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시간강사 박민우 (3)
(180/500)
180. 시간강사 박민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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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시간강사 박민우 (3)
2022.03.25.
하지만 역시 쉬운 일이란 없는 법이다.
앞자리에 있는 학생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민우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뒤에 모여 앉아 있는 학생들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딴짓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떠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생각했다. 자신도 그런 때가 있었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강의 시간에 출석만 부르고 도망쳤던 어린 시절이.
그래서 민우는 웃을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다그치는 게 아니라, 저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뭐에 관심이 있는지 들어주는 거겠지.’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간 그런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실제로 메일이나 면담을 통해 어려움을 토로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추세니까.
민우는 그들의 면면을 확인하고 다시 마이크를 들어 강의 오리엔테이션을 이어갔다.
“일단 우리가 이번 학기 동안 공부해야 하는 강의의 이름은 대학국어입니다. 대학국어라고 하니까 좀 딱딱하고 어려운 느낌이죠?”
“네!”
“실제로 여러분들이 배우게 되는 건 그렇게 어렵거나 지루한 내용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 학기 동안 공부할 대학국어는 크게 말하기와 쓰기 부분으로 나뉘는데, 어떻게 하면 더 잘 말할 수 있는지, 그리고 글을 더 잘 쓸 수 있는지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는 과정이 될 거예요.”
민우가 손짓을 섞어가며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루카치의 만년필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감이 더욱 붙었다.
그때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이 강의에서도 조별 발표가 있나요?”
“아뇨. 그런 건 안 할 겁니다. 저도 여러분들 나이에 조별 발표를 많이 해 봤는데 정신 건강에 그렇게 이롭진 않더라고요.”
“하하하!’
학생들이 재미있다는 듯 떠들었다.
민우는 조별 발표라는 형식에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 비단 웹상에서 조별 발표에 대한 유머 게시물이 넘쳐나서가 아니었다.
물론 조별 발표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팀워크 향상, 의견 교환, 다양한 관점에서의 현상 분석.
‘하지만 현실은 달라. 누군가 다 떠안게 되는 경우가 많지. 쓸데없는 짓이야.’
그럼에도 강사와 교수들이 조별 발표를 선호하는 이유는 강의 자체가 편해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말할 시간에 학생들이 대신 발표를 하고 평가를 하니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또한, 과제물 평가를 조별 발표로 대체함으로써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물론 조별 발표가 필요한 전공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민우는 국문과에서 조별 발표를 하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다. 서지훈 교수도 학부 때 조별 발표를 시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시간에 개인 과제물을 내주고 피드백을 해 주는 게 훨씬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거야.’
민우는 자신의 편함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느꼈던 학문적 경험들을 후배들에게 어떻게 나눠줄까 궁리만 했다.
‘한 학기가 좀 길어 보여도…… 내가 가진 지식을 전해주기에 짧은 시간일지도 몰라. 적어도 시간 낭비는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댔다.
“우선 말하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볼까요. 말하기란 무엇이고 말하기라는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요?”
역시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한쪽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민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으레 이런 상황에서는.
“강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에겐 보너스 점수를 주겠습니다. 이따 추가로 설명하겠지만 평가 항목 중 참여 항목이 있는데, 전체 평가 중 10퍼센트 정도가 될 거예요.”
“저요!”
민우의 바로 앞에 있던 여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다. 아무리 질풍노도의 1학년 신입생이라고 해도 한두 명 정도는 학점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민우가 그 학생을 지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기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겁니다!”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아주 좋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음…… 말빨?”
“하하하하!”
학생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모두 같은 과다 보니 다들 교내, 교외 오리엔테이션에서 친목을 다졌다. 그래서 수업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민우가 원하는 건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 경직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
민우도 웃음을 터트렸다.
“말빨도 물론 필요합니다. 말빨이란 결국 말의 힘인데,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말의 힘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거든요. 자, 지금 얘기한 학생 학번이 뭐죠?”
“181026입니다!”
“좋아요. 윤지영 학생. 앞으로의 활약 기대하지요.”
민우는 출석부 상단에 그녀의 학번을 적었다. 나중에 한꺼번에 정리해서 강의 참여 항목에서 추가 점수를 줄 예정이었다.
민우가 펜을 놓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윤지영 학생의 의견도 좋았지만 다른 의견도 좀 들어볼 필요가 있겠네요. 다른 생각 있는 사람?”
“상대방의 수준에 맞게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방금 누구죠?”
안경을 낀 남학생이 슬쩍 손을 들었다. 차분한 인상에 왜소한 체구를 지닌 학생이었다. 딱 봐도 공부만 하게 생긴 인상이었다.
민우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왜 상대방의 수준에 맞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공감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공감대가 형성되면 어려운 내용이라도 어떻게든 이해를 하려고 하니까요. 자연스럽게 배우는 자세를 취하게 되죠. 아는 내용은 더욱 재미있게 들을 수 있고요. 대화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오~”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역시 수석은 다르다’, ‘전액장학생의 위엄이다’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민우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원하는 대답이었다.
‘똑똑하게 생겼네. 약간 애어른 같은 느낌인데. 뭐 하는 친구지?’
민우는 그 학생에게 호감이 갔다.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의 말치고 대단히 성숙한 느낌이었고, 말하기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민우가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학생 이름이?”
“차민재요.”
“차민재.”
민우는 그 학생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그리고 다시 단상으로 돌아왔다. 구서현 조교에게 그의 정보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방금 윤지영, 차민재 두 학생이 아주 좋은 대답을 해 줬습니다. 말의 힘과 공감 유도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매우 중요한 것들이죠. 글쓰기도 마찬가집니다. 결국, 형식만 다를 뿐 내용은 같거든요. 대학국어 강의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공부해 보도록 하지요. 서론은 이쯤 하고…… 지금부터 강의 개요를 설명할 텐데요. 모두 강의계획서 꺼내 보세요.”
으레 이런 순간에는 강의계획서를 가지고 오지 않는 학생들이 있는 법이다. 민우는 미리 인쇄해 온 계획서 열 부를 나눠주었다.
강의계획서는 담당 교수 정보와 강의의 목표, 내용, 평가방법, 세부 강의 일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우는 항목별로 설명했다.
“우선 기본 교재는 필히 구해야 합니다. 중간고사는 모든 반이 동일한 시험문제로 시험을 치거든요. 공통 시험입니다. 물론 선배들에게 교재를 물려받아도 됩니다. 조금 개정이 되긴 했지만 시험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거든요. 저도 상아대 출신이라 잘 압니다.”
“와!”
“교수님 몇 학번이세요?”
“08학번입니다. 석박사는 다른 곳에서 하고 있긴 합니다만 아마 앞으로 여러분들과 자주 보게 될 겁니다.”
학생들의 눈빛과 태도가 달라졌다.
단순히 나이 젊은 훈남 교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학교 선배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3연이 학연, 지연, 흡연이라고 했던가.
미소를 지으며 민우가 설명을 계속했다.
“아무튼, 참고문헌에 넣어 놓은 것들은 이곳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자료들인데요. 관심이 있는 분들만 보면 됩니다. 시험이나 과제에 참고문헌을 사용하진 않을 거니 무리해서 구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문서 값이 비싼 데다가 특별히 관심이 있거나 대학원에 진학할 사람이 아니면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민우는 상아대 도서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장서 위주로 참고문헌을 구성했다.
다음으로 평가 항목 부분을 설명했다.
“출석 10, 중간고사 30, 기말고사 40, 과제 10, 수업참여 10. 이렇게 배점을 해서 최종 성적을 낼 생각입니다. 설명은 이쯤 하고 질문을 받을게요. 궁금한 거 있으면 손들고 질문해 주세요.”
바로 서너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민우가 먼저 든 사람을 지목했다.
“과제는 어떤 식으로 나오나요?”
“말하기와 쓰기 분야를 나눠서 각각의 과제가 나갑니다. 준비한 내용을 가지고 3분 스피치를 하거나, 에이포 두 페이지 이내의 분량으로 에세이를 씁니다. 평가는 조교가 아니라 모두 제가 직접 해서 피드백까지 해 줄 겁니다.”
민우가 다음 학생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까 좋은 대답을 했던 차민재라는 이름의 학생이었다.
“교수님은 왜 상아대 대학원이 아니라 명인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계신가요?”
순간 강의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전혀 뜻밖의 질문이었다.
민우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차민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강의를 모두 마친 민우는 마이크를 회수하고 강의실을 나섰다. 따로 찾아와 질문하거나 말을 거는 학생들은 없었다.
조교실로 들어오자 구서현이 일어나 민우를 맞았다. 옆에는 다른 조교도 있었는데, 민우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첫 강의는 어떠셨어요?”
“그냥 그랬어.”
민우는 마이크를 넘겨주고 한옆에 마련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생글 웃은 구서현이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서 민우에게 건넸다.
“고마워.”
“후배들이 되게 좋아하지 않아요? 선생님 은근 우리 과에서 선망의 대상인데.”
“이제 막 학교에 들어온 애들이 나에 대해 뭘 알겠어?”
“그래도 알지도 모르죠. 선생님 한때 무투브 스타였잖아요.”
“스타는 무슨. 하늘의 별은 바다의 모래알보다 많은 법이다.”
썰렁한 말에 구서현이 정색했다. 이제 선배도 아재가 다 되어 간다면서 혀를 찼다. 하지만 으레 그래왔기에 민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민우가 물었다.
“너 혹시 차민재라는 학생 알아? 그 안경 끼고 체격 작은 친구.”
“모를 리가요. 걔 좀 유명해요.”
“그 친구에 대해 더 아는 거 없어? 입학 서류를 보여 달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고.”
동료 조교를 힐끗 바라본 구서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건 안 되죠. 학생 신상인데. 어디 감히 일개 시간강사가.”
“역시 그런가.”
정교수라면 몰라도 시간강사에게는 학생 정보 열람권이 없다. 물론 친분을 내세워 구서현을 구워삶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걔는 왜요?”
“좀 특이한 친구 같아서. 아까 수업 마무리할 때쯤에 엉뚱한 질문을 하더라고.”
“엉뚱한 거?”
“내가 왜 상아대가 아니라 명인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거냐고 묻더라.”
“으잉?”
구서현은 무슨 일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민우는 팔짱을 낀 채 믹스커피를 천천히 들이켰다. 생각이 복잡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아예 차민재와는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흐응, 대체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그 꼬맹이 입시 성적은 되게 좋은 편이에요. 상아대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거든요.”
“어느 정도인데?”
“저도 정확히는 모르죠. 입시 자료니까. 시간강사나 행정조교나 말단인 건 매한가지지.”
그것을 시작으로 구서현은 행정조교의 처우에 대해 불만을 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우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명인대에서 공부를 하게 됐냐는 질문을 던질 때 차민재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으니까.
그때 구서현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민재한테는 뭐라고 대답했는데요?”
“그냥 대강 말하고 넘어갔지. 더 큰 곳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그런데 표정이 별로 안 좋더라. 대답이 잘못된 건지…….”
“그건 대답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 학생이 문제인 거죠. 아무튼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니까! 선생이 어디서 뭘 하든 지들이 뭔 상관이람?”
“쯧, 상관이 있지 왜 없냐?”
민우가 구박하자 살짝 놀란 구서현이 입을 꾹 다물고 민우를 쳐다보았다.
“딱 봐도 상아대에서는 답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잖아. 큰 뜻을 품고 우리 학교에 입학을 했다면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지.”
“그럴 거면 더 좋은 대학을 가든가! 우리 학교가 뭐 어때서. 칫. 조성진 선생님도 우리 학교에서 공부 다 마치고 잘만 교수하고 계신데.”
“흥분하지 말고. 암튼 커피 잘 마셨다. 다음에 보자.”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서 조교실을 나섰다. 구서현이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나서 주었다. 존경하는 선배에 대한 예우였다.
인문대 건물을 나선 민우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세 통 와 있었다. 대학국어를 듣는 여학생들이었다.
각종 이모티콘에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는 둥, 사적인 내용이 많았다.
‘이거…… 수빈이가 보면 큰일 나겠는데?’
그 이후로도 사심이 느껴지는 멘트들이 줄을 이었다.
민우는 구서현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오는 내내 그의 표정엔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 교수님은 왜 상아대 대학원이 아니라 명인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계신가요?
차민재의 질문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