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 유종의 미 (2) (177/500)


177. 유종의 미 (2)
2022.03.18.


면접위원장 정한기 교수가 물었다.

“다들 평가를 내리신 거 같은데, 잠깐 짚고 넘어갈까요. 최철웅 선생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글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연구계획서가 좀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이거 정도껏 해야죠. 문학사라니. 참.”

최철웅 교수가 민우의 서류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비아냥거렸다.

사실 그는 민우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서지훈 교수의 수제자라는 이유도 있지만 학부가 타학교라는 게 가장 크게 작용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최철웅 교수가 재차 말을 이었다.

“다들 알고 계실까 걱정되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번 박사과정에 지원한 자대생이 일곱 명입니다. 예, 정원 여섯 명에 일곱 명이 지원했죠. 다 뽑는다 쳐도 한 명은 떨어트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생각해 보셨으면 하네요.”

다시 말해, 민우를 뽑게 된다면 자대생 한 명을 더 떨어트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정한기 교수와 김태순 교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자대생만 뽑아야 한다면 굳이 이런 면접이 필요했을까요?”

낭랑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설예라 교수였다. 그녀가 도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최철웅 교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좀 이상해서요. 박민우 선생의 업적은 객관적으로 봐도 지원자 중 탑인데요. 설마 다른 지원자들의 서류를 안 보고 오신 건 아니지요?”

“뭐, 보긴 했습니다.”

“그럼 얘기가 쉽겠네요. 이번에 지원한 자대생 일곱 명 중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친구가 있던가요? 학부 때 논문을 쓴 이수빈 선생을 제외하고요.”

없었다. 다들 평범하게 석사 논문만 쓰고 졸업했을 따름이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최철웅 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설 선생. 지금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에요. 내가 지적한 건 업적이 아니잖습니까. 연구계획서가 엉망이라는 거지.”

“말씀 잘하셨습니다. 연구계획서. 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

설예라 교수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신경전이 시작됐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최 선생님의 발상 자체가 이상하다는 거죠. 설령 불가능하다면, 그걸 가능하게 도와주는 게 우리 교수들의 사명 아니던가요?”

정론이었다. 최철웅 교수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합격 여부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어요. 이미 박민우 선생은 박사급 업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전 오히려 대우를 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해주다니. 어떻게?”

정한기 교수가 묻자 설예라 교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격에 맞게요. 박민우 선생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창구 역할을 한다고 했어요. 이건 허풍이 아닙니다. 6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고, 번역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죠. 저는 명인대에 14년 동안 있었지만 이렇게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국문과 내에서.”

“확실히 그건 그렇지. 나도 학생 시절을 포함하면 명인대에서 30년을 넘게 있었어. 그만한 인재는 없었지.”

면접위원장이 계속 거들자 최철웅 교수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분위기가 문학 파트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설예라 교수의 말은 계속되었다.

“영문과와 불문과에서 박민우 선생을 데려가려는 움직임이 있어요. 그들이 더 좋은 조건으로 박 선생을 포섭한다면? 국문과 교수들은 한심하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하죠.”

“거 참. 뭐 얼마나 대단한 학생이라고 그 정도로 감싸고 돕니까?”

보다 못한 최철웅 교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한참 선배의 으름장이었다. 그러나 설예라 교수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소르본의 피에르 랑느 박사가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고 있어요. 프랑스로 오라고.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박민우 선생은 우리 국문과를 택했죠. 왜일까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설예라 교수는 어조를 바꿔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상냥하게 설명했다.

“아까 면접 때 그가 말한 그대로인 겁니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창구 역할을 하려고 우리 과를 선택한 거죠. 그뿐만이 아녜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지요.”

세 사람의 시선이 설예라 교수를 향했다. 이미 방 안의 분위기는 그녀가 휘어잡고 있었다. 평론가답게 강단이 있었다.

“최근 영국 평론가들 사이에서 <태엽시계>가 주목받고 있어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별 의미 없는 거 같습니다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최 선생님은 국어사를 전공하셨으니까.”

“크흠!”

어디서 헛기침이야?

마음 같아서는 한 소리 하고 싶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인데, 썩은 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설예라 교수가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면접에 오기 전, 서지훈 교수가 했던 말이 결정적이었다.

‘우리 과를 위해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봐.’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최철웅 교수의 배타적인 태도 덕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순혈주의(純血主義).

능력과 성과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명인대에서.

물론 설예라 교수도 순혈주의로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젠 끝낼 때가 됐다. 모교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그녀가 나섰다.

“<태엽시계>의 번역가가 박민우 선생입니다. 영국 평론가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건, 곧 열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후보로 오를 수도 있다는 말이고요.”

“……!”

“괜히 어쭙잖게 대했다가 영문과에 뺏기지 말고 제대로 대우를 해줬으면 하네요. 면접위원장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부분적으로는 동의하는데, 어떻게 대우를 해주겠다는 건지?”

“이명인 장학생으로 추천해 보죠.”

정한기 교수가 침음을 흘렸다.

이명인 장학생.

명인대학교 설립자 이명인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장학제도 중 하나다. 학비를 전액 지원하고, 추가 연구비까지 수혜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학금이다.

때문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대학원장의 결재를 받는다고 해도 심의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시간과 관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그 사이에 아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일단 정한기 교수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 건에 대해서는 면접이 모두 끝난 다음 다시 이야기하지. 이다해 선생! 다음 면접자들 들여보내게.”

“알겠습니다.”

잠시간의 해프닝이 끝나고 면접이 재개되었다.

* * *

면접 전형이 모두 끝났다. 세 사람은 미리 약속한 대로 307호에 모였다. 이수빈은 좋았는데 한진섭은 나라 잃은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술, 술이 필요해!”

“술이 현실을 바꿔주진 않지.”

민우의 일침에 진섭이 고개를 떨궜다. 잔인한 자식이라며. 이번엔 수빈이 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그래요?”

“정체성이 모호하대. 그러니까, 연구계획서가.”

한진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속사정이 그의 입을 타고 전해졌다.

“두 학기 동안 국제어학원에서 강의하면서 느낀 게 있거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 문학을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래서 나름 아이디어를 짜서 연구계획서를 썼는데…… 반응이 다들 시큰둥했던 거야.”

“확실히 좀 애매하긴 하네요. 교수법이면 교육대학원에서 다룰 만한 테마잖아요?”

“아, 그게. 교수법은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독자수용이론에 관한 거거든. 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유니버설한 텍스트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걸 찾아내는 방법을 계획했어.”

“뭔가 어렵네.”

이번에 자대생이 일곱 명이나 지원했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민우는 업적이 뛰어나니 별걱정이 없었지만 진섭은 그렇지 않았다.

민우가 손을 내밀었다.

“연구계획서 좀 보자.”

진섭은 가방을 뒤져 연구계획서를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민우와 수빈은 다섯 장짜리 계획서를 천천히 읽어갔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은 민우가 씨익 웃었다.

“비웃냐?”

“아니.”

민우가 연구계획서로 진섭의 가슴을 툭 쳤다. 진섭이 그것을 받아들며 민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대답을 바라듯이.

“오히려 합격 가능성이 높은 거 같은데? 네 연구야말로 지금 우리 과에 엄청나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품성이 있어서.”

“맞아요. 확실히 그래요. 이 이론대로 한국어교육 교재를 개발하면 여러모로 이익이겠는데요? 국제어학원이 국문과 밑에 있으니까.”

과연 이수빈이었다. 민우가 지적한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국제어학원의 존재.

“그러니까 한 선생. 기죽지 말고 제2외국어 시험이나 준비합시다.”

“그, 그럴까? 그래도 되나?”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친구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렇게 세 사람은 307호를 나섰다. 한진섭은 술 대신 주예린을 만나러 간다고 자랑했다. 그때 뭔가를 떠올린 이수빈이 민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참, 오빠는 면접 어땠어요?”

“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까였지.”

“오히려 내가 아니라 네가 더 걱정이구만. 핫핫핫!”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진 자의 여유가 무엇인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안 되면 다른 데 가지 뭐. 가뜩이나 오라는 데도 많은데. 고르는 게 좀 어렵긴 하다만.”

“재수 없네.”

“완전.”

오랜만에 마음을 맞춘 수빈과 진섭이었다.

두 사람과 헤어진 민우는 석사 논문의 마지막 단계를 수행하기 위해 교수연구실을 순회했다. 서지훈 교수가 마지막 차례였다.

“선생님. 도장 받으러 왔습니다.”

“그래. 면접은?”

“그냥 그랬어요.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민우는 손에 들고 있던 석사 논문 인준서를 공손히 책상에 놓았다. 송현우 교수와 민영환 교수의 이름과 도장이 차례로 찍혀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펜과 도장을 준비하며 물었다.

“최철웅 선생이 뭐라고 안 하든?”

“말도 안 되는 연구계획서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선생님 이름 좀 팔았어요. 서지훈 선생님은 서른한 살에 <현대문학론>을 쓰셨는데 저라고 못할 거 있냐고.”

“하하하핫!”

한바탕 크게 웃으며 서지훈 교수는 공란에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도장을 찍었다.

“내 이름을 팔았다면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물론 박사과정에 합격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자, 받아라.”

심사 인준서를 민우에게 돌려주었다. 심사위원들의 도장이 모두 모였다. 이제야 한 꼭지가 끝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민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지금 가슴에 차오르는 그 뿌듯한 마음 잊지 말고. 그게 나중에 박사 논문 쓸 때 밑거름이 되는 거야. 알았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석사 논문 인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어차피 라면 받침대로 쓰게 되니까.”

짓궂은 농담을 뒤로 하고 민우는 연구실을 나갔다. 이제는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신발이 꽤 늘었다. 누나와 매형이 와 있었다. 짭조름한 갈비찜의 향취를 느끼며 민우는 신발을 벗었다.

“면접은 어땠어?”

민식이 물었다. 민우는 자신 있게 웃었다.

“생각보다 압박은 심하지 않았어요. 연구계획서에서 트집을 좀 잡히긴 했는데 예상 범위 안에 있던 일이라서요.”

“잘했다. 논문은 이제 다 끝난 거지?”

“인준서에 도장 받고 오면서 인쇄소에 들렀어요. 50부 정도 찍으려고요. 저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요.”

민우는 방으로 돌아가 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대학원에서 공부로 화제가 바뀌자 과일을 먹던 박민아가 버럭 짜증을 냈다.

“집에선 공부 이야기 좀 그만햇! 모처럼 쉬러 왔는데 다른 얘기 좀 하면 안 돼? 배운 분들이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

“미, 미안.”

최민식은 박민아 앞에서 쩔쩔맸다. 민우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한때 명인대 국문과의 군기반장이 이렇게 꼬리를 내릴 줄은…….

민아가 뚱한 표정으로 민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빈이는 오늘 바쁘대?”

“곧 신춘문예 마감이라서 좀 바빠. 온다고 하는 거 괜찮다고 했어.”

“잘됐음 좋겠다.”

“이번엔 잘될 거야. 느낌이 좋거든.”

민우는 루카치의 만년필을 믿었다. 하지만 수빈의 노력과 실력만큼은 아니었다. 용의 눈을 그리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준비 다 됐으니 어여 와서 저녁들 먹어라.”

“네!”

온 가족이 식탁에 모인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따뜻하고 행복한 밥상이었다.

* * *

2017년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

마음을 비우고 컴퓨터 앞에 앉은 민우는 명인대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고 합격자 조회 버튼을 눌렀다.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엔터를 눌렀다.

잠시 모니터를 응시하던 민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 2018년 전기 대학원 입학 결과(박사과정) ―

수험번호: 20181003
성명: 박민우
학과: 국어국문학과
세부전공: 현대문학
결과: 합격(이명인 장학금 대상자)

민우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었다. 책상에 옮겨 앉은 민우는 노트를 꺼내 앞으로의 계획을 하나씩 적어나갔다.

낭비할 시간은 없다.

그의 또 다른 도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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