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더 높은 곳을 향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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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더 높은 곳을 향해 (3)
2022.03.14.
「안녕하십니까. 제임스 마렛입니다.」
제임스가 악수를 청했다. 주예린은 잔뜩 얼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민우가 등을 툭 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손을 잡았다.
“주예린입니다. 반가워요.”
「귀한 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한창 2권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저는 웬만하면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고 작가님들과 직접 이야기를 하는 편이라서요.」
빠르고 강한 억양에 주예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민우가 그걸 눈치챘다.
“안 들려?”
“드문드문 들리긴 하는데 정확히 무슨 의민지는 모르겠어요.”
어쩔 수 없이 민우가 통역으로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민우는 방금 제임스 편집장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 주었다.
“아, 전 괜찮아요. 이렇게 불러 주셔서 오히려 감사한걸요.”
「겸손하시군요. 작가들은 대부분 에고가 강하고 독특해서 맞추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작가님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하하하.」
말을 전해 들은 주예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민우도 웃었는데, 실제 그녀의 성격을 알면 제임스가 어떨까 싶어 웃음이 나온 것이다.
제임스가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에 올리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작가님의 작품은 잘 읽었습니다. 읽고 나니 딱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그걸 여쭈려고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지요.」
“어떤 게 궁금하셨나요?”
궁금한 건 주예린만이 아니었다.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제임스가 어떤 질문을 꺼낼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주예린이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분명 출간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질문일 것이다.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을 보면 말이다.
「작가님은 어떤 소설을 쓰고 싶습니까?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말이죠.」
민우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이 도와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그대로 한국어로 옮겨 주예린에게 전할 뿐이다.
예린의 눈이 커졌다.
“진짜 그렇게 물으셨어요?”
“어.”
전혀 뜻밖의 질문이었다. 이번에 쓴 소설에 대한 질문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게 나왔다.
마치 면접을 보러 왔는데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은 것 같은 느낌.
주예린은 생각했다.
뻔한 대답을 할 수는 있다. 재미 혹은 작품성이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쉽게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뻔한 말을 듣고 싶어서 자리를 만든 건 아닐 거야. 상대는 센트럴 북스 편집장이니까.’
고민이 좀 길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는 여유롭게 대답을 기다렸다.
“후우.”
주예린이 짧게 심호흡을 했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대답으로 출간 여부가 결정된다면 가장 솔직하게 대답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편이 가장 후회가 덜 남을 테니까.
“저는……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쓸 거예요. 앞으로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요.”
민우는 좋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 한마디로 한때 은사였던 한수영 교수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민우는 바로 그 대답을 제임스에게 전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곧 회신을 드리죠.」
그것으로 미팅은 끝이 났다. 좀 허무했다. 주예린은 제임스의 명함도 받지 못하고 카페를 나서야 했다. 민우가 그녀를 밖까지 배웅했다.
“먼저 가. 나 이어서 프로젝트 미팅 있어서 같이 못 간다. 이따 학교서 보자고.”
“괜찮았어요?”
“뭐가?”
“대답.”
민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대답이었다고 생각해. 나도 좀 놀랐다?”
“그럼 다행이구요.”
주예린은 뭔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만두었다. 미팅에 방해가 될 테니까. 그녀는 손을 들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날,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은 센트럴 북스에서 메일을 한 통 받았다. 계약을 진행하고 싶다는 메일이었다.
현기혁 팀장은 바로 주예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 작가님. 놀라지 말고 잘 들으세요. 지금 센트럴 북스에서 계약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이 미국에 진출할 수 있게 됐어요!」
“정말요?”
주예린은 화들짝 놀랐다. 나머지 세 사람, 민우와 수빈, 진섭은 숟가락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통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저도 정말 깜짝 놀랐지 뭡니까. 아무튼, 내일모레 바로 출국해서 계약 진행하려고 합니다. 정말 잘됐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작가님.」
“아녜요. 이게 다…….”
주예린은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한 게 아니라 네 작품이 해낸 일이라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그런 민우의 마음을 느끼며 주예린은 전화를 귀에 댄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정말 열심히 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우리 출판사 소설이 해외로 나가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 줌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곧 전화가 끊겼고, 주예린은 자신의 소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307호 멤버들은 다들 자신의 일인 양 좋아했다.
주예린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점심이 반 이상 남았는데도 수저를 내려놓았다.
“더 안 먹니?”
수빈이 걱정스레 물었다. 고개를 숙인 주예린이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있잖아. 내 소설…… 진짜 번역돼서 외국에 팔리는 거야?”
“반응이 좋으면 거기에서 끝나지 않겠지. 모기업 애틀레틱 유니버설 산하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수도 있고. 계약했다고 다 끝난 게 아니야.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민우의 대답이었다.
많은 생각이 오갔다. 글을 처음 쓰게 되었을 때의 풋풋한 즐거움. 상아대에 입학하고 한수영 교수를 만나 등단을 했던 일.
그리고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 둥지를 떠났던 일도.
해외 진출이라는 현실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그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주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군요.”
고개를 든 주예린은 활짝 웃었다. 하지만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유일하게 민우만 알 수 있었다.
괴로움으로 얼룩진 과거를 말끔히 씻어주는 눈물이라는 사실을.
* * *
점심 식사를 마치고 민우는 수빈과 함께 잠시 산책했다. 요즘 그녀가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좀 걱정이 돼서 나가자고 제안했다.
날이 좀 덥긴 했지만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방학이긴 방학인가 봐. 사람이 거의 없네. 한산하고 좋다. 그치?”
“매미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죽겠어. 공부에 방해돼.”
“하여간 낭만이 없다니까. 오빠는.”
말은 그렇게 해도 수빈은 기분이 좋은지 웃었다. 두 사람은 캠퍼스의 산책로를 적당히 걷다 인문관으로 돌아왔다.
“시원한 거 마시러 갈까?”
“좋죠.”
지하 카페로 내려가 아이스티를 하나씩 들고 자리에 앉았다. 에어컨 바람을 쐬고 달달한 걸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수빈이 지나가듯 말했다.
“예린이는 지금 기분이 어떨까? 센트럴 북스면 완전 메이저잖아요. 십만 부, 아니 그 이상은 기본일 텐데.”
“그렇지.”
“반응이 왜 그렇게 심심해요? 이게 다 내 덕이라고 공치사할 타이밍 아닌가?”
“그런 데 취미 없거든요?”
민우의 볼을 찌른 수빈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곧 턱을 괴더니 뚱한 표정을 짓는다.
“진섭 오빠도 우수강사상 받게 되고. 예린이는 해외 진출하고. 다들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만 좀 헤매는 느낌이네.”
“왜? 요즘 잘된다고 했잖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벽에 좀 부딪힌 느낌이 들어. 고쳐도 끝이 없어서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울 선생님은 천천히 하라고만 하시고. 답답해.”
수빈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섭과 예린의 성공은 분명 축하할 만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극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학교 내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민우는 그 심정을 잘 알았다. 한때 자신도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민우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매번 도움만 받고…… 정작 내가 수빈이한테 뭔가 도움을 준 적은 별로 없는 거 같네. 진섭이랑 예린이만 챙겼구나.’
애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수빈은 명인대 수석 졸업생이고, 이미 학부 시절 KCI 등재지에 논문을 발표한 경력이 있었다.
그런 화려한 과거가 있기에 알아서 잘 해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좀 도와주는 게 좋을까?’
평론은 민우의 주 종목은 아니다. 하지만 전공자로서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나에겐 루카치의 유품이 있으니까.’
안경과 만년필의 힘을 빌린다면 개요부터 정확히 짜 맞춰줄 수 있을 것이다. 평론도 어쨌든 글쓰기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분야니까.
민우가 넌지시 물었다.
“잘 안 풀리면 내가 좀 봐줄까?”
“오빠 평론도 봐요?”
“서운하게 왜 이래? 나 국문학 전공자라고. 이상하게 진섭이나 예린이는 자기가 한 거 당당하게 봐달라고 하는데 넌 안 그러더라?”
“그야…… 부끄러우니까.”
“예린이의 뻔뻔함을 좀 본받도록 해. 뻔뻔한 사람이 하나라도 더 챙겨 가는 법이거든.”
민우의 농담에 수빈이 미소를 되찾았다.
“알았어요. 그럼 이따 인쇄해서 보여줄게요. 대신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봐 주기.”
“그냥 말 나온 김에 지금 보자.”
“그럴까?”
두 사람은 307호로 올라왔다. 이수빈은 공용 컴퓨터에서 파일을 열고 평론을 인쇄했다. A4 10페이지 분량의 긴 평론이었다.
제목을 확인한 민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작가론이 아니네?”
“예전에는 한 작가 작품을 많이들 다뤘는데 나는 좀 다르게 해보려고요.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 하나를 놓고 여러 작품을 분석하는 거죠.”
제목은 ‘분열하는 현대인’이었다. 문학사회학적 방법으로 작품에 접근한 평론이었다. 민우는 일단 정독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문제점을 못 찾겠어.’
굉장히 잘 써진 느낌의 평론이었다. 자료로 쓰인 소설들도 무난하게 분석되었고, 그 결과가 수빈의 논조에 잘 버무려져 있었다.
민우는 전에 설예라 교수의 수업에서 나왔던 비평의 의미를 상기했다.
‘그때 평론을 생선회를 뜨는 일로 비유했었지. 이론이라는 칼을 얼마나 예리하게 벼려내느냐. 그리고 신선한 재료를 고르는 안목을 갖추고 있느냐.’
민우는 이론과 재료라는 양면으로 다시 평론을 바라봤지만 역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건 내 수준의 문제야. 수빈이의 평론을 판단하기에 내 수준이 너무 낮은 거지. 그렇다면.’
민우는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뚜껑을 열기 전에 수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거 내가 좀 손봐도 괜찮지?”
“아, 상관없긴 한데…… 빨간 펜으로 적어주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펜 없으면 줄까요?”
“난 이게 좋아서.”
“오빠 은근 그 낡은 만년필 좋아하더라. 혹시 구여친이 선물해 준 거?”
“두 번 죽이지 마. 진섭이와 내 공통점을 떠올려 보라고.”
수빈은 학기 초에 두 사람을 모태 솔로라고 놀렸던 걸 기억해냈다.
“아. 그랬었지. 미안요.”
민우는 웃어넘겼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한 거니까.
만년필의 뚜껑이 열리자 푸른빛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307호에 있는 다른 학생들은 그 신비로운 빛을 느끼지 못했다.
안경도 썼다. 그리고 다시 평론을 보니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보인다!’
어디가 부족한지, 어떻게 어휘를 바꾸면 좋은지 하나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민우는 안경에 보이는 대로 손을 놀렸다.
서걱서걱―
별 기대 없이 민우의 필기를 지켜보던 이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뭘 저렇게 열심히 적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문이 놀라움으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거…….”
수정본을 받아 든 이수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만년필로 덧쓴 거라 좀 지저분해도 내용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소 도식적이지 않냐는 지적을 들은 부분은 매끄럽게 바뀌었고, 비평용어도 좀 더 세련된 느낌으로 교체되었다.
전체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지만 맥락과 소제목, 그리고 비평용어를 바꾼 것만으로도 완전 분위기가 달라졌다.
“오빠. 전에 평론 공부한 적 있어?”
“예전에 설예라 선생님 수업 들은 게 좀 도움이 됐지.”
수빈은 감동한 표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꼭 끌어안아 주는 것으로 답하고 싶었지만 다른 석사생들도 있어서 참았다.
수빈이 수정본을 들고 일어섰다.
“잠깐 원고 좀 고치고 올게요.”
“천천히 해. 그런데 그대로 고쳐도 상관없어? 꼼꼼하게 다시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이것보다 더 나은 걸 못 찾겠어. 지금 당장은. 일단 고쳐놓고 더 생각해 보려고요.”
수빈은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 파일을 수정했다. 그걸 인쇄한 다음 설예라 교수 연구실로 뛰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수빈이 녀석도 감을 잡은 거 같고. 슬슬 나도 내 일에 집중해볼까?’
민우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인문관 정문을 나선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드니 푸르게 펼쳐진 하늘이 보였다.
‘석사 논문 심사까지는 앞으로 5개월…….’
민우의 시선이 멀어졌다. 그 순간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시간은 충분해!’
그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