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 See you at the top (1) (183/500)


183. See you at the top (1)
2022.04.01.


민우는 내색하지 않고 강단에 섰다. 늘 그래왔듯 마이크를 설치하고 가방에서 펜과 출석부를 꺼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호명과 동시에 잠잠해졌다.

여러 이름이 불리고 대답이 오갔다. 출석부를 따라가던 민우의 눈에 낯익은 이름이 들어왔다.

“차민재.”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민우가 고개를 들어 다시 이름을 불렀다.

“차민재 학생 오늘 안 왔습니까?”

“네!”

“이상하네. 지금까지 결석이 한 번도 없었는데.”

민우가 펜으로 결석 표시를 했다. 그때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요즘 민재 수업에 잘 안 오더라고요. 매번 잔디밭에 누워서 책이나 보고 있고. 과실에도 안 오고요.”

“맞아. 나도 아까 오면서 봤어. 오늘도 잔디밭에 있던데?”

“수석의 자신감인가?”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민우는 일단 출석부를 덮었다.

“낭만을 아는 친구네. 잔디밭에 누워서 책도 읽고.”

“낭만이 아니라 땡땡이 아닌가요?”

“낭만의 본질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출석이라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니 낭만적인 행동이죠.”

“교수님도 학생 시절에 땡땡이치고 그러셨어요?”

학생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만큼 민우는 인기가 많았다. 강의력도 출중했지만 무엇보다도 나이가 젊었기 때문이다.

민우는 가식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오래전은 아니니까 시절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고. 뭐, 가끔 출석 부르고 몰래 뒷문으로 나가서 돗자리 깔고 술 마신 적은 있죠. 요즘도 그러지 않나요?”

“우와. 공부만 엄청 하셨을 거 같은데 의외네요.”

“솔직히 말하면 모범생은 아니었습니다.”

F학점이 몇 개 있어 재수강을 했다는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민우는 웃으며 미리 챙겨온 인쇄물을 학생들에게 전달했다.

“오늘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몇 가지 소개할까 해요. 최근 유럽에서 주목받는 이론인데…… 이런. 벌써 조는 친구들이 있네. 아, 그냥 내버려 둬요. 피곤하면 잠이 보약이지.”

“하하하!”

곧 모든 프린트물이 학생들의 앞에 하나씩 놓였다.

칠판 앞에 선 민우는 마커로 몇 가지 용어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원어를 먼저 적고, 괄호를 넣어 한글로 풀이해 주었다.

“이론이라고 하면 좀 어려운 느낌이 들지만 실제 사례를 분석해 보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걸 오늘 강의 목표로 합시다. 거창하게 어디 가서 써먹는다는 느낌보다는 이해한다는 것에 주력해서요. 책에는 없는 내용인 만큼 여러분들에게 유익할 겁니다.”

민우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론을 소개해 주곤 했다. 그들의 눈높이를 잘 알고 있어 쉽게 강의했고, 학생들은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수업이 끝났다.

“자, 오늘도 수고 많았습니다. 과제는 금요일까지 홈페이지에 올려주시고. 다음 주에 보죠.”

“감사합니다!”

민우는 조교실에 마이크를 반납했다. 앉아 있던 구서현이 웬일로 얌전히 바라보았다.

“선배. 바로 서울 가셔요?”

“아니. 왜?”

“시간 괜찮으심 점심 좀 얻어먹으려구요. 이 근처에 기가 막힌 규카츠집이 생겼는데, 비정규직 노동자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어서요.”

“뜯을 게 없어서 2학점짜리 시간강사 월급을 삥뜯냐?”

“너무하네. 명인대 가더니 사람이 변했네요.”

“하하하. 농담이고. 잠깐 누구 좀 만나러 가야 해서. 다음 주에 사줄게.”

구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손을 들어 보이고 조교실을 나섰다.

민우는 바로 인문대 건물을 나섰다. 그의 목적지는 잔디밭이었다. 학부 시절 자주 가던 곳이라 지도를 보지 않아도 갈 수 있다.

‘민재 녀석이 거기에 있어야 할 텐데.’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민우는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았다. 캔을 주워든 민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캔커피를 하나 더 뽑았다.

나란히 가방에 집어넣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날씨 참 좋다.’

늦봄이라 거닐기 딱 좋은 날씨였다. 민우는 봄기운을 만끽하며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학생들이 드문드문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었지만 돗자리를 깔고 낮술을 하는 학생들도 간혹 보였다.

잔디밭에 도착한 민우는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빙고.’

민우는 어렵지 않게 차민재를 찾을 수 있었다. 책을 얼굴에 덮고 누워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곧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민재가 슬그머니 책을 치웠다.

“어? 교수님.”

깜짝 놀란 차민재가 몸을 일으켰다. 민우는 아까 뽑은 캔커피를 가방에서 꺼냈다.

“커피 마십니까?”

“예.”

캔커피가 날아왔다. 민우는 차민재와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읽고 있던 책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이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학생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책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철학에 관심이 많나 보네요. 그런데 하필 쇼펜하우어를?”

“그냥 손 가는 대로 이것저것 읽고 있어요. 철학을 좋아해서.”

“요즘 학생 같지는 않네. 철학이 죽은 시대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철학이 죽었다는 표현은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시간과 공간이 단절되지 않은 채 쭉 이어진 것처럼, 사상과 사유도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는데 굳이 사형 선고를 할 필요가 있는지…….”

철학서의 한 구절을 그대로 옮긴 듯한 한마디였다. 민우는 감탄을 흘렸다.

‘어딜 봐서 스무 살 학생이라는 거야?’

흥미를 느낀 민우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에 대한 철학적 대화를 시도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심도 있는 대화가 오갔다.

‘논리정연하고 사고의 폭이 넓다.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무엇이든 의문을 품는 자세가 딱 학자 타입이야.’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봄바람이 한차례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칼을 어지럽혔다. 싱긋 웃은 민우가 화제를 돌렸다.

“아, 날씨 좋다. 확실히 이 정도는 되어야 수업도 째고 낮잠을 잘 만하지. 그쵸?”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 나무라려고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도 민재 학생 나이 때는 수업 째고 여기서 술판 벌이고 그랬으니까.”

민우가 고개를 민재 쪽으로 돌렸다.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그건 내 얘기고. 민재 학생은 좀 다르지 않나요? 학점 관리 잘 안 하면 전액장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없을 텐데. 학자금 대출받기 시작하면 나중에 부담이 커집니다.”

“그냥…… 잘 모르겠어요.”

“뭐가요?”

“학교 계속 다녀도 되는지에 대해서요.”

“전공이 마음에 안 들어서?”

민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리를 쭉 펴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만 한다. 민우는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기다려 주었다.

한참 뒤 민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좋은 대학을 갔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집안 형편이 안 좋아서 오긴 했는데…… 여러모로 회의감이 드네요.”

“역시 그때 나한테 질문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군요. 왜 상아대가 아니라 명인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냐고 물었었죠?”

민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민우는 캔을 따고 커피를 쭉 들이켰다.

“실례지만 왜 상아대에 입학하게 된 건지 물어도 되나요? 듣기론 수능 성적이 꽤 좋았다고 하던데.”

“집도 가깝고, 대전에서는 그래도 좋은 대학이잖아요. 타지 생활할 여유가 못됐어요. 대학을 안 가자니 또 그렇고. 무엇보다도…… 교수님 강의 동영상도 우연히 보게 됐고요.”

“역시 봤군요. 무투브에 올라간 거?”

“KOC에 올라온 인문교양강좌도 봤어요. 그리고 교수님이 쓰신 책도 읽었고요.”

차민재가 가방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민우는 깜짝 놀랐다. 그 책은 재작년에 최민식과 공저한 <신화와 인간: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이었다.

책은 한 인간의 사상을 담고 있다. 강연도 마찬가지. 차민재가 책과 강연을 찾아 접했다는 것은 민우의 사상에 감화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짜 뜻밖이다. 책까지 읽었을 줄은 몰랐네.’

왠지 일이 조금씩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에게 질문했다.

“보고 나서 느낌이 어땠는지 평가를 좀 부탁해도 될까요?”

“인상적이었어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표현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교수님 강의를 듣고 전공을 바꾸게 됐어요. 원래는 철학과를 가려고 했는데 국문과로 왔죠.”

“이런, 나중에 졸업해서 벌어먹고 살려면 문사철(文史哲)은 피해야 하는데. 왜 하필?”

민우의 농담에 차민재가 어색하게 웃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환기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차민재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취업하고 싶지 않아요.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목소리가 진지했다. 민우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차민재가 지금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려 한다고.

“하지만 역시 나중에 교수를 하려면…… 명인대나 한일대에 갔어야겠죠?”

“현실을 말하자면 아무래도 그쪽이 가능성이 높겠죠. 학부가 어디 출신이냐가 임용에 큰 영향을 끼치니까.”

“교수님도 교수를 하려고 명인대로 가신 거고요?”

“좀 달라요. 나는 원래 상아대에서 박사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도교수님 권유가 있어서 명인대 시험을 친 거고요. 나는 교수를 하고 싶다기보다는 학문 자체를 하고 싶었지요.”

차민재가 민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잘 이해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학문을 하려면 교수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학문이 큰 목표라면 교수는 목표로 향하는 여러 과정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교수가 되면 물론 좋죠. 생활이 보장되니까. 하지만 나는 교수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뜯어말렸지만 고집을 부리고 많은 걸 포기하면서까지 대학원에 왔죠.”

“어떻게 그럴 수 있었죠?”

“하나뿐인 인생인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죠. 철없는 생각이긴 한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결심을 했던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해요. 그때 그렇게 결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테니까.”

차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막힘없이, 꾸밈없이 민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꺼내놓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차민재는 왜? 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왜 저한테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건가요? 여기까지 오신 것도 왠지 우연은 아닌 거 같고요.”

“내 옛 모습을 보는 거 같아서?”

민우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차민재도 따라 일어섰다. 민우는 바지를 털며 말을 이었다.

“나도 형편이 좋지 않았고, 여러모로 공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거든요. 명인대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쉽지 않았죠. 돈은 돈대로 나가고, 적응하는 것도 어려웠고. 하지만 이렇게 해냈잖아요. 상아대 출신인 나도, 민재 학생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여기에 온 겁니다.”

“하지만 전 대학국어를 듣는 여러 학생 중 한 명일 뿐이잖아요? 일일이 이렇게 상대를 해 주시는 건…….”

“내 입장에서야 그렇지만 민재 학생의 입장에서는 단 하나뿐인 인생이잖아요.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지. 담당 교수가 아니라면 학교 선배로라도.”

민우는 가방을 챙기고 손을 들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러니까 다음 주엔 꼭 수업에 나오도록 해요. FA는 나도 구제해 줄 방법이 없으니. 자, 그럼.”

“교수님!”

민우가 다시 돌아섰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민재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말씀 감사했습니다. 조금 답답한 게 풀린 것 같아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저도 노력하면 교수님처럼, 선배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민우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학생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걸까?

“나는 민재 학생이 생각하는 것처럼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이 더 많이 남아 있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목표의 반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사람이라는 이야긴 나중에 듣죠.”

민우가 쿨하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차민재가 정신을 차렸다. 시계를 확인하고는, 곧장 인문대 건물로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선망하던 사람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차민재는 사흘 만에 다시 강의에 복귀했다.

‘왠지 인연이 계속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야. 앞으로 잘 키워봐야겠어. 어쩌면 내 첫 제자가 될 수도 있겠는데?’

민우는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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