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더 높은 곳을 향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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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더 높은 곳을 향해 (2)
2022.03.11.
귀에 익은 컬러링을 들으며 민우는 자취방을 나갔다. 집이 넓지 않기 때문에 나가서 전화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곧 전화가 연결됐다. 기계식 키보드 소리가 요란했다.
“글 쓰고 있었어?”
― 그럼요. 작가가 이 시간에 글을 써야지 뭘 한담. 근데 이 야심한 시각에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어요? 수빈이랑 싸웠음?
“지금 센트럴 북스 제임스 편집장님이 우리 집에 와 계신데…… <세계수> 작가님을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시네. 그래서 전화했다.”
― 예에에?
주예린은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뚝 그쳤다.
― 뻥이죠? 괜히 사람 설레게 하려고 지금 장난치는 거죠? 응?
“어, 그래. 끊는다.”
― 끊지마아아아아! 으아, 이거 어쩌지? 화장 다 지웠는데. 아! 모르겠다. 비비크림 대충 바르고. 일단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녀의 집은 여기서 멀지 않다. 명인대 입학이 결정된 이후에 방을 구했기 때문에 뛴다면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택시를 타면 5분 거리고.
잠시 고민하던 민우가 조용히 타일렀다.
“아니. 지금 당장 오는 건 좀 그러니까 내일 만나자. 명인대입구역 근처에서.”
― 하지만 지금 뵈러 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선배 집에 와 계시다면서요.
“너 작가잖아. 작품을 쓴 주인공이라고. 센트럴 북스가 세계적인 출판사긴 해도 쉬운 모습 보여줄 필요 없어. 오늘은 좀 늦었으니까 너도 생각 잘 정리하고 내일 나와.”
― 그래도 전화까지 했는데, 편집장님이 서운해하시면요?
“서운 안 하게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민우의 말은 언제나 믿음직스러웠다. 핸드폰 너머로 한숨 소리가 흘러나오긴 했지만, 주예린은 납득하고는 알겠다고 답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민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지개를 켰다.
“으그그. 오랜만에 잠 좀 자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민우는 근처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안주를 잔뜩 샀다. 센트럴 북스 편집장을 접대하는 것으로는 너무 초라했지만, 그는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엉뚱한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격식을 싫어하고.’
민우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자취방으로 들어가니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제임스의 목소리였다. 민우가 봉지를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내일 오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저희 미팅도 있고 하니까 그때 잠깐 만나면 될 거 같아서요. 괜찮으시죠?」
「아, 좋죠. 안될 거 뭐 있겠습니까. 근데 그 봉지에 든 건 뭡니까?」
「맥주 드시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잠도 잘 안 온다고 하셨으니 밤새 술이나 한잔하시죠.」
「어메이징! 역시 학문을 하시는 분은 다르다니까. 사물의 본질과 우주의 현상을 정확히 꿰뚫고 계십니다. 하하하!」
제임스는 정말 즐거워했다.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는 듣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하지만 예외가 하나 있었는데, 레아였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민우가 그녀에게 맥주 캔을 내밀었다.
「레아 씨도 한잔하고 가세요. 친목 도모라고 생각하시고. 매번 일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가끔은 이렇게 어울려 노는 것도 좋아요.」
「괜찮습니다. 전 운전을 해야 해서요.」
「그거 알콜 없는 거예요. 전에 한 번 먹어봤는데 맛있더라고요.」
평소의 레아였다면 정중히 거절하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것이다.
하지만 지음사에서 있었던 어떤 일 이후로, 그녀는 민우라는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들었다. 그래서 맥주 캔을 받았다.
민우는 마른안주와 과자를 뜯어 앞에 늘어놓았다. 제임스 마렛이 캔을 들고 재촉했다.
“Cheers!”
캔이 부딪히며 거품이 살짝 튀었다. 제임스가 손등에 묻은 거품을 입술로 훔치며 말했다.
「이거 분위기가 딱 제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네요. 그때도 친구 몇 놈들이랑 몰래 모여 이렇게 술을 먹곤 했는데.」
「그런 걸 자랑이라고 떠들고 다니시면 곤란합니다.」
「뭐 어때. 우리끼린데. 그리고 레아. 난 학창 시절이라고 했지 몇 살이라고는 얘기 안 했다고.」
「몰래라는 단어의 맥락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죠.」
「이거 참, 그냥 택시 타고 올 걸 그랬나? 하하하.」
제임스는 일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과 대학원을 다녔던 때의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레아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도 하지 않았지만, 가끔 묻거나 잔소리를 하며 장단을 맞췄다.
민우는 술을 사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더욱 가까워진 것은 물론, 제임스 마렛과 레아 앤더슨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었으니까.
밤이 깊어질 때까지 세 사람의 이야기는 그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제임스와 미팅을 하기 전에 민우는 우선 학교에 들렀다. 어제 학회 토론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 서지훈 교수는 안에 있었다. 그런데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왔냐?”
“여긴 웬일이야?”
한진섭이었다. 그는 소파에 편히 앉아 헤벌쭉 웃고 있었다. 왠지 불길한 웃음이다. 일단 민우는 서지훈 교수에게 인사했다.
“그래. 잠깐 앉아 있어라. 지금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있어서. 커피 마시고 싶으면 좀 내리고.”
“옙.”
커피를 마시려고 가보니 메이커가 텅 비어 있었다. 한진섭을 힐끔 노려본 민우는 원두를 갈아 메이커에 넣고 자리로 돌아왔다.
“빈둥거리지 말고 마셨으면 커피 좀 채워 넣어라. 어?”
“거 커피 하나 가지고 잔소리는. 흐흐흐.”
“뭐 좋은 일 있어?”
한진섭은 대답 대신 종이 한 장을 민우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을 캡처한 것이었는데, 상단에는 ‘국제어학원 강의평가결과’라는 문구가 보였다.
“이제야 알겠네. 강의평가 평점 작살나서 그렇게 정신 나간 듯이 웃고 있었…….”
민우는 말을 멈췄다.
평점을 확인해 보니 4.92였다. 믿을 수가 없어 종이를 가까이 대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민우가 알기로 국제어학원 강의평가 만점은 5점이었다.
민우가 한마디 했다.
“조작이냐?”
“뭘 그런 거 가지고 조작을 하겠어? 하하하핫!”
“이야…… 명인대 국제어학원 수준 알 만하네.”
그래도 내심 감탄했다. 한진섭이 사교육 쪽으로 경험이 많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바로 성과를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특유의 유머와 위트가 있다. 그게 학생들에게 통한 모양이었다.
“아마 진섭이가 국제어학원 한국어파트에서 1등일 거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1학기 우수강사상을 받겠지.”
서지훈 교수가 그렇게 말하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다리를 꼬았다.
그는 다른 의미로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학 파트 대학원생 강사들을 제치고 한진섭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까. 사실 별일 아니긴 해도 감주형 교수는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서지훈 교수가 물었다.
“한진섭. 다음 학기에도 강의할 수 있겠나? 너도 이제 4학기라 논문을 써야 할 텐데. 원한다면 내가 민영환 선생님께 잘 말씀드려 보마.”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꼭 해보고 싶어요. 적성을 찾은 거 같습니다.”
“적성?”
민우가 묻자 한진섭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앞으로 계속 한국어교육 쪽으로 가볼 생각이다. 한 학기 해보니까 생각보다 좋았어.”
“너무 쉽게 결정하는 거 아냐?”
“아직 시간 있잖아. 그래서 한 학기 더 해보려는 거지.”
그렇게 대꾸한 한진섭이 서지훈 교수를 당당히 바라보았다. 결정을 내려달라는 의미였다. 서지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다음 학기에도 강사 추천을 해 주마.”
“감사합니다!”
“다만, 일의 우선순위는 확실히 정해 놔. 지금 너한테 중요한 건 국제어학원 강의가 아니라 석사학위 논문이니까. 추가 학기 다니지 않도록 신경 쓰고. 한 학기 뒤처지면 민우한테 평생 시달리지 않을까?”
민우가 악마 같은 표정을 지었다. 흠칫 놀란 한진섭이 각오를 다졌다.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이번 학기에 꼭 쓰겠습니다. 그럼 선생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씀 나누세요.”
“그래.”
한진섭이 인사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가 나가자마자 서지훈 교수가 운을 뗐다.
“이거 웬만해서는 칭찬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할 수가 없군. 박민우. 어제 발표는 훌륭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해 더 이상의 지도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톱클래스는 아니지만, 민우가 박사급에 도달한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제 그에게 부족한 것은 실전 경험뿐이었다.
“학문적인 성과보다는 동료를 배려하는 마음이 돋보인 무대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용기를 냈더구나. 민 선생님은 별말씀 없으셨나?”
“수고했다고 하셨어요. 여기 오기 전에 들렀습니다.”
“서강일 선생이 한일대생이라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다만…… 앞으로 둘이 잘해 봐. 분명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야.”
“예.”
담배를 짓이겨 끈 서지훈 교수가 진지하게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는 조금 긴장했다. 이럴 때마다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으니까.
“석사 논문이야 알아서 뚝딱 만들 테고. 이제 문제는 박사과정인데.”
잠시 사이를 두고 서지훈 교수가 말을 이었다.
“전에 이야기했던 거에 변동사항 있나? 그때 분명히 그랬었지. 국문학과 세계문학의 창구 역할을 하겠다고. 국문과에서 말뚝을 박겠다고.”
“변함없습니다. 오히려 확실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군.”
문제가 끝난 듯했지만, 서지훈 교수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아직 넘어야 하는 것들이 남은 모양이다.
“그럼 지도교수는?”
“선생님께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나?”
“네.”
민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 말은, 이미 그에 관한 계획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서지훈 교수는 그게 궁금했다.
“이유는?”
“학계를 조금씩 바꿔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민영환 선생님보다는 선생님 밑에서 움직이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민영환 교수와 서지훈 교수는 세대가 살짝 다르다. 게다가 누구나 인정하듯, 서지훈 교수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박사과정에 들어간다고 해서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석사 때와 비슷하다. 박사를 따고 나서도 마찬가지. 메이저 대학의 교수가 되지 않는다면 학계를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민우는 박사를 딸 때까지 서지훈 교수 밑에서 힘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이번 미국에 다녀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소르본의 밤’에서는 젊음을, IAHS에서는 가능성을 느꼈죠.”
“젊음과 가능성이라. 좀 모호한데.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하고 싶다는 거냐?”
“지금 학계는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느낌이 강하죠. 학부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참여를 장려하면서 규모를 더 키워보고 싶습니다.”
“일반인들까지? 그건 좀 의외네.”
“인문학을 하는 입장에서 대중을 빼놓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어요. 학위가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봐요.”
“흐음…….”
서지훈 교수는 대답을 보류했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민우의 계획은 듣기에 굉장히 좋아 보였지만, 아무래도 급진적이었다.
민우가 덧붙였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제가 잘못 판단하는 부분도 있겠죠. 하지만 선생님과 함께라면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생각의 근거는?”
“논리적인 근거는 없어요. 그냥 믿음이죠. 오랜 시간이 만들어 준.”
서지훈 교수는 물끄러미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의 두 눈엔 신뢰가 한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눈빛 하나는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다면 해 줄 이야기는 딱 하나뿐이다.
“좋아. 그럼 네 박사과정 지도는 내가 맡으마.”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민우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해맑게 웃은 그의 머릿속에 하나둘 미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 * *
면담을 끝내고 307호로 돌아왔다. 석사생들 몇 명이 민우를 보고 인사했다. 거기엔 진섭과 예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섭. 잠깐 얘기 좀 하자.”
“……무섭게 왜 이래?”
“시간 없으니까 빨리 나오기나 해.”
그렇게 두 사람이 인문관을 나섰다. 한진섭의 얼굴엔 긴장이 한가득이다.
“무슨 얘긴데 밖에까지 나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별로 좋을 거 없어서.”
“헐…… 서지훈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냐? 안 그래도 좀 맘에 걸리긴 했는데. 아까 좀 나댄 거 같아서.”
민우는 피식 웃었다. 겁에 질린 한진섭의 모습은 언제 봐도 재미있다. 조금 더 놀려줄까 하다가 시간이 없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음사 인문사회연구소에 연구원 자리 하나 났어. 한국어교육 쪽으로 한번 해볼래?”
“엉?”
진섭은 깜짝 놀라 입을 멍하니 벌리기만 했다. 민우는 윤정민 팀장의 명함을 꺼내 한진섭에게 건넸다.
“연락해 봐. 얘기해 뒀으니까.”
“어, 어어…… 땡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인문관 앞에 있을 테니까 올라가는 김에 예린이 내려오라고 해줘.”
알겠다고 대답한 한진섭이 307호로 뛰었다. 그렇게 30분 뒤, 명인대입구역 카페에서 미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