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시간강사 박민우 (2)
(179/500)
179. 시간강사 박민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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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시간강사 박민우 (2)
2022.03.24.
상아대학교 입구 정류장에서 내린 민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약간 오래된 건물과 신축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평범한 캠퍼스였다. 그래서 반가웠다.
‘여전하구나. 여기도.’
개강 첫날이라 학생들로 가득했다. 민우는 그들을 따라 정문을 지나쳤다.
그때 학생회관에 있는 편의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빈손으로 가기는 좀 그렇지? 서지훈 선생님도 인사를 제대로 하라고 하셨으니까.’
민우는 편의점에 들러 과일주스 세트를 샀다.
상아대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건 본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조성진 교수의 도움이 컸다.
그는 상아대 국문과에서 현대시를 담당하는 중년이었다. 난해한 시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수업으로 인기가 많은 교수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상아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모두 마친 사람이었다. 그래서 민우가 명인대로 떠날 때 많이 아쉬워했다. 민우를 끔찍이 아꼈으니까.
어느새 조성진 교수 연구실 앞에 선 민우는 넥타이를 고쳐 매고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에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오, 박민우! 진짜 오랜만이다. 어디 보자. 이야, 서울 올라가더니 얼굴 완전 폈는데?”
뱃살이 푸짐한 조성진 교수가 껄껄 웃으며 민우를 맞았다. 못 본 사이에 살이 더 찐 것 같았다. 와이셔츠의 단추가 터질 듯 말 듯 했다.
민우는 정중히 악수하며 허리를 숙였다. 조성진 교수는 민우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요즘 아주 잘나간다면서?”
“하하하. 아닙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잘 지내셨나요?”
“잘 지냈겠냐? 서지훈 선생까지 명인대로 가버려서 아주 홍역을 치렀지.”
조성진 교수는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표정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원은 교수 보고 오는 애들이 많잖아. 서지훈 선생 나가니까 현대소설 쪽 애들 거의 다 휴학해 버리더라고. 쓸 만한 애들은 서지훈 선생 따라간다고 하고.”
“아직 다들 준비 중인가 봐요? 이번 석사 신입생 중엔 우리 학교 출신이 없는 거 같더라고요.”
“명인대 입시가 좀 어려워야지.”
조성진 교수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린이가 붙은 건 좀 의외긴 해도 1년 정도는 준비해야 붙을까 말까 아니냐. 너야 알아주는 노력파니까 걱정은 안 했는데…… 아무튼 후배들 가면 잘 좀 챙겨줘. 자리 잘 잡았다면서?”
“문제없습니다. 후배들 오면 잘 챙겨줄게요.”
아주 든든한 한마디였다. 너털웃음을 터트린 조성진 교수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이구, 내 정신 좀 봐라. 오랜만에 온 손님을 이렇게 오래 세워뒀네. 자자. 이쪽으로 앉자구.”
“선생님. 이거. 약소하지만…….”
민우가 손에 든 음료 선물세트를 조성진 교수에게 건넸다. 그는 뭘 이런 걸 다 사 왔냐고 야단을 쳤다.
소파로 자리를 옮긴 민우는 미리 준비해 온 석사학위 논문을 꺼냈다.
“선생님. 이번에 쓴 석사학위 논문입니다. 선생님 드리려고 한 부 가져왔어요. 많이 모자라지만 열심히 썼습니다.”
논문을 받은 조성진 교수가 앞 페이지를 확인했다. ‘존경하는 조성진 선생님께’라는 짤막한 글귀가 들어가 있었다.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고생 많았다. 잘 읽어 보마. 그런데 이번에 너 박사과정을 이명인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됐다지?”
“면접이 좀 아슬아슬했는데…… 왜 그렇게 뽑혔는지 모르겠어요. 전산 오류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붙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껄껄껄! 겸손은. 넌 잘될 줄 알았어. 그렇게 공부에 푹 빠진 학생은 예전에도 찾기 힘들었으니까. 그때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빛을 볼 줄 알았지.”
그래서 그는 민우의 성공에도 놀라지 않았다. 조금 일찍 터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민우가 겸양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멀었죠. 요즘은 박사를 따도 자리 잡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매형인 최민식은 아직도 시간강사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갈 수 있는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데다가 국문학 쪽은 쉽게 자리가 나지 않는다.
조성진 교수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어딜 가나 매한가지지. 교수 임용에는 운이 많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강의경력, 연구업적 다 채워놓고 정화수 떠놓고 빌어야지 뭐. 그래도 넌 다른 길이 있잖아?”
“다른 길이요?”
“번역 말이다. <태엽시계>도 영국에서 잘 팔리고 있다지? 얼마 전에 신문에서 봤다.”
사실 <태엽시계>는 좀 의외였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았다. 예상 매출을 밑돌았고, 현지 언론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말부터 영국 평론가들이 하나둘 <태엽시계>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매스컴에 소개되는 횟수가 늘었고, 그에 비례해 도서 판매량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목표 매출의 세 배를 달성한 상황이었다. 뜻밖의 성공에 출판기획실에서는 차기 번역작을 고르는 중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번역은 민우가 맡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조만간 연락하겠다고 송승현 실장이 직접 전화를 했었다.
“단순히 여행 경비 마련하려고 시작한 거였는데 일이 좀 커졌습니다. 프랑스에 여행 좀 다녀오려고 일감 받아서 시작한 거였거든요.”
“그게 <사각 살인>이었지? 나도 읽었다. 술술 읽히는 게 정말 재미있더구나. 번역서 하면 으레 딱딱하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말이야.”
<사각 살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제가 큰산번역문학상 신인상으로 넘어갔다. 조성진 교수는 늦게나마 축하를 건넸다.
“아, 그런데 말이다. <더 위저드> 2부는 어떻게 된 거냐? 그것도 네가 번역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골든북스에서 야심차게 내놨다가 혹평만 듣던데.”
“판권 계약할 때 좀 잡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번역을 못 했고요.”
민우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그 속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였으니까.
아무튼 <더 위저드> 2부는 망했다. 책은 잘 팔렸다. 워낙 팬덤이 두꺼웠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맹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오역과 설정 오류가 너무나 빈번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독자들은 라온북스를, 그리고 번역가 박민우를 찾게 되었다.
“그럼 3부도 골든북스에서 나오나?”
“아뇨. 이번엔 라온북스에서 나와요. 제가 다시 번역하게 됐고요.”
“그거 잘됐구나. 우리 아들 녀석이 아주 좋아하겠어.”
그래서 올해 초는 스케줄로 꽉 찼다.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더 위저드> 3부 번역, 거기에 상아대에서 강의도 해야 했다.
만약 지음사에서 차기 작품 번역 의뢰가 들어온다면 고민을 좀 길게 해야 하는 상황이다. 민우는 상아대 강사이자 번역가이기도 했지만, 명인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학생이기도 하니까.
박사과정 수업은 석사 때와는 질적인 측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석사과정에서 선별된 학생들만 모여들기 때문에 그만큼 경쟁이 심하기도 하다.
‘레아 씨가 스케줄 관리를 잘해준다고 해도 여유가 없겠구나. 그래도 번역 정도는 이제 일도 아니니 늘려도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민우는 조금 무리하더라도 모두 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모두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것들이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예린이 소설 번역을 미리 해 둔 게 다행이네. 신의 한 수였어. 아무튼 <세계수> 2부는 하반기에 나갈 예정이니 그 전에 시간 좀 벌어놔야겠다.’
주예린의 소설 <세계수> 1부는 다음 달에 북미 전역에서 판매가 시작된다. 이미 프로존에서는 예약판매가 진행되고 있다.
아직 초반이고 널리 알려지지 않아 반응은 미미하지만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좋은 작품은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어 있으니까.
아무튼 번역 관련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다 보니 조성진 교수는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까지 언급했다.
“최종후보작은 다음 달에 발표되지?”
“예. 작년과 룰이 같다면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어떠냐? 현장 분위기는.”
“지음사 담당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을 겁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고, 무엇보다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해야죠.”
지금 하는 일.
민우가 그제야 아차 싶어서 시계를 확인했다. 강의 시작 전까지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민우가 난색을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선생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따 끝나고 다시 인사드리러 올게요.”
“대학에서는 첫 강의지? 떨지 말고 잘해라. 내 경우는 후배들한테 좋은 말 해 준다고 생각하면서 하니까 좀 마음이 편해지더라.”
“옙. 감사합니다.”
연구실에서 나선 민우는 바로 조교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마지막에 조성진 교수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학생이 아니라 후배들이라고 생각하고 하면 좀 편할 거 같긴 해.’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가 싶었다. 민우는 강의 전에 조성진 교수에게 인사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조교실의 문을 열었다.
“앗!”
포니테일을 한 젊은 여자가 벌떡 일어섰다.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이 포인트였는데, 얼굴이 작아서 그런지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상아대 국문과 행정조교이자 민우의 후배인 구서현이었다.
“오빠! 아, 아니지. 선배! 아, 이것도 아닌가? 그럼 선생님?”
“하나로 통일해.”
“으음, 그럼 선생님으로 할게요.”
“좋을 대로. 잘 있었어?”
어리바리하던 후배가 조교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민우는 가방에서 캔커피를 꺼내 그녀에게 던지듯 건넸다.
“감사요. 저야 여기서 꿀 빨면서 잘 지냈죠. 선생님은?”
“아, 선생님 소리는 뭔가 좀 아닌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잖아요. 여긴 직장이니.”
“하긴.”
“잠깐만요. 출석부 뽑아놨어요.”
구서현은 책상을 뒤적거렸다. 평소 그녀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난 책상은 온갖 서류와 책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곧 그녀가 투명한 파일을 찾아냈다.
“여기 있어요. 대학국어 1반 총 32명.”
“땡큐.”
“보통은 그냥 인쇄물만 드리는데 선생님이라 특별히 클리어 파일에 껴 드린 거예요. 이거 비품이라 따로 사야 하는 겁니다.”
“생색은.”
“그냥 그렇다구요.”
출석부를 받아든 민우는 한번 쭉 훑어보았다. 자신의 대학 첫 제자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다. 빨리 강의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여학생 몇 명 있나 세 보는 거죠? 역시 선배는 한결같아서 좋다니까.”
“뭔 헛소리야?”
“발뺌하시긴. 눈에 딱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구서현은 마이크를 챙겨주는 센스를 보였다.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다.
“한 학기 동안 잘 부탁한다.”
“강의 평가는 괜찮으니까 사고만 치지 말아주세요. 특히 학점 청탁 조심하시고. 가끔 대학국어 반을 무용과로 바꿔 달라는 무리수를 두는 선생님들 계신 데 그러지 마시고요. 요즘 성추행이다 뭐다 예민할 시기니 몸가짐 바르게 하세요.”
“너나 잘해 인마. 석사 논문 기대하마.”
씨익 웃은 민우는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때마침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온 탓에 구서현은 그를 더는 붙잡지 않았다.
‘2층이었지?’
출석부에 표시된 강의실을 확인한 민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2층엔 인문대 교양강의실이 모여 있다. 정확히는 205호. 호기롭게 앞문을 열고 들어가자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아마 민우가 정장을 입지 않았더라면 계속 떠들었을 것이다.
‘아차. 청심환 안 먹었네.’
다시 나갈까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기엔 모든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단상에 올랐다.
마이크를 멀티미디어 박스에 연결하고 허리를 폈다. 그리고 학생들을 둘러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번 학기 대학국어를 맡은 박민우입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묻혔다. 확실히 여학생들이 많았다.
문득 좀 짜증 난다는 이수빈의 한마디가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곧 정각이 되었고, 민우는 출석부를 펴고 출석을 불렀다.
“강은철.”
“네.”
“나은영.”
“예~”
민우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시선을 마주치며 학생들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다름 아닌 서지훈 교수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출석을 부르며 학생들의 얼굴을 기억하곤 했다.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총 서른두 명 중 여학생이 스물다섯. 얼추 8대 2 정도 되나? 좋은 성비네.’
민우는 수빈에게 놀려줄 거리를 하나 챙기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단 강단에서 내려와 학생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권위의식에 빠진 교수가 되고 싶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그런 친구 같은 선생이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