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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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1)
2022.03.28.
달이 바뀌자 봄꽃이 완연히 피기 시작했다. 대학원 강의와 번역, 그리고 상아대 출강 덕분에 3월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명인대 박사과정 수업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민우가 주도했다.
학회에서 발표했던 경험이 컸다. 그의 말에는 늘 논리와 원칙이 있었다. 때로는 위트를 던지는 여유까지 보였다.
상아대 강의도 만족스럽게 진행됐다. 시간이 갈수록 학생들의 참여가 늘어서 민우도 열정적으로 강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민재가 요즘 조용하단 말이지.’
민우는 강의를 하면서 자꾸 차민재가 신경 쓰였다. 민재는 처음과는 달리 발표를 하지 않았다. 그저 앉아서 수업만 들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완전히 소극적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민우는 여전히 그가 했던 질문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
‘한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 봐야 하나? 술은 안 좋아하는 거 같고. 뭐 어떻게 풀어가야 하지? 이거 경험이 없으니…….’
매번 그런 고민을 하며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민우가 줄창 생각만 한 건 아니었다. 서지훈 교수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이 한마디였다.
“그건 네가 풀어야 할 숙제잖아. 왜 답지부터 보려고 하냐?”
그렇게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4월 초입.
빌라 앞에 깨끗한 흰색 차가 들어섰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민우가 차에 올랐다. 오늘은 지음사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레아가 기어를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면서 민우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매니저님. 혹시 요즘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갑자기 왜요?”
“가끔 멍해지실 때가 있으신 거 같아서요.”
자기 일에 성실한 비서구나. 그런 평가가 절로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민우는 가벼이 웃었다. 그녀에게 민재에 대해서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일까.
“그냥 뭐, 일이 좀 많아서 그렇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레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운전에 집중했다.
곧 지음사 회의실에서 ‘인문과학총서’ 건으로 회의가 열렸다. 민우는 현재 번역 상황을 설명했고, 송승현 실장이 서류를 검토한 다음 말했다.
“현재 1부 2권까지 번역이 완료되어 있는 상황인데…… 당초 계획이 좀 바뀌었어요. 5권 선출간이 아니라 1부 10권이 완성되는 대로 출간하기로 정해졌습니다.”
“센트럴 북스 쪽의 의견인가요?”
“그렇죠.”
“그럼 출간이 내년으로 미뤄질 가능성이 있겠네요. 좀 늦어지면 내후년 초가 될 수도 있겠고.”
그렇게 대답하며 민우는 달력을 넘겨보았다. 내후년이라는 말에 송승현 실장의 표정이 변했다. 안 좋은 쪽으로.
센트럴 북스 인문과학총서는 2부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가 총 10권이고, 각 권당 할당된 번역 기간은 2개월이다.
다시 말해, 1부를 모두 번역하려면 20개월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현재 2권까지 번역이 끝났으니 남은 8권 번역은 16개월이 걸리게 된다. 그렇다면 2019년 8월 중에야 번역이 완료된다.
완료된다고 해서 모든 작업이 끝나는 건 아니다. 검수와 마무리작업 등을 거치면 2020년에 출간이 될 가능성이 컸다.
송승현 실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번역 템포를 더 빠르게 하는 건 불가능한가요?”
“아무래도 기술번역이다 보니까 속도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참고해야 할 문헌도 많고요. 소설이나 에세이를 번역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민우는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송승현 실장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루카치의 유품을 이용한다면 한두 달 안에 뚝딱 끝낼 수 있긴 하지만…….’
민우는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날림번역이라는 인상을 주기 싫었고, 또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센트럴 북스 측 의견이니까 좀 천천히 가도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완성도에 더 신경을 쓸 수 있게 되니까요. 번역 기간에 대해서는 그쪽에서 양해를 해줄 거 같은데.”
민우가 레아를 바라보았다. 한번 확인해 보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제임스 편집장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 부분을 메모했다.
송승현 실장이 난색을 표했다.
“우리 쪽도 사정이 있어요. 아무래도 해를 넘어가게 되면 매출이나 실적 면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좀 힘들겠지만 민우 씨가…….”
덜컥!
문이 갑작스레 열렸다. 고두열 과장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실장님!”
“뭐죠? 회의 중인 거 뻔히 알면서.”
“아, 죄송합니다. 그게…….”
고두열 과장을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는데, 급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모습은 의외였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지금 맨부커 홈페이지에 최종후보작이 발표됐는데…… 있습니다! <태엽시계>가 들어갔어요!”
“뭐라고요?”
송승현 실장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당사자인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둘러 회의실을 나섰다.
“이쪽입니다!”
고두열 과장은 자신의 컴퓨터로 가 맨부커상 홈페이지를 보여주었다. 세 번째 섹션에 <태엽시계>의 표지가 분명히 걸려 있었다.
출판기획실 직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고두열 과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롱 리스트에 올라갔을 때 설마 했는데, 이거 수상을 기대해도 되는 거 아닐까요?”
“일단 진정하세요. 고 과장님은 지금 바로 김영화 작가님께 연락해서 이 사실 알려드리세요. 언론 대응도 준비하고.”
“예!”
송승현 실장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녀는 민우를 바라보았다.
“축하합니다. 끝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됐군요.”
“조금 갑작스럽긴 한데 기분은 좋네요.”
“반응이 평소와는 좀 다른데?”
“어떤 점이요?”
“뭐 누구 덕이다, 운이 좋았다 이런 뻔한 대답을 할 줄 알았거든요. 민우 씨라면.”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니까요.”
곧 주변 직원들이 민우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끝까지 가봐야 아는 일이지만, 민우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귀신같이 알고 연락을 하셨네.’
발신인은 경한신문 문화부의 박윤지 기자였다. 민우는 잠시 자리를 옮겨 전화를 받았다.
“네, 기자님. 안녕하세요.”
― 축하드려요 민우 씨. 소식 들으셨죠?
고두열 과장이 아니었다면 아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민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저도 막 확인하는 길이에요. 좀 얼떨떨하지만 기분은 좋습니다.”
― 후훗. 그럼 제가 왜 전화 드렸는지도 알고 계시겠네요.
인터뷰 요청일 것이다. 평소였다면 하겠다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방금 송승현 실장이 언론 대응을 준비시킨 걸 떠올렸다.
“제가 출판사 쪽하고 이야기해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 저희 쪽하고 꼭 먼저 해 주셔야 해요?
“걱정 마세요.”
전화를 끊은 민우는 고두열 과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언론 대응 매뉴얼을 작성해 민우에게 인쇄해 주었다.
“인터뷰 잘 부탁드립니다.”
“몇 번 해봐서 괜찮을 거예요.”
“하긴, 민우 씨는 그런 쪽으로는 출중하시니까.”
고두열 과장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민우는 순간 움찔했다.
‘이 양반이 웬일로 칭찬을 다 하지?’
민우는 매뉴얼을 접어 품 안에 넣고 회의실로 돌아왔다.
맨부커상 관련 소란이 정리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상부 보고를 마친 송승현 실장이 다시 회의실로 돌아온 건 한 시간 뒤였다.
“뜻밖의 일로 회의가 지연됐네요. 회의 재개할게요.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메모를 확인한 레아가 대답했다.
“인문과학총서가 2020년에 출간되면 실장님 인사고과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요?”
“그런 의미 아니었나요? 한국에서는 에둘러 말하는 게 보편화되어 있는 것 같아서 핵심을 정리해 드린 겁니다만.”
“아니, 그게 아니라…….”
송승현 실장이 당황하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약점이 없는 사람 같았는데, 유독 레아에게는 약했다. 사고방식이 서구적이라서 그런 건가 싶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민우가 중재에 나섰다.
“알겠습니다. 그럼 2019년 출간에 맞추게끔 제가 좀 더 속도를 내 볼게요.”
“괜찮겠어요?”
“마침 좋은 일도 있는데 선심 좀 쓰겠습니다.”
민우가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덕분에 회의는 퇴근 시간에 맞춰 끝났다.
그날 밤, 민우는 송승현 실장과 레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에는 식사하며 서로의 의견을 공유했다.
“그런데 실장님. 해외 번역서는 아직 결정이 안 됐나요?”
민우가 묻자 송승현 실장은 포크를 내려놓고 물잔을 들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아까는 너무 정신이 없었네요. 이번에는 방향을 조금 다르게 잡아볼까 합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작년까지는 프로젝트팀을 만들고 거기서 작품을 선정했는데…… 이게 좀 효율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민우 씨에게 맡겨볼까 해서요.”
“저한테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 해도 번역하는 사람과 케미가 맞아야 하잖아요? 게다가 민우 씨는 문학을 전공했으니 안목도 있을 테고.”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번역가에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안목과 취향이 적절히 만나면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은 자명하다.
송승현 실장이 계속 말했다.
“이번엔 기성작가가 아니라 신인들 위주로 작품을 구성했어요. 리스트를 보내줄 테니 한번 검토해 줄 수 있나요?”
“어려운 일은 아닌데, 어깨가 좀 무거워지는 느낌이네요.”
“엄살이 심하군요. 좀 더 자신감을 가지도록 해요.”
마치 선배가 후배를 쪼는 듯한 한마디였다.
* * *
“수고하셨습니다!”
방송 스태프들이 박수를 치며 자리를 정리했다. 촬영이 모두 끝난 것이다.
그제야 이수빈은 가슴에 손을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50분 동안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다.
‘그냥 안 할 걸 그랬나?’
그런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도 문학평론가라는 이름으로 계속 출연을 해야 했으니까.
40대 중반의 사내가 이수빈에게 다가왔다. 그는 ‘독서의 밤’ 담당 PD인 장영한이었다.
“수빈 씨! 이야, 놀랐어. 응? 카메라가 정말 잘 받던데? 벌써부터 시청자들 반응이 빤히 보일 정도야. 허허허.”
“너무 정신이 없네요. 피디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나야 늘 하는 일인걸.”
“이수빈 선생님.”
그때 같이 출연한 남자 배우가 말을 걸었다. 날렵한 턱선과 지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역 배우 출신인 허윤이었다.
그는 한일대 경영학과 출신이었는데, 명문대 출신이라는 배경과 탄탄한 연기력으로 최근 주가가 올라가고 있는 젊은 배우였다.
매너도 훌륭했다. 장영한 PD는 이수빈에게 반말하는 것에 비해, 그는 수빈에게 선생님이라 불렀다.
“첫 출연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하시던데요? 배우로 전향하셔도 되겠어요.”
“아녜요.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 주세요.”
“저도 뭐 아는 거 별로 없는데요. 오히려 책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전문가시니까 제가 배워야죠. 저 책 정말 좋아해요. 진짜로. 이 코너도 제가 소속사에 부탁해서 출연하게 된 거구요. 책 추천 많이 해주세요.”
“그러셨구나. 네, 그럴게요.”
수빈이 싱긋 웃자 허윤은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괜찮으시면 위에서 커피나 한잔하고 가실까요?”
사람 여럿 잡을 살인미소를 지으며 허윤이 제안했다. 이수빈은 난색을 표했다.
“그게…… 이따 남자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해서요.”
“아, 애인이 있으셨군요.”
살짝 서운한 목소리였다. 물론 이수빈이 느낄 정도로 티가 나지는 않았다. 그때 장영한 PD가 나섰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오늘 촬영 피드백도 하면서 한잔하자고. 커피는 내가 사지. 수빈 씨한테 해 줄 얘기가 너무 많아서 그래.”
결국, 수빈은 제안을 뿌리치지 못했다. 민우에게 톡을 하나 남기고 그들과 함께 KBC 1층 로비로 올라왔다. 바로 카페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수빈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피디님, 잠깐 남친한테 얘기 좀 하고 올게요. 톡을 안 본 거 같아서요.”
“아? 벌써 왔나?”
장영한 PD의 시선이 이수빈을 따라갔다. 그 종착역에 있는 민우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어디였더라…….’
곧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맞아. <태엽시계>를 번역한 그 사람이구나. 이름이 박민우였던가?’
장영한 PD는 ‘독서의 밤’을 10년 이상 이끌고 있었다. 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민우의 프로필을 확인한 장영한 PD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이거 좋은 아이템 하나 나오겠는데?’
핸드폰을 집어넣은 장영한 PD가 허윤에게 부탁했다.
“윤 씨. 자리 잡고 커피 석 잔, 아니지. 네 잔 부탁해도 될까?”
“네 잔이요?”
허윤이 그렇게 되물었지만, 장영한 PD는 이미 민우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