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시간강사 박민우 (1)
(17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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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시간강사 박민우 (1)
2022.03.21.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계절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민우의 습관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책상에 앉아 루카치의 유고를 읽었다.
“……문학의 형식을 규정하는 철학이란, 언제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균열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후이며 자아와 세계가 본질적으로 다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다.”
거기까지가 마지막 부분이었다. 이후로는 빈 페이지. 민우는 안경을 벗고 유고의 남은 페이지를 세 보았다.
‘많이 줄었어.’
처음에는 빈 페이지가 더 많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빈 페이지보다 내용이 채워진 페이지가 훨씬 많았다.
‘이제 유고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정확히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많이 쓰긴 썼네.’
석사과정을 모두 마친 어느 날, 민우는 유고를 이어 쓸 수 있게 되었다. 무려 스무 페이지나.
그때 민우는 확신했다. 학문적 성취가 올라갈수록 유고를 이어 쓸 수 있게 된다고.
‘다음 페이지는 언제 쓸 수 있으려나. 학회 발표? 아니면 박사학위 취득? 박사학위 따는 건 좀 멀었는데 그 전에 쓸 수 있겠지?’
작은 희망 사항을 중얼거리며 민우는 유고를 상자에 조심스레 보관했다. 그때 레아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민우는 외투를 걸치고 신발을 신었다.
“엄마. 학교 다녀올게.”
“오늘 엄마 동창회 다녀올 거야. 저녁 잘 챙겨 먹어. 알았지? 굶지 말고.”
“알았으니까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현관을 열고 나가니 쌀쌀한 바람이 피부로 느껴졌다. 3월 초입. 입춘이 한참 지났지만, 추위에 약한 민우에게는 고역인 날씨였다.
흰색 세단이 빌라 앞에서 민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차창이 내려가고 레아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민우는 서둘러 조수석에 올랐다. 차 안은 따뜻했다. 곧 차가 명인대를 향해 출발했다.
“오늘 대전에 내려가시죠? 몇 시에 모시러 가면 될까요.”
“점심 먹고 바로 갈 예정인데, 오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고터에서 버스 타고 가면 되니까. 두 시간이면 충분해요.”
“그래도 버스로는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효율을 생각해야죠. 오가는 시간에 레아 씨가 업무를 보는 게 더 이익입니다. 게다가 네 시간 운전하는 거 쉬운 일 아니잖아요.”
예전에 KERIS를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최민식도 운전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상아대가 좀 더 가깝긴 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
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알겠습니다. 매니저님. 그럼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넵.”
민우는 가방을 열어 인쇄물을 꺼냈다. ‘대학국어’라는 과목의 수업계획서였다.
하지만 평소 보던 것과는 좀 달랐다.
그 수업계획서는 명인대 것이 아니었다. 상아대의 수업계획서였고, 담당교수 이름은 박민우였다. 대학국어는 2학점짜리 교양필수였다.
레아가 인쇄물을 힐끔 쳐다보았다.
“강의 준비는 많이 하셨나요? 첫 강의라고 들었습니다만.”
“대학 강의는 처음이긴 한데 강의 자체는 몇 번 해봤어요. 인문학 강의와 KOC 강의가 도움이 많이 됐죠. 그래서 크게 떨리지는 않네요.”
사실 반쯤은 뻥이었다.
민우는 오늘도 가방에 액체로 된 청심환을 하나 준비했다. 아무리 지식이 넘쳐흐른다고 해도 대학 강단에 서는 건 처음이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카메라를 상대하는 것과 사람, 그것도 성인을 상대하는 것은 말 그대로 천양지차다.
그나마 다행인 건 행정조교의 배려로 국문과 후배들을 가르치게 됐다는 것 정도다.
“대단하시네요. 이제 서른, 아니 만 나이로는 스물여덟이죠? 대학 강단에 서다니. 매니저님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도 좀 있겠어요. 선배라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하지만 제가 맡은 강의는 1학년 교양필수라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재수강반은 따로 있다니까. 물론 요즘 장수생이나 만학도가 좀 있긴 해도 그건 다른 문제니까요.”
과마다 졸업하지 않는 화석급 학번들이 으레 몇 명 있는데, 그들을 가르친다고 상상하니 소름이 돋았다. 선배에게 듣는 교수님 소리의 느낌은 어떨까?
첫 강의라 교양필수를 맡긴 했지만 강의 평가를 잘 받고 경력이 쌓이면 전공 강의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나중에 조교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 나보다 학번 높은 사람이 남아 있는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민우는 다시 강의계획서에 집중했다.
한참 후, 레아는 능숙하게 명인대 정문에 차를 세웠다. 민우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개강 첫날답게 학생들이 굉장히 많았다. 민우는 정문을 지나쳐 인문관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늘 대학원 수업은 없지만 교수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왔다.
‘이명인 장학생으로 선발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단순히 장학금이 지급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명인 장학생으로 선발된 학생에겐 각종 혜택이 주어진다. 박사 수료 후 강사로 활동할 기회와 졸업 후 해외 연수 기회가 주어진다.
‘특히 정한기 선생님께는 인사를 꼭 드려야지.’
송현우 교수 퇴임 후 국문과 학과장은 정한기 교수가 맡게 됐다. 박사과정 면접 당시 위원장 역을 했으니 그에게 감사를 표할 필요가 있었다.
인문관에 도착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플래카드가 보였다. 민우는 잠시 멈춰서 플래카드를 바라보았다.
― 이수빈 학우의 중앙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을 축하합니다! 국어국문학과 원우회 일동
민우가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시샘도 났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스물여섯에 문학평론가 소리를 듣게 되다니. 부럽긴 하네.’
만약 한진섭이 그 생각을 들었다면 가진 놈이 더한다고 욕했을 것이다. 플래카드를 두 눈에 선명히 담은 민우는 인문관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다.”
마침 지나가던 국문과 석사들이 민우를 보고 꾸벅 인사했다. 학기가 쌓일수록 후배가 하나둘 늘어갔다. 그만큼 가까이 지내는 후배들도 많아졌다.
김성욱도 그중 하나였다. 예전에 민우에게 서사학에 관련한 도움을 받고 나서 좋은 성과를 얻었다. 그 이후 민우의 직속 후배를 자처하고 있었다.
“형. 오늘 개강 파티 오심까?”
“못 가. 강의 있어서 대전 내려가 봐야 해.”
“대전이 해외도 아니고 밤늦게 오시면 되겠네요. 술판 뜨겁게 달궈놓고 기다리겠습니다. 빼지 마시고 좀 오세요. 형이랑 술 마신 지 백만 년은 지났습니다.”
“까분다. 근데 너 석사 논문 안 써?”
“쉬엄쉬엄 쓰려고요. 하루 쉰다고 논문 어디 안 갑니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웃었다. 가끔은 스트레스를 풀 필요도 있었다.
“시간 봐서 가든가 할게.”
“꼭 오세요. 궁서체입니다.”
피식 웃은 민우는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늘 그렇듯 307호 문을 열었다.
“어, 오빠.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수빈 선배 여기 안 오셨는데.”
민우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아차 싶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눈 민우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박사과정 연구실은 310호였다. 습관적으로 석사연구실에 들어간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함께 박사과정에 입학한 이수빈과 한진섭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진섭이 합격했다는 건 민우로서는 정말 반가운 일이었다.
“민우 너 307호에 들렀다 왔지?”
“어떻게 알았냐?”
“나도 그랬거든.”
“박사과정 첫날부터 불길한데? 너와 동급이라니.”
민우가 싱겁게 웃으며 가방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수빈의 표정이 평소보다 들떠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민우가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뭐 좋은 일 있어?”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건 맞아요. 아까 설 선생님 연구실에 갔다가…….”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곤 생긋 웃었다. 확실히 좋은 일이 있긴 한가 보다.
“놀라지들 말아요. 나 TV에 출연할 기회 얻었어요!”
잠시 멍해 있던 민우와 진섭이 몇 초 뒤에 어깨를 들썩였다. TV 출연이라니. 너무나 뜬금없었다.
“무슨 프로그램인데?”
“KBC에서 매주 금요일 밤에 책 소개하는 프로그램 하나 있거든요. ‘독서의 밤’이라고. 거기에 출연 제안을 받았어요. 설예라 선생님이 소개해 주셔서.”
“헐, 대박! KBC면 공중파잖아?”
진섭이 호들갑을 떨었다. ‘독서의 밤’이 비인기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공중파 방송에 출연한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볼을 긁으며 민우가 한마디 던졌다.
“미녀가 읽어주는 책이라는 컨셉인 건가. 유감스러운 기획력인데.”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도 돼요. 후후후.”
“자신 있나 봐?”
“아직 제안만 받은 상황이라서요. 하겠다고 얘기는 안 했어요.”
민우는 올해 초에 있었던 소동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이수빈의 당선 소감 인터뷰가 중앙신문에 공개가 되었을 때였다.
뜻밖에도 이수빈의 인터뷰 기사가 화제가 되었다. 신춘문예 관련 기사는 보통 이슈가 되지는 않는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확히는 기사가 아니라 그녀의 ‘사진’이 화제가 되었다. 안 그래도 국문과 여신 소리를 듣는데 사진까지 완벽하게 찍혔다.
그때부터 수빈은 각종 검색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를 휩쓸었다. 명인대 여신, 신춘문예 여신 등으로 말이다.
그 이후부터 왠지 수빈의 코가 높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민우였다.
“그런데 설예라 선생님이 직접 안 하시고 왜 소개를 해 주셨어?”
“카메라 울렁증 있으시대요. 카메라 앞에만 서면 한마디도 못 하세요. 그래서 인강 안 하시는 거기도 하고.”
“의외네. 그 강단 있는 분께서. 그나저나 할 거야?”
“오빠한테 허락받고 해야지.”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때마침 진섭은 옆에서 민우가 잡혀 사는 게 아니었냐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네가 선택해야지 내가 허락을 왜 해?”
“공중파 타면 분명 만인의 연인이 될 게 뻔한데. 괜찮겠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해.”
“정말요? 진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나가야 하는 법이다. 민우는 누나의 가르침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가방을 들었다. 씨익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도 너한테 허락받고 강의하는 거 아니잖아. 상아대 강의실엔 꽃다운 스무 살 청춘들이 가득할 텐데 말이야.”
“아…… 그건 좀 짜증 난다.”
국문과는 보통 여학생 비율이 높다. 민우가 바로 그 부분을 지목한 것이다. 해맑던 이수빈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민우는 웃었다. 수빈이 질투하는 모습은 사진을 찍어 인화하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아무튼 하고 싶은 대로 해. 유명해지면 좋은 거잖아? 커리어도 쌓고.”
“알았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주예린이었다. 화장기가 하나도 없는 초췌한 몰골이었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밤을 새운 모양이다.
민우가 한마디 툭 던졌다.
“밥은 먹고 댕기냐?”
“큰일입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 같아요.”
“가서 뭐라도 좀 먹여라.”
민우가 한진섭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주예린은 다른 용무가 있는지 민우 앞에 섰다. 그녀는 품에 두툼한 인쇄물을 안고 있었다.
“그건 뭐야? <세계수> 다음 권 벌써 다 썼어?”
“아뇨. 석사 논문이요.”
“어?”
민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딱 함정 카드가 발동한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예린이 생긋 웃었다.
“선배, 안 바쁘시죠?”
“나 지금 선생님들께 인사드리고 상아대 강의 준비해야 해. 오늘 첫 강의라 정신이 하나도…….”
“다행이다! 바쁘면 어쩌나 싶었어요.”
민우는 이마를 짚었다. 당했다는 표정으로. 그러자 주예린이 품에 안고 있던 인쇄물을 민우에게 떠넘겼다.
“선배 찬스 쓰러 왔습니다. 딱 한 시간만 빌려주시죠.”
“뭐 어떻게 하면 부탁하는 사람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냐?”
민우는 혀를 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한 시간 정도는 어떻게든 될 거 같았다. 자리를 잡고 주예린의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예린은 약속을 지켰다. 한 시간 뒤 목적을 달성하고는 307호로 물러갔다.
“슬슬 가봐야겠는데? 이따 톡할게. 다들 내일 봅시다.”
민우가 가방을 들고 310호를 나서려던 그때.
“박 교수님!”
이수빈의 목소리였다. 민우가 돌아섰고, 행운의 여신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긴장하지 말고 강의 잘하고 와요. 파이팅!”
“고마워.”
그렇게 잠시 후, 민우는 첫 강의를 위해 대전 유성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