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 더 높은 곳을 향해 (1) (173/500)


173. 더 높은 곳을 향해 (1)
2022.03.10.


인터뷰는 학생회관에 있는 카페에서 진행됐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사진 기자가 들고 있는 커다란 카메라 때문에 이목이 집중됐다.

하지만 민우와 강일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박윤지 기자에게 집중했다.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오늘 발표가 재미있었던 건 역시 학계의 통설이 뒤집힌 부분인데요. 이 부분에 대해 좀 설명해 주세요.”

“아쉬움이랄까 좀 그런 게 있네요. 조금만 관심을 갖고 원문을 연구했다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부담감이나 그런 건 없으셨나요?”

서강일이 웃었다. 통설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문가나 선배 학자들의 손을 거쳐야 한다. 그들이 무섭지 않았냐는 질문이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계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경직되어 있진 않습니다. 수많은 오류와 정정이 반복되곤 하죠. 가끔 감정싸움으로 번지긴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번 건은 별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강일은 동의를 구하듯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연구자의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죠. 수가 부족해지니 연구 분야가 협소해지고, 결국 이대로라면 국문학은 기초학문이 아니라 보호 학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군요. 최근 국문과가 통폐합되는 소식이 가끔 들려오는데, 그것과 관계가 있는 걸까요?”

“복합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결국, 국문학 박사들이 갈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대학이니까요. 학과가 없어지면 갈 곳이 그만큼 줄어드는데, 이런 상황이니 대학원에 오려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죠.”

서강일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박윤지 기자는 분위기 컨트롤에 능숙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호응했다.

“역시 학문의 길은 쉽지 않은 것 같네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오늘 발표가 재미있었던 또 다른 부분은 강일 씨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민우 씨가 바로 해결했다는 부분일 텐데요. <비행선>의 원작을 공개할 때 말예요. 그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아, 이건 꿈인가 싶었죠.”

서강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웃을 수 있었다.

“솔직히 향후 몇 년간은 누구도 발견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운도 운이지만 과학소설 쪽은 연구가 잘 안 되는 분야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박윤지 기자가 이번엔 민우 쪽을 주목했다.

“민우 씨는 토론 때 운이라고 자평하셨죠?”

“예. 운이죠. 처음 발견했을 때 얻어걸렸다는 느낌이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서 선생한테 미리 얘기해서 놀려주고 싶었는데 참느라 고생 좀 했네요.”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발표 하나에 논문 두 개를 읽는 느낌이었어요.”

민우가 설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반씩 한 거죠. 김교제의 <비행선>이라는 큰 테마에 대한 공동 연구라고 할까요. 앞으로는 서 선생과 여러 부분에서 협동 연구를 많이 할 계획입니다.”

“협동 연구. 뭔가 설레는 표현인데요. 이렇게 젊은 학자분들이 의기투합하는 건 오랜만에 보네요.”

“앞으로 저희들이 많이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명인대 여학생들이 서강일을 보고 수군거렸다. 민우도 인물이 좋은 편이었지만, 확실히 서강일도 매력적이다. 몇몇 여학생들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구석에선 은근슬쩍 따라온 강민희가 무심하게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범생이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말이야. 가! 가버리라고!’

주변 테이블에서 서강일에 대한 호평이 나올 때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신경질적인 빨대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렇게 하나둘 사람들이 인터뷰 장소로 모여들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박윤지 기자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이제 두 분의 미래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요. 먼저 서강일 선생님은 어떤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있으신가요?”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물론이죠.”

“학자금 대출을 갚는 게 일 순위 목표입니다.”

“아.”

박윤지 기자가 당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 솔직한 한마디였다.

“대학원은 장학금을 받으면서 어떻게 다니고는 있는데, 역시 좀 부담이 되네요. 박 선생처럼 부업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

“학자금 대출 상환은 굳이 대학원생들만의 고민은 아니죠.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면 대부분 하는 고민일 겁니다.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데 그때가 제일 고비라고들 하더라고요.”

민우가 거들었고, 박윤지 기자는 자연스레 질문을 대학 등록금 쪽으로 옮겼다. 교육의 질에 비해 지나치게 비싸다는 게 두 사람의 의견이었다.

박윤지 기자는 적절히 수위를 조절했다. 이대로라면 학제에 대한 토론이 될 분위기였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민우 씨의 목표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서 선생도 마찬가지겠지만 석사 논문을 쓰는 게 저의 단기간의 목표구요.”

이어지는 말은 장기간의 목표일 것이다. 서강일도, 박윤지도 민우의 말을 기다렸다.

민우가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던졌다.

“장기간의 목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겁니다.”

“푸웁!”

서강일이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포부였다. 다행히 순간 고개를 돌려 대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아, 진짜.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노벨상이라니!”

“뭐 어때서?”

민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눈빛을 보니 농담이 아니었다.

서강일은 냅킨으로 입가를 훔쳤다.

표정이 곧 진지해졌다. 자신은 교수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민우는 그 이상의 목표를 설정해 놨다는 게 좀 충격이었다.

“괜찮으세요? 손수건 드릴까요?”

박윤지 기자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지만 서강일은 정중히 사양했다. 다소 머쓱한 표정으로 그녀가 다시 질문했다.

“보통 대학원생은 교수가 되는 게 목표라고들 하는데. 노벨문학상이라면 시나 소설을 쓰시려는 건가요? 창작 쪽에도 재능이 있으신 건지 궁금하네요.”

“이게 노벨문학상을 둘러싼 흔한 오해인데…… 최근에 주로 작가들에게 상이 돌아간 경향이 있긴 하지만 철학자나 역사가들도 수상한 전례가 있어요. 베르그송, 러셀, 그리고 사르트르를 포함해서요. 아, 참고로 사르트르는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엔 기자가 받기도 했지요. 리터러쳐(literature)를 ‘문학’으로 번역해서 생긴 작은 오해라고 할까요. 쓰는 행위, 즉 리터러시(literacy)라는 보편적인 의미가 들어간 상으로 봐야 적절하죠. 그러니 학자라고 해서 못 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수상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국내엔 아직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으니까요.”

“상을 받게 되면 첫 인터뷰를 박윤지 기자님께 청하겠습니다.”

민우가 여유롭게 웃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녹음을 종료하고 박윤지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서 꾸벅 인사했다.

“오늘 인터뷰 정말 감사드려요. 기사 준비되면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제가 민우 씨 연락처는 있는데 강일 씨 연락처가 없네요. 좀 알려 주시겠어요?”

박윤지 기자가 핸드폰을 건넸다. 약간의 사심이 보였지만, 서강일은 대수롭지 않게 번호를 찍었다.

‘저 여우가!’

강민희가 인상을 쓰며 빨대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이미 번호가 찍힌 뒤였다.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조심히 가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들어가세요.”

박윤지 기자와 사진 기자가 먼저 자리를 떴다. 좀 더 앉아 있으려는 모양인지 민우는 커피를 리필해 왔다.

민우가 물었다.

“저녁 먹고 가냐?”

“글쎄. 장 선생님 하시는 거 봐서. 뒤풀이 가시면 가고 아니면 마는 거지. 넌?”

“난 바람 좀 쐬고 집에 가려고. 밀린 잠 자야지. 솔직히 요즘 좀 무리했어. 한 달 만에 논문 완성하는 거 사람이 할 짓 못되더라.”

철야를 밥 먹듯 했다. 예전이었다면 코피가 터졌겠지만 요즘은 운동을 꾸준히 해서 체력이 올라온 상태였다.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서강일이 물었다.

“그럼 이제 등재지에 세 편 실은 건가?”

“그렇지. 원래 한 학기에 두 번 발표하려고 했는데 다음 학기는 어렵겠다. 석사 논문 써야 하니까.”

“독한 놈.”

서강일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말이 등재지 세 편이지 석사 3학기는 결코 꿈도 꾸지 못할 업적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민우에게 물었다.

“석사 논문 준비는?”

“개요는 나왔어. 이제 살을 붙여 봐야지. 넌?”

“난 아직 들어가지도 못했다. 테마만 정해놓은 상황이야. 좀 촉박하네. 이번 발표 때문에 무리수를 둔 게 컸어.”

“괜히 연구등록비 내지 말고 한 번에 끝내.”

“잔소리는.”

서강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구석에 앉아 있던 강민희도 따라 일어섰다.

“가게?”

“가야지. 오늘은 좀 그렇고 언제 시간 한번 내라. 술이나 한잔하게.”

“그럽시다.”

몇 발자국 걸어가던 서강일이 문득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던 민우도 멈칫하며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서강일은 어느새 돌아서 있었다.

“고맙다. 생각해 보니 인사를 제대로 못 했네. 오늘 진 빚은…….”

“오글거리니까 그냥 가. 쫌.”

민우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피식 웃은 서강일은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곧 강민희가 우연을 가장해 그의 옆에 다가섰다.

민우는 기지개를 켰다. 시원한 탄성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 나도 슬슬 가볼까?”

민우는 바로 집으로 가려다 방향을 바꿨다. 강민희의 모습을 보니 왠지 수빈이 생각이 났다. 민우는 잠깐 보자고 톡을 보냈다.

* * *

수빈에게 한껏 칭찬을 들은 민우는 들뜬 기분을 만끽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레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예. 레아 씨.”

― 오늘 학회는 어떠셨습니까?

“좋았어요. 원하던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 그런데 용건은요?”

― 다름이 아니라 제임스 편집장님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내일 출국인 건 아시죠?

“모를 리가요. 내일 만나기로 했잖아요.”

좀 이상했다. 레아는 스케줄 관리에 철저했다. 분명 내일 잠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 사소한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제임스 편집장님이 괜찮으시면 지금 뵙자고 하시네요.

“지금요?”

― 예.

무슨 일일까. 민우는 양말을 벗던 손을 멈추며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래도 프로젝트 관련한 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전 상관없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 댁이시죠? 나오기 번거로우시니 제가 그쪽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래 주심 감사하죠.”

전화를 끊은 민우는 양말을 다시 신었다. 어떤 옷을 입고 있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만두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현관을 여니 제임스와 레아의 모습이 보였다.

「하하하! 이거 또 밤늦게 실례를 끼치네요.」

「아뇨. 저도 이제 막 들어와서. 일단 들어오세요.」

제임스가 다시 사과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옆에서 수행하던 레아는 그러면 좀 하질 말든가, 라는 표정이었다.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살짝 웃은 민우가 물었다.

「뭐 마실 거 드릴까요?」

「맥주 있습니까?」

민우가 깜짝 놀랐다.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 레아가 대신 대답했다.

「매니저님. 주스 두 잔이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왜 그래? 맥주는 마실 거 아닌가?」

「밤늦게 찾아온 것만으로도 큰 실례라는 생각은 안 드시는지요?」

「이런 이런. 레아. 직무에 너무 철저한 거 아닌가? 출판사에서는 내가 상사인데.」

「지금은 아니죠.」

레아가 빙긋 웃었다. 제임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레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 음료수로 준비할게요.」

민우는 컵에 얼음을 채워 주스를 준비했다.

제임스는 들뜬 어린아이처럼 민우의 자취방을 두리번거렸다. 보다 못한 레아가 실례라고 조용히 경고했다.

잠시 후 민우가 주스가 담긴 컵을 두 사람 앞에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밤늦게 어쩐 일이세요? 내일 뵙기로 했었는데. 프로젝트에 뭐 문제라도 생겼나요?」

「아뇨. 그냥 겸사겸사 왔습니다. 아직 시차가 적응이 안 돼서. 밤에 잠이 잘 안 오더라고요. 하하하.」

레아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제임스가 웃음을 뚝 멈췄다. 아무래도 본론을 꺼내지 않으면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크흠, 왜 전에 주신 원고 있잖습니까? <세계수>. 그 작가분을 좀 소개받고 싶어서 말입니다.」

민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좋은 쪽으로. 곧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계약이 가능한 건가요?」

「아니, 아직 결론을 내리진 않았습니다. 그전에 작가님께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제임스의 눈빛이 진지했다.

민우는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주예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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