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2) (182/500)


182.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2)
2022.03.31.


“촬영은 어땠어?”

민우가 살갑게 물었다. 수빈은 예쁜 미소를 지으며 민우의 옷매를 바로잡았다. 그림이 좋아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 바라보았다.

“뭐 묻었나?”

“아니, 구겨져서. 아휴, 진짜 정신없이 끝났어. 근데 오빠 톡 안 봤어요? 나 잠깐 촬영 같이한 분들하고 커피 한잔하려고 하는데. 피디님이 해주실 말이 많다고 해서 거절을 못 했네.”

“첫 촬영이었으니 조언 좀 해주시려나 보다. 그럼 나 밖에서 산책 좀 할 테니까 볼일 보고 와.”

“미안요.”

“별게 다 미안하다.”

민우는 수빈의 볼을 살짝 꼬집고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박민우 씨!”

“어, 피디님?”

“이분이 이 선생 남자친구분?”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누군가 싶었는데, 목에 걸려있는 네임 태그를 보고 정체를 짐작했다. 이름과 직책이 적혀 있었다.

장영한 PD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민우는 얼떨결에 손을 잡았다.

“반갑습니다! 장영한이라고 합니다. ‘독서의 밤’을 담당하고 있지요.”

“아아. 네, 안녕하세요.”

“초면에 실례지만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저요?”

민우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뭔가 번지수가 잘못된 거 같았는데 장영한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에서 혼자 기다리시면 심심하실 텐데 같이 커피나 한잔하시면서 말씀 나누시죠. 실은 요즘 민우 씨의 행보에 관심이 많습니다. 허허허.”

그제야 민우는 그가 왜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경한신문이랑 인터뷰 괜히 했나?’

단순한 논리였다. 자신을 섭외할 수만 있다면 베스트셀러 두 작품을 방송 소재로 쓸 수 있게 된다.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거 내가 수빈이 밥그릇까지 뺏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이수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함께 하는 게 좋겠다는 의미였다.

‘수빈이 입장에서도 PD한테 잘 보일 필요가 있으니까. 까짓것 협조해 주자.’

결정을 내린 민우가 답했다.

“좋습니다. 방해가 안 되면 다행이겠는데요.”

“방해라뇨.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이쪽으로 오시죠. 지금쯤 잘생긴 청년이 커피를 준비해 놨을 겁니다.”

“잘생긴 청년이요?”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허윤이 자리를 잡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영한 PD의 주문대로 커피를 네 잔 준비했다.

“에고, 미안해 윤 씨. 내가 커피를 샀어야 하는데. 민우 씨 모셔오느라고 정신이 없었구만.”

“아닙니다. 가끔은 제가 사야죠. 매번 피디님께 얻어 마시기도 죄송스럽고.”

“그럼 다음에 거하게 얻어먹어 볼까? 참치는 어때?”

“좋죠.”

사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다. 무명 아역 배우 시절부터 알음알음이 있었다. ‘옆집 아저씨’라고 불릴 정도로 장영한은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허윤이 민우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연예계의 신사라는 별명답게 허윤은 일어서서 정중히 인사했다. 잠시 그의 외모에 감탄하고 있던 민우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박민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성함이?”

“어? 저 모르세요?”

“제가 TV를 잘 안 봐서요. 죄송합니다. 하하…….”

확실히 최근에는 TV와 담을 쌓긴 했다. 어떤 걸그룹이 나오는지도 잘 모른다. 점점 아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놀림을 받곤 하지만, 역시 그 시간에 논문을 보는 게 더 즐거웠다.

“윤 씨 더 분발해야겠는데? 최근에 잘나간다고 방심하면 큰일 나겠어. 허허허.”

“그러게요. 피디님이 힘 좀 써 주십쇼.”

“영화도 한번 해 보라니까. TV랑 스크린은 또 다른 맛이 있다고.”

“좋은 시나리오가 와야 하죠.”

사담이 길었다. 허윤이 머쓱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허윤입니다. 으음, 아역 배우 출신이고요. 여기 장 피디님하고는 예전부터 인연이 있어서 같이 하고 있습니다. 마침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러셨군요.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우리 수빈이 잘 부탁드려요.”

“잘 부탁드릴 것도 없이 잘하시던데요? 과연 명인대 나오신 평론가는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하하하!”

허윤이 과장되게 웃었다. ‘우리 수빈이’라는 말에 마음이 쓰렸던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저렇게 완벽한 여자에게 애인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서로 인사를 마치고 네 사람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좌장은 자연스레 장영한이었다.

“얼마 전에 소식을 들었는데, 좋은 일이 있으시다지요? <태엽시계>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최종후보작에 올라갔더군요. 이쪽에서는 꽤 화제였습니다.”

“번역의 잘됨을 떠나서 작품 자체가 좋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수상까지 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요.”

“너무 겸손하시네. 번역이 절반 이상은 먹고 들어갈 텐데요? 김영화 작가 작품이 그렇잖습니까. 은밀하게 풍기는 독특한 냄새가 있는데, 그걸 외국어로 잡아내는 과정이 굉장히 어렵다는 게 업계 중론이죠. <태엽시계>가 정점이었고.”

“민망할 정도로 칭찬을 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어? 잠깐, 잠깐만요. 민우 씨가……?”

허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태엽시계>가 지나가더니 <더 위저드>가 떠올랐다. 그리고 <사각 살인>까지.

그 세 책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번역가가 민우였다는 것.

“혹시 번역가 박민우 씨가 민우 씨인가요?”

“맞습니다. 제가 그 박민우입니다.”

“와! 이번에 <더 위저드> 3부 다시 번역하신다는 소리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데요. 저 <더 위저드> 완전 좋아하거든요! 2부는 출판사 잘못 만나서 완전 말아먹긴 했지만…….”

허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 애 같은 모습에 장영한 PD와 이수빈이 웃음을 터트렸다.

민우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애착도 많이 가는 작품이네요. 2부는 사정상 번역을 하지 못했지만 3부는 열심히 해 볼게요. 기대해 주세요.”

“민우 씨만 믿고 있겠습니다.”

“허, 이거 이야기가 그쪽으로 새면 안 되는데. 윤 씨. 잠깐 진정하고 민우 씨 좀 나한테 양보해. 응?”

허허 웃은 장영한 PD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그는 시원한 성격만큼 말을 돌려서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초면에 오래 잡아두는 것도 실례고 하니까. 괜찮으시면 저희 프로그램에 한번 나오시죠. 가벼운 마음으로. <태엽시계>와 <더 위저드>를 다루고 싶습니다. 2회, 아니 3회 분량까지 가능하겠네요.”

안 그래도 분야를 넓혀볼 계획이었는데 좋은 기회가 왔다. 장영한 PD는 큰 그림을 그렸다. 시청자 반응이 좋으면 고정으로 출연시킬 생각까지 했다.

“프로그램에 나오라는 건 출연해 달라는 말씀이시죠? 방청객이 아니라?”

“당연하죠. 방청객을 이렇게 어렵게 모시는 방송국이 어딨습니까?”

명함을 받아든 민우가 난색을 표했다.

“제안은 감사한 데 아무래도 요즘 스케줄이 좀 많아서 시간이 나려나 모르겠네요. 번역 일도 많고 강의도 나가야 해서요.”

“바쁘신 거야 익히 들어 알고 있지요. 박사과정도 밟고 계시니까 더더욱 짬이 안 나실 거고.”

하지만 장영한 PD는 능구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그였다. 정말 여러 유형의 출연자들을 상대해 왔다.

“정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건 민우 씨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공중파 타는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서로 윈윈하자는 거지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수빈의 경우는 정말 운이 좋아서 기회를 잡은 것이지, 보통의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하지만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공명심이 적은 데다가 부담이 많이 되는 자리였으니까.

그때 수빈이 민우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요!’

수빈은 눈빛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석사 1학기 시절부터 언제나 곁에서 옳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그녀였다. 하지만 민우가 결심을 내린 원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허윤이었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이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우도 남자였기에 허윤의 그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잘난 여친 둔 것도 피곤하네. 내 여자는 내가 지켜야지 별수 있나.’

민우가 명함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좋습니다. 출연하겠습니다. 대신 월요일, 수요일은 출강 때문에 촬영이 어렵습니다. 그 정도는 양해될 수 있을까요?”

“다음 촬영은 금요일에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요.”

“다행이네요.”

“그럼 모레쯤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대본이나 컨셉 같은 걸 미리 보셔야 도움이 될 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장영한 PD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윤도 따라 일어섰지만, 왠지 자리에 미련이 남은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수빈에게 닿았다.

“이 선생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 촬영 때 뵙겠습니다.”

“예, 그때 같이 뵙지요.”

대답을 한 건 이수빈이 아니라 민우였다. 그는 허윤을 향해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이것이 바로 가진 자의 여유라는 듯이.

* * *

“아까는 왜 나 대신 대답했어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이수빈이 물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게슴츠레 눈을 뜨며 수빈을 쏘아봤다.

“진짜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묻지.”

“눈치 백 단인 줄 알았는데 허당이네. 허윤 그 사람이 너한테 반한 것 같아서 선 좀 그어줬다.”

“엥?”

수빈은 깜짝 놀랐다. 반응을 보니 진짜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오해겠지. 그 사람 배우인데 왜 날…….”

“배우는 일반인한테 반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어? 다른 놈들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은 좀 신경이 쓰이네. 인성도 제법 괜찮아 보이고. 무엇보다도 얼굴이 되니까.”

“평소엔 그런 걱정 안 했고?”

수빈이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민우가 웃으며 딴청을 피웠다.

“뭐, 나한텐 스무 살 풋풋한 후배들이 있으니까. 하하하.”

“오빠!”

이수빈이 소리를 꽥 지르자 택시기사가 움찔했다. 차가 살짝 흔들렸다. 당황한 수빈이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낄낄거리고 웃던 민우는 새침한 수빈의 표정을 보고는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했다.

“맞다. 그런데 그 친구는 어떻게 됐어요? 똑똑한 친구 있다고 했잖아. 상아대 수석으로 들어왔다던.”

“아, 민재? 그냥 그래. 요즘은 아예 입도 뻥긋 안 하더라고. 따로 불러내기도 좀 그렇고.”

“왜 좀 그래요? 예린이 뒷바라지는 그렇게 열심히 하는 양반이.”

“사정을 대충 알 것 같기도 해서. 듣기로는 수능 점수가 굉장히 높다더라. 그런데도 상아대로 입학한 거면 거의 답은 하나잖아.”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수빈이 답을 꺼냈다.

“가정형편?”

“아무래도 그렇지. 결국, 본인한테 민감한 이야기가 될 공산이 커서 미루다 보니 벌써 4월이네.”

“그래도……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요?”

“다른 이유?”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턱을 괴고, 마치 탐정이 된 양 행동하고 있었다.

“학부제라면 몰라도 상아대는 학과제잖아요. 본인이 선택해서 들어왔다는 거면, 뭔가 입학 전에 오빠한테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어떤?”

“가령 오빠 무투브 강연을 본 거라든지.”

민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 만약 그렇다면 민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은 좀 더 심각해졌다.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준 거라면…….’

민우는 고민에 잠겼다.

강연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서지훈 교수의 잔소리가 이렇게 마음에 와닿은 날이 또 없었다.

* * *

다음 날, 민우는 수업을 위해 대전으로 내려갔다. 가장 먼저 조교실에 들러 마이크를 받았다.

보통은 반장을 하나 뽑아 사전에 준비를 시키지만, 민우는 스스로 했다. 어려운 일도 아닐뿐더러 학생들의 쉬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졸지 말고 수업 잘하세요.”

구서현 조교는 늘 그렇듯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이따 보자는 말과 함께 조교실을 나선 민우는 바로 2층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민재랑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

대전으로 내려오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사정이 어떻든 이야기를 한번 들어볼 필요는 있었다. 담당 교수로서가 아니라면 학교 선배로라도 관심을 주고 싶었다.

그렇게 민우가 앞문을 열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강단에 섰다. 그런데.

‘어?’

늘 앉아 있던 민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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