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See you at the to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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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4.
“일이 잘 풀린 모양이군.”
서지훈 교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연구실에서 민재와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경험이 참 중요한 거 같더라고요. 민재와 접점이 없었더라면 쉽게 풀 수 없었을 겁니다.”
“원래 비슷한 사람들끼리 끌리는 법이거든.”
“그러게요.”
민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생각해보면 자신과 민재와의 관계는, 서지훈 교수와 자신과의 관계와 거의 같았다. 민우도 그의 책과 강의를 접하고 푹 빠졌었으니까.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케어해 줄 생각이냐?”
“당분간은 상아대에서 강의를 하게 될 거니까 종종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거 같아서 가능하면 명인대 쪽으로 오게 하려고요.”
“그건 좀 더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서지훈 교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뜻인지 몰라 민우는 그를 바라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단순히 학력이 필요하다면야 명인대에 오는 게 맞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그 친구가 너의 가르침을 원하는 거라면, 네가 자리 잡은 곳으로 가야 하는 게 맞는 이야기잖아.”
“그렇긴 한데…… 제가 당장 어디에 자리 잡을 만한 능력은 안 되잖습니까. 아직 박사학위도 없고.”
“그건 가봐야 하는 이야기지. 아, 오해하지는 말고. 명인대에 오지 말라고 하라는 게 아니라 충분히 생각해보고 같이 이야기해 보라는 말이니까. 명인대에 와서 뭐 나쁠 건 없으니.”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었다.
“마침 선생님도 계시니까요.”
“인석아. 네 짐은 네가 짊어지고 가야지.”
“저도 선생님께 짐이었나요?”
“그렇지. 무척 크고 무거운. 은근슬쩍 과거형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현재진행형이니까.”
서지훈 교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내 충고가 좀 마음에 와닿지?”
강연하거나 책을 내는 건 신중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학부 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려들었는데, 지금은 좀 달랐다.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준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이제야 알았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과장 없이 솔직하게 하려고요. 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좋은 거 같습니다. 강의를 하든 뭘 하든지요.”
서지훈 교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까딱거렸다. 몇 가지 충고해주고 싶긴 했지만 참았다. 스스로 깨닫는 것만큼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될 수는 없으니까.
“아무튼 그 친구, 네 제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친구니까 주시하도록 해. 뭘 공부하는지 세세히 따지려고 하지 말고 큰 방향만 살짝 잡아 주는 식으로.”
“제가 잘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마음에도 없는 엄살떨지 말고.”
“하하하.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담소를 마치고 민우는 연구실을 나섰다. 아래층으로 이어진 중앙 계단으로 내려가려던 차에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오빠.”
정연주였다.
작년에 무난히 석사학위를 따고 잠시 휴식을 취하느라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다.
“뭔가 되게 오랜만인 거 같은 느낌이네.”
“그러게요.”
연주는 귀엽게 웃었다.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민우는 잠시 연주를 한눈에 담았다.
그녀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한 손엔 두꺼운 전공서를 들고 있었다.
‘역시 화려하게 치장한 것보다 소소한 옷차림이 더 잘 어울린단 말이야.’
민우는 뒤늦게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이유를 찾았다.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다. 늘 단발이었는데 지금은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머리 기르는 중이야?”
“예. 이상해요?”
연주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잘 어울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남자의 로망은 긴 생머리라고.”
“그래요? 그래서 수빈 언니가 단발을 못 하는 거구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수빈이가 그거 가지고 너한테 뭐라고 그랬어?”
“당연히 농담이죠.”
연주가 입을 가리며 조용히 웃었다. 한 학기 푹 쉬고 와서 그런지 여유가 느껴졌다. 그 여유도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것에 한몫했다.
“그런데 학교엔 어쩐 일이야? 프로젝트 끝나고 요즘 통 안 보였잖아.”
“대학원 입학 준비 때문에 잠깐 교수님 뵈러 왔어요.”
“아, 추천서 받으러? 외국 대학은 그런 거 꼼꼼히 본다고 하던데.”
민우는 연주가 프랑스에서 박사과정을 하게 될 거라고 알고 있었다. 본인이 그렇게 희망하기도 했고, 아무래도 외국 문학은 본고장에서 전공하는 게 커리어에 훨씬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연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저…… 명인대에서 박사과정 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서류 준비하러 온 거예요.”
“여기에서? 갑자기 왜?”
정연주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나다니는 불문과 학생들이 많아서인지 조금 난처한 표정이었다.
“자리 옮길까?”
“좋아요.”
두 사람은 지하 카페로 내려왔다. 사람들이 꽤 많아 복작였지만 앉을 만한 자리는 남아 있었다. 커피를 하나씩 들고 구석에 앉았다.
민우는 바로 본론을 이었다.
“집에서 반대한 거야?”
“아무래도 몸도 약하고 하다 보니…… 부모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명인대도 공부하기는 나쁘지 않으니까 그냥 여기에서 하려고요.”
예상했던 대로였다. 어차피 연주는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굳이 교수직에 집착해 해외에 나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많이 속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IAHS를 경험하며 해외 무대의 방대함을 몸소 체험한 민우였으니까.
“아쉽겠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건 이쪽하고 많이 다를 텐데. 가끔이라도 연수받으러 나갔다 와. 나도 이번에 미국 다녀왔는데 정말 배울 게 많더라.”
“그럴 생각이에요. 종종 나갔다 오려구요.”
“아무튼 그렇게 됐다면 다음 학기부터 학교에서 볼 수 있는 건가?”
“입학에 별문제 안 생긴다면요.”
실력도 실력이지만 연주가 가진 집안의 힘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불합격 처리한다면 후폭풍이 생각보다 클 테니까.
“그런데 오빠. 교수님 소리 듣는 기분은 어때요? 수빈 언니한테 들었는데 상아대에서 인기가 아주 좋으시다고…….”
“처음엔 뿌듯했는데 이제는 적응이 되어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아.”
“그쪽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라고 안 하나 봐요?”
“요즘은 다들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추세더라고. 복수 전공하는 애들도 많으니까. 굳이 강요하는 것도 이상하고. 언젠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생님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열심히 한다면. 그런데 넌 강의 계획 없어?”
“아직은요. 제가 너무 어리기도 하고요.”
“하긴, 이제 스물다섯이지? 복학생들 나이랑 비슷하겠네.”
끄덕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빨대를 입에 물어서인지 더욱 어려 보였다. 얼굴도 작은 편이고 귀여운 탓에 신입생이라고 말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 강단에 선다면 어떨까. 민우는 잠시 상상해 보았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웃으세요?”
“아냐. 아무것도.”
“이상한 생각…… 하신 건 아니죠?”
“설마.”
때마침 한진섭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연주가 알아보고 그쪽을 가리켰다.
민우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들었고, 곧 한진섭이 합석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석사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하지만 민우는 알지 못했다.
바로 그 시각, 상아대에서 자신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 * *
상아대학교 총장 최산호를 주축으로 대학원장 윤민수, 그리고 영어영문학과 학과장 및 통번역전공 주임교수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재단에서 나온 정일수 이사의 모습도 보였고, 국어국문학과 조성진 교수도 자리를 잡았다. 중어중문학과와 일어일문학과 및 디지털콘텐츠학과, 연극영화과 교수들도 함께였다.
실로 기묘한 조합이었다.
전혀 연관이 없는 교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재단 이사와 총장까지. 대학원장이라면 몰라도 총장이 직접 회의를 주재한다는 것은 보통 사안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들 모이셨지요?”
최산호 총장이 나직이 물었다. 흰 머리를 뒤로 넘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이가 예순이 넘었지만 눈빛엔 정력이 넘쳤다.
“다 모였습니다. 총장님.”
“국문과 조성진 선생도 왔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조성진 교수가 손을 슬쩍 들었다. 오늘 회의 안건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총장은 그에게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어 불렀다.
확인을 끝낸 최산호 총장은 정일수 이사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얌전히 듣기만 하겠다는 제스처였다.
그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재단의 입김이 미치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내쫓을 수도 없는 일이라 일단 회의를 진행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짧고 굵게 합시다. 다들 바쁘시니.”
사람들이 둘러앉은 원탁에는 물 한 통과 인쇄물이 놓여 있었다.
인쇄물은 꽤 두꺼웠다. 상단엔 ‘상아대학교 국제번역전공(가칭) 신설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의 회의 안건이기도 했다.
최산호 총장이 마이크를 가까이 당겼다.
“일단 오늘 왜 모였는지는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프린트물에 담겨 있으니 한번 훑어보시고.”
사그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들렸다. 다들 엄숙한 표정으로 회의에 임했다. 특히 영문과 교수들이 그랬다.
“먼저 영문과 학과장님께서 간단히 설명을 해 주시지요.”
가볍게 헛기침을 한 영문과 학과장 유희윤이 발언을 시작했다.
“최근 전문 번역에 대한 요구가 날로 드높아지고 있습니다. 2016년 한강 작가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이후부터 제도적인 부분에도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지요. 정부나 각종 단체에서도 지원 사업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유희윤 교수는 인쇄물의 한 페이지를 지목하며 현재 시행되고 있는 지원 사업 현황과 규모를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학교의 이름을 드높이는 건 물론이고, 수익적인 면에서도 도움이 될 절호의 기회라고 봅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 반응을 살폈지만 반론은 없었다. 유희윤 교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번역은 비단 문학 분야만의 이슈는 아닐 겁니다. 게임이나 모바일 콘텐츠에서도 번역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지요. 현재 우리 학교의 통번역전공은 영문과에 한정되어 있지만, 이 범위를 조금 더 넓힐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하여 전공을 초월하는 종합적인 의미에서의 번역 전공의 신설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동요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미 안건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고 왔으니까. 다만 조성진 교수는 왜 자신이 여기에 불려왔는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학원장 윤민수가 침묵을 깨고 나섰다.
“인가를 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긴 해도 당위성은 충분하니 넘어가고, 역시 신설 전공을 누가 관리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군요.”
“국제화를 고려한다면 당연히 우리 영문과가 맡아야겠지요.”
“크흠.”
불편한 심기가 곳곳에서 표출됐다. 하지만 유희윤 교수는 노련했다. 외국어 관련 전공 교수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타이르듯 말했다.
“사실 누가 관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학제 간의 협력이 없다면 이번 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협동과정처럼 전공별로 교수님을 한 분씩 초빙해서 운영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관리야 뭐 행정상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 뒤로 구체적인 안건들이 오갔다. 전공 정원과 운영 방안, 커리큘럼 등 세부적인 부분까지. 이미 행정적인 부분은 완성이 되어 있었기에 확인만 하는 수준이었다.
거의 정리가 되자 최산호 총장이 눈짓을 보냈다. 유희윤 교수는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남았다며 운을 뗐다.
“단순히 전공을 만드는 건 임팩트가 없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우리 대학은 여러 지방대학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스타 강사가 한 명은 필요합니다.”
“스타 강사요?”
“그렇습니다. 학생들을 유혹할 만한 이름을 가진 유명한 사람.”
“번역 쪽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장삿속이라는 비난을 듣지는 않을까요?”
따가운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유희윤 교수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유명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학교 출신이죠.”
“우리 학교 출신이요? 금시초문이군요. 그게 누굽니까? 영문과에 그런 인재가 있었나요?”
“졸업생들에게 너무 관심들이 없으시군요. 이러니 사람들이 아웃풋 타령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유희윤 교수는 혀를 찼다. 하지만 이내 빙긋 웃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베스트셀러 <더 위자드>를 번역하고 센트럴 북스의 <인문과학총서> 번역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 2017년 큰산번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고, 최근엔 <태엽시계>를 번역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쇼트리스트에 올린 대형 신인…….”
거기까지 말한 유희윤 교수가 고개를 돌려 조성진 교수를 바라보았다.
“거기 조 교수님도 잘 아는 사람이죠?”
“아, 예에. 맞습니다.”
그제야 조성진 교수는 왜 이 회의에 불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떠난 지금, 민우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이야기를 좀 들어보지요. 그가 어떤 학생이었는지.”
유희윤 교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최산호 총장이 턱을 괴며 엄숙히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