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유종의 미 (1)
(176/500)
176. 유종의 미 (1)
(176/500)
176. 유종의 미 (1)
2022.03.17.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길가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익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그스름한 기운을 한껏 뽐내는 것도 잠시. 바람이 차가워지자 낙엽이 날렸다.
그만큼 가을은 짧았다.
하지만 민우의 석사 논문이 완성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송현우 교수를 필두로 민영환 교수, 서지훈 교수로 구성된 논문 심사위원단은 민우의 학위논문을 엄정하게 심사했다.
하지만 이미 석사 수준을 넘어선 민우였다. 세 위원의 혹독한 비평을 뿌리치고 결국 학위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찾아온 겨울.
민우의 새로운 보금자리엔 이른 아침부터 불이 환하게 켜 있었다. 어머니가 해 준 아침밥을 깨끗이 비운 민우는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2018년도 전기 대학원 입학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민우는 따뜻한 옷 대신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맸다. 추위를 잘 타는 그였지만 오늘은 이렇게 입고 가야 했다. 중요한 날이니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민우는 손가방을 들었다.
“엄마. 학교 다녀올게.”
“벌써 가려고?”
“좀 늦었어. 빨리 가야 돼.”
민우는 목도리를 걸치고 신발을 신었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점심 잘 챙겨 먹고. 오늘은 일찍 들어오니? 갈비찜 해 놓으마.”
“그래야지. 저녁에 누나랑 매형 온다면서. 근데 갈비찜만? 백숙은?”
“너희 누나 입덧 심해서 안 돼. 닭 근처에도 못 간다더구나.”
“쯧쯧. 안됐네. 닭 킬러였는데.”
민우의 누나는 두 달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는 최민식을 형이 아니라 매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게다가 조카 소식까지 있어 민우도 어머니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어머니는 민우의 목에 걸린 목도리를 다시 고쳐주며 밖에까지 배웅을 나왔다.
“나오지 말고 들어가. 밖에 추운데.”
“됐으니까 어서 가기나 해. 면접 잘 보고. 떨지 말고. 응?”
“알았어. 다녀올게요.”
“차 조심하고!”
차 조심하라는 소리가 요즘은 반가웠다. 시간이 지나면 잔소리처럼 느껴지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마음이 포근해졌다.
민우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이 절로 움츠러들 정도로 추웠다.
한참을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춘 민우가 뒤돌아봤다. 역시나 어머니는 빌라 앞에 서서 어서 가라며 손짓을 하고 있다.
“추운데 좀 들어가라니까.”
한숨을 내쉰 민우도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시 걸었다. 어머니를 들어가게 하려면 빨리 골목에서 벗어나는 방법밖엔 없었다.
그래도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서울로 모셔오길 잘했어.’
민우는 센트럴 북스에서 계약금을 수령하고 모아둔 돈을 보태 서울에 집을 구했다. 아담한 빌라였지만 어머니와 살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물론 불편한 점이 몇 가지 생기긴 했다. 학교와 거리가 멀어졌고, 데이트 장소가 하나 없어졌고, 마음껏 어지르고 살 수 없다는 것 정도.
하지만 누나가 시집을 간 이상 어머니를 외롭게 둘 수는 없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이제는 좀 쉬게 해드리고 싶었다.
‘부모는 자식이 효도하길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도 있으니까.’
그래서 민우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셨다. 번역 일로 웬만한 직장인들보다 많이 벌기 때문에 생계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가끔 민우가 바쁠 때는 이수빈이 집에 놀러 와 말벗이 되어드리기도 한다.
골목을 나서니 칼바람이 몰아쳤다. 민우는 코트를 여미며 어깨를 움츠렸다.
‘으, 엄청 춥네. 완전 겨울이다. 레아 씨가 쉬는 날엔 집에 콕 박혀 있어야겠어.’
공교롭게도 오늘은 레아가 쉬는 날이었다. 그래서 민우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학교에 가야 했다.
때마침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했다. 민우는 재빨리 뛰어 버스에 올랐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민우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선생님들이 어떤 질문을 할까? 재환 선배한테 듣기론 압박이 장난이 아니라고 했는데.’
민우는 미리 준비한 예상 질문지를 꺼냈다. 선배들이 골라준 약 서른 문항이 필기되어 있었다. 민우는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석사과정에서 많은 업적을 세웠다고 교만하거나 방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우는 더 긴장했다.
‘철저히 준비해서 나쁠 건 없지. 면접위원으로 누가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서 움직여야 해.’
민우는 눈을 빛내며 노트를 읽어 나갔다.
버스가 덜컹거렸지만, 집중력을 끌어올린 민우에겐 조금도 방해가 되지 못했다.
* * *
버스에서 내린 민우는 바로 인문관으로 올라갔다.
박사과정 입학 면접은 국문과 세미나실에서 열린다.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한숨 돌린 민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15분 정도 여유가 있네. 일단 짐 좀 놓고 와야지.’
민우는 3층으로 올라갔다. 307호에는 웬일로 아무도 없었다. 사물함에 짐을 모두 놓아둔 후 바로 면접 장소로 향했다.
그때 박사 연구실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웬 정장?”
강예진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초췌했다. 화장기가 없는 건 물론, 머리까지 부스스했다. 눈에 걸린 다크서클이 광대뼈까지 내려올 지경이었다.
“오늘 박사과정 면접 있잖아요. 모르고 계셨어요?”
“내가 지금 그딴 거 신경 쓸 때니.”
“논문 잘 안 풀리나 보네요.”
“아가야. 잘 풀리는 박사 논문 같은 건 세상에 없단다…….”
잠시 못 본 사이에 비관론자가 된 것 같았다.
강예진은 한 학기 동안 박사 논문에 매달리는 중이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고 있진 못했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나마 주예린이 자료 수집을 도와주고 있어서 이 정도로 버티는 것이다.
“참, 너 인준서에 도장 받았니? 논문 통과됐다고 들었는데.”
“이따 면접 끝나고 받으려고요.”
“자격 미달로 탈락할 일은 없겠구나. 여튼 면접 잘 보고 와. 생각보다 까다로우니까 쉽게 생각하지 말고. 자대생들도 잘 미끄러지는 거 알지?”
한숨을 내쉰 강예진이 좀비처럼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세미나실에 들어선 민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원자들이 꽤 많았다. 수빈은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데 진섭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 설마 지각하진 않겠지?’
일단 민우는 수빈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눈인사만 했다. 떠들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신 톡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 섭섭이는?
애기♡: 톡 안 보는 거 보니까 늦잠 자나 봐요. 가만 보면 섭 오빠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중요한 날에 늦잠 잘 자네.
― 왜 옛날 얘기를 꺼내고 그래?
주님: 진짜 노답
주예린이 돌연 대화에 끼어들었다. 민우는 자신에게 하는 이야긴가 잠시 고민했고, 수빈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하지만 민우는 주예린을 잘 알고 있었다. 고도의 심리전이다. 굳이 말려들 필요는 없었다.
― 너도 연락 안 되냐?
주님: 몰라요. 어제 늦게까지 게임 쳐하다가 잔 거 같은데 이제 포기함 ㅇㅇ
―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배틀넷에서 본 거 같긴 하다.
애기♡: 한 학기 미루고 린이 너랑 박사 같이 들어오고 싶나 봐. 섭 오빠 은근 로맨티스트네~
주님: 흥, 누가 받아준대? 명인대도 존심이 있지!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진섭이 모습을 드러냈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였다. 면접 시작 1분 전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 아쉽게도 섭이 왔네. 세이프.
주님: 그래 봐야 떨어지겠지. 난 4권 쓰러 갈게요. 선배님들 안녕!
진섭은 반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민우 옆자리를 차지했다.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진동했지만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민우가 한소리 했다.
“그냥 한 학기 꿇지 그랬어?”
“시끄러! 헉, 헉. 아…… 진짜 죽는 줄 알았다. 하필 버스가 도중에 고장 날 건 또 뭐야. 짜증 나게. 정문에서부터 뛰었어.”
“조용히 좀 해요. 사람들도 많은데.”
그때 앞문으로 국문과 조교 이다해가 들어왔다. 면접 방법과 유의사항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1번부터 차례로 호명했다.
“3번까지 복도에서 대기해 주세요. 김윤호 씨, 장수정 씨, 박민우 씨 순입니다.”
이다해와 눈이 마주치자 민우가 가볍게 묵례했다. 마음 같아서는 누가 면접위원으로 들어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너무 바빠 보였다.
민우는 복도에 얌전히 앉아 시간을 보냈다.
‘다 같이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좋을 텐데. 수빈이도, 진섭이도.’
박사과정 입학 정원은 여섯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번 지원자는 서른 명이 넘었다. 단순 경쟁률로만 봐도 꽤 치열했다.
“다음 박민우 씨. 준비하세요.”
“네.”
앞선 두 학생의 면접이 끝나고 드디어 민우 차례가 왔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심사위원석을 바라본 민우는 흠칫 놀랐다.
‘망할.’
전혀 뜻밖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총 네 명이었는데, 민우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교수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좌측부터 설예라 교수, 정한기 교수, 최철웅 교수, 김태순 교수가 앉아 있었다. 민우는 재빨리 서열을 계산했다.
‘정한기 선생님이 위원장이겠네. 설예라 선생님이 계시니 수빈이는 무난하게 합격하겠고. 진섭이가 아슬아슬하게 됐구나.’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민우는 가볍게 웃으며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박민우입니다.”
“거기 자리에 앉게.”
민우가 한가운데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서류 넘기는 소리가 일제히 들렸다. 그렇게 면접이 시작되었다.
“KCI 등재지 논문 세 편 게재에 IAHS학회 초청. 그리고 한영번역을 포함해 네 권의 번역서를 냈고 센트럴 북스의 인문과학총서 프로젝트에 참가 중…… 와, 스펙이 정말 화려한데요?”
먼저 말을 꺼낸 건 설예라 교수였다. 다른 교수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국어학 쪽 교수인 최철웅은 시시한 표정을 지었다.
“스펙이 전부는 아니잖습니까. 과연 지원자가 박사과정에 들어와서 어떻게 연구를 해나갈지가 관건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중요한 건 연구자의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업적은 과거의 기록일 뿐이죠. 제출한 연구계획서로 평가해 주십시오.”
받아친 건 교수들이 아니라 민우였다.
“허허, 당돌한데?”
정한기 교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연구계획서를 훑어본 그는 고개를 들었다. 호기심 어린 눈이 민우의 눈빛과 마주쳤다.
“연구계획서가 다른 지원자들과는 좀 다른데. 현대문학사를 논한다고?”
“정확히는 한국현대문학사를 새로 쓰는 작업을 할 계획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최철웅 교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언어학 교수였지만, 문학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자네에게 그런 경륜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한국 문학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 이제 갓 석사를 졸업할 예정인 사람이 문학사를 쓴다고?”
“서지훈 선생님은 서른한 살에 현대문학론을 쓰지 않았습니까?”
최철웅 교수의 말문이 막혔다. 민우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문학론과 문학사는 좀 다르지만, 서지훈 교수는 비슷한 저작물을 서른한 살에 완성했다.
민우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된다고.”
교수들이 입을 닫았다. 유일하게 설예라 교수만이 웃고 있었다.
“물론 저도 어려운 일이라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명인대는 최고의 연구 환경을 갖춘 곳이니까요. 장서도 장서지만 어려울 때 지혜를 빌려주실 선생님들이 정말 많이 계십니다.”
“크흠.”
김태순 교수가 헛기침하며 나섰다. 내심 민우는 마음이 찔렸다. 석사 1학기 때 그의 수업에서 딴생각하다 혼난 적이 있었으니까.
“박사 논문으로 문학사를 기술한다는 건 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양적인 문제도 있을 텐데. 그건 어떻게 극복할 생각인가? 가능하다는 전제하에서.”
“저도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보통 문학사 책은 많으면 천 페이지가 넘어가니까요. 아마 중요한 부분만 간추려야 할 겁니다.”
“간추리는 기준은 어떻게 세울 생각이지?”
“제 이론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테마 위주로 고를 겁니다. 보수적이긴 합니다만 그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순 교수가 서류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이윽고 그가 뭔가를 적었다. 숫자인 것 같았다. 다른 교수들도 하나둘 점수를 적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면접위원장 정한기 교수가 물었다.
“박사과정에 들어온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 할 생각인지?”
“저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서류에도 나와 있지만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등에 능숙하지요.”
교수들이 일제히 민우의 지원 서류를 확인했다. 6개 국어가 넘는 언어의 자격증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명인대 영문과와 불문과에서 그를 탐내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저는 국문학과 세계문학의 창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의 보물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일을 할 겁니다. 이곳 명인대 국문과에서요. 이상입니다.”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속이 후련했다. 면접위원장 정한기 교수가 나가도 좋다고 말했다. 민우는 꾸벅 인사하고 세미나실을 나섰다.
바로 이다해 조교가 들어왔다.
“선생님. 바로 다음 지원자 들어오라고 할까요?”
“아니. 잠깐. 기다려.”
곧 민우의 면접 점수를 놓고 교수들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