화가 왔어. 내일 잠깐 보자고 하셔서.”
“사고 쳤구나?”
“무슨 소리야. 요즘 가만 보면 사고 치길 바라는 사람 같다?”
수빈이 재밌다며 쿡쿡 웃었다.
“자요. 목마르죠?”
그녀는 가져온 물병의 뚜껑을 열어 민우에게 건넸다. 뜨거운 조명 아래에서 오래 말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물병을 받은 민우는 먼저 마시지 않고 수빈의 입에 대 주었다.
“너 먼저 마셔.”
“헤헤.”
수빈이 생긋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이좋게 물을 나눠 마셨다.
지나가던 스태프들이 부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차콜색 정장을 입은 중년 사내가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보기 좋구나.”
굵직한 목소리였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민우는 하마터면 입에서 물을 뿜을 뻔했다. 깜짝 놀란 것은 이수빈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사내는 다름 아닌 이수빈의 아버지 이문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