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여름날 (4) (172/500)


172.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여름날 (4)
2022.03.07.


서강일은 유창하게 발표를 이어갔다. 발표가 아니라 강연을 보는 듯했다.

발표와 논문 모두 명쾌한 느낌. 근거로 사용된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어 전공자가 아니라도 한눈에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먼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부터 보실까요. 국내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1907년입니다. <해저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되었지요. 그런데 원작으로 추측되는 건 두 작품입니다. 1884년 2월 이노우에 츠토무가 번역한 판본과 1884년 8월 다이헤이 산지가 번역한 판본이 바로 그것인데요. 잠시 목차를 정리한 표를 보시죠.”

서강일은 목차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번역자가 어떤 판본을 참고로 했는지를 설명했다. 고등학생이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어떤 판본이 더 유사한지는 보시다시피 한눈에 파악이 가능합니다. 다이헤이 산지가 번역한 판본이 거의 일치하지요. 즉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는 일본을 거쳐 중역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세계>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유산>은 조금 다릅니다. 과정이 훨씬 복잡하지요.”

서강일은 각종 자료와 설명을 곁들여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유산>이 국내에 어떻게 수용이 되었는지를 밝혀 나갔다.

“앞질러 요약하자면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유산>은 무려 세 나라를 거쳐 국내에 수용됩니다. 미국, 일본, 중국인데요. 먼저 영어로 번역되고, 이를 모리다 시겐이 일본어로 번역하여 중국으로 넘어갑니다. 신소설 작가로 유명한 이해조가 참고한 판본은 포천소가 엮은 중국어판입니다. 그 근거는 밑의 표에 정리된 바와 같습니다.”

한차례 논증을 마치고 청중을 바라보며 서강일이 싱긋 웃었다.

“수용 관계를 밝히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재미가 없겠죠? 이건 제가 논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준비하는 단계일 뿐입니다. 진짜는 이제부터죠.”

서강일의 논문은 외국 작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국내에 들어왔는지를 밝힌 것에서 끝내지 않았다.

그는 특히 19세기 말부터 일본에서 활발하게 과학소설이 번역되고 창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1981년 토미다 히토시는 <프랑스 소설이입고>를 통해 당시 일본의 과학소설 붐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자연과학의 지식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의 열매를 맺고 제국 열강과 함께 진출하는 것’이라고. 즉 과학소설은 일본 제국주의에 사상적, 문화적 기반을 제공한 셈인데요. 따라서 이 시기의 과학소설 수용사를 연구하는 것은 한국 근대사는 물론 근대문학 연구와 맞닿아있는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강일은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이것이 본 논문의 의의이자 핵심이라고 자평했다. 그렇게 본론 부분이 끝났다.

좌중이 술렁였다. 모두가 서강일의 발표에 몰입하고 있었다.

석사 3학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발표였다. 지도교수인 장소필 교수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훌륭하네요.”

턱을 괸 서지훈 교수가 아낌없는 평가를 내렸다. 애초에 빈틈이 별로 없었던 논문인데, 초고에 비해 더욱 촘촘해진 느낌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민영환 교수도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생각이었다.

“한 학기가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실력이 늘 줄이야. 장소필 선생이 괜히 허풍을 떠는 게 아니었어.”

“그러게 말입니다.”

실력도 실력 나름이지만 분위기에서도 비장함이 느껴졌다. 침음을 흘린 민영환 교수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서지훈 교수의 옆모습이 보였다.

“넌 이번 발표를 어떻게 보나?”

“잘하고 말고의 문제는 분명 아닙니다. 애초에 서강일 선생 논문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까요. 그 약점을 민우 녀석이 보완을 했고.”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민영환 교수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서강일이 발표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서지훈 교수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자 민영환 교수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우측에 앉아 있던 이수빈도 귀를 쫑긋했다.

“민우 녀석은 상생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판을 키우려고 하고 있죠. 메이저 일간지 기자까지 동원해서 말입니다. 과연 기성학자들은 이 과정과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글쎄. 모르겠군. 이런 일이 흔하진 않잖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서지훈 교수는 웃고 있었다. 마치 그의 눈에만 무언가가 보이는 듯이.

“하지만 한 가지는 알 것도 같네요. 오늘 일을 시작으로 뭔가가 변할 거라는 사실을.”

“무엇이?”

“사람이 될 수도, 학교가 될 수도, 학계가 될 수도 있겠죠. 한번 같이 지켜보시죠. 뭐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때마침 발표가 끝났다. 서강일은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다시 마이크를 입에 가까이했다.

“토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아쉬움을 표하고 싶네요. 김교제의 <비행선> 원작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한 부분인데요. 학계에서 통설로 받아들였던 부분이 오류였음을 밝혀냈다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차후 연구에서는 그 이상의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짝―

청중에서 박수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열정적인 발표, 아니 강연이었다. 토론자석에 앉아 있던 민우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서강일 선생님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안녕하십니까. 명인대 국문과의 박민우입니다.”

이제 모든 시선이 민우 쪽으로 집중되었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도 꽤 많았다.

작년 겨울 학회에서의 토론을 시작으로 올봄에 발표를 하나 했다. 최민식과 학술서를 공저했고 KOC의 강연까지 맡았다.

또한, 번역한 작품들이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최근에는 한영번역으로 영국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쌓인 민우의 커리어가 지금 학회장에 반영되고 있었다. 꽤 많은 학자들이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서강일 선생님의 논문은 크게 세 가지 부분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는 점, 그리고 학계에 퍼진 잘못된 통설을 바로잡았다는 점인데요. 아마 앞으로 과학소설 관련 논문을 쓰는 분들은 반드시 서강일 선생님의 논문을 참고해야 할 겁니다. 그만큼 선구적이고, 미래를 내다본 작업이라고 평가하고 싶네요.”

민우는 일부러 두 가지 의의만 이야기하고 넘어갔다. 워낙 자연스러워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이어지는 극찬에 긴장하고 있던 서강일이 살짝 놀랐다. 그건 장소필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민우의 한마디 한마디는 학회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칭찬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냐?’

의심스러운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지만, 민우의 시선은 청중을 향해 있었다.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 생산된 과학담론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거치며 ‘남양소설(南洋小說)’이라는 아류 장르를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일본을 선진 문명으로, 남양을 야만으로 규정하여 국제사회에 자행한 다양한 행위를 살펴볼 수 있는 거지요. 총평은 이쯤하고, 오늘은 토론보다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돌연 민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구석에 서 있던 주예린이 스위치를 올렸다.

우우우웅―

무대 뒤쪽에서 스크린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곧 빔프로젝터가 작동했고, 민우는 품에서 프레젠터를 꺼냈다.

민우는 파워 버튼을 누르기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 발표를 들으신 분들은 좀 아쉬울 겁니다. 미완의 과제가 하나 남았으니까요. 김교제의 <비행선>의 원작. 대체 어떤 소설이 원작인지 다들 궁금하실 텐데요.”

민우가 파워 버튼을 눌렀다.

번쩍!

블라인드 되었던 화면이 켜지며 오래된 잡지의 표지가 보였다. 영어 잡지였는데, < NEW NICK CARTER WEEKLY >라는 제목이 씌어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보던 서강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설마……!”

민우는 그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다시 마이크를 입에 댔다.

“지금 보시는 건 1907년 3월 16일 간행된 미국 잡지의 스캔본입니다. 다임 노블 주간 잡지 중 하나인데, 바로 여기에 <비행선>의 원작이 숨어 있지요.”

“오오!”

탄성이 흘러나왔다. 민우는 프레젠터를 조작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사진 기자는 그 장면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셔터를 눌러댔다.

플래시가 조금 거슬렸지만, 민우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명과 등장인물이 모두 음차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줄거리도 동일하고요. 원문을 확인해 봤는데 내용도 같았습니다.”

슬라이드가 넘어가고 표가 나왔다. 수록 매체와 권호수를 정리한 표였다. 민우는 잡지의 533호부터 536호까지의 내용이 <비행선>의 원작이라고 덧붙였다.

민우가 화제를 돌렸다.

“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김교제가 미국의 잡지를 보고 직역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앞서 서강일 선생님께서 잘 설명해 주셨듯이 이 또한 중역입니다. 중국을 거쳐 왔지요. 대본은 1908년 1월 중국에서 출간된 <신비정>입니다.”

민우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나 좌중의 술렁임은 여전했다. 학자들은 서로 모여 의견을 나누거나 턱을 괴고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로 <비행선>의 원작은 확정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번에 발간되는 <현대문학연구> 57호를 봐 주세요. <비행선>과 다임 노블을 연구한 제 논문이 실릴 예정입니다.”

민우는 시선을 서강일에게 돌렸다. 그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이제는 벌여놓은 일을 수습할 시간이었다.

“<비행선> 원작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운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서강일 선생님의 연구가 없었더라면 추적 작업에 착수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까 제가 토론 시작할 때 했던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이게 바로 서강일 선생님의 논문이 가지는 세 번째 의의입니다. 선구자로서 후속 연구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 앞으로도 새로운 발견은 계속될 겁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민우는 서지훈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제야 민우는 끝맺음에 들어갔다.

“이상으로 토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서 청중을 향해 인사했다. 뜨거운 박수가 장내를 울렸다. 서강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박민우.”

민우가 돌아섰다. 서강일은 모든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보였다.

“이제 좀 후련하냐?”

“잔소리가 좀 걱정되긴 하다만… 뭐.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후회는 없어.”

승패를 가를 수 없는 토론이었다.

서강일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발표를 했고, 민우는 새로운 발견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이 모든 게 민우가 설계한 대로 흘러갔다.

서강일의 논문을 추켜세우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임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확실히 서강일은 코너에 몰려 있었다.

공부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그가 대학원을 그만둔다면, 그건 민우에게도 큰 손해다. 아직 서강일 만한 자극제가 없었으니까.

민우는 장소필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젠 마음을 좀 놓아도 될 것 같다.

“자, 서강일 선생님. 발표 준비하느라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너도.”

“매너 없게. 나는 기껏 선생님 소리 붙여 줬구만.”

민우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서강일이 웃으며 팔을 뻗었다. 두 손이 맞잡히는 순간, 사진 기자가 셔터를 눌렀다.

연단을 내려오며 서강일이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웬 기자가 학회에 왔지? 우리 발표만 찍어가는 거 같던데.”

“위스키 대신 선물 하나 더 준비했다. 잠깐 시간 되지?”

“갑자기 뭔 소리냐?”

민우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서강일을 끌고 홀을 나섰다. 그곳엔 박윤지 기자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 발표 너무 잘 들었어요! 열정이 느껴지는 무대였네요. 대학원하면 칙칙한 느낌이었는데 두 분을 보니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아, 감사합니다. 근데 누구세요?”

“저는 박윤지라고 해요. 경한신문 문화부 기자입니다.”

박윤지는 명함을 건넸다. 살짝 놀란 서강일이 명함을 확인했다. 확실히 경한신문 기자가 맞았다.

“오늘은 두 분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괜찮으시면 자리를 좀 옮길까요?”

“이야기를요?”

서강일은 멍한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다가 속셈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민우는 눈앞의 기자와 이미 아는 사이 같았다.

‘아무래도 당분간 이 녀석을 이기는 건 불가능할 거 같은데?’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좋은 쪽에 가까웠다.

“가자.”

민우는 멍하니 서 있는 강일의 어깨를 툭 치고 앞서 나갔다. 곧 미소를 되찾은 강일은 발돋움하며 민우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붉게 물든 노을이 두 사람의 등을 포근히 감쌌다.

16557838269647.jpg

16557838269657.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