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여름날 (3)
(171/500)
171.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여름날 (3)
(171/500)
171.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여름날 (3)
2022.03.04.
“오빠는 오전부터 학회 참여할 거지?”
“그래야지.”
두 사람은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가 열리는 리셉션 홀 앞에 섰다. 수빈은 다소 아쉬운 표정이었다.
“난 오후에 등록할게. 오전에 설예라 선생님 만나야 해서.”
“잘되고 있는 거지?”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준비하는 평론 이야기였다.
“올해는 꼭 등단해야지. 오빠한테 안 지려면.”
사실 수빈은 등단할 기회를 얼마 전에 얻었다. 설예라 교수가 <현대문예> 평론 부문에 추천을 해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현대문예>는 국내 메이저 계간지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예지였다.
하지만 이수빈은 단번에 거절했다.
메이저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은 자신의 꿈이자 목표였다. 몇 번 도전해 보지도 않고 도움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지도 잘 받고 와. 이따 보자.”
“응.”
두 사람은 손을 흔들어 보이며 헤어졌다. 민우는 접수가 진행되고 있는 리셉션 홀로 들어갔다. 접수 데스크에는 강예진과 주예린이 앉아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왔네?”
“오셨습니까! 선배님.”
IAHS를 경험한 탓일까. 아니면 접수 데스크에 익숙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 민우는 능숙하게 학회 등록 절차를 마무리했다.
강예진이 명찰과 학회지를 건네며 물었다.
“준비는 많이 했니?”
“민 선생님께 혼나지 않을 정도로는요.”
“허들이 너무 높지 않냐.”
그래도 민우는 자신이 있었다. 준비는 철저히 했고, <비행선>의 원작이 무엇인지 공개해도 뒤탈이 없을 만큼 미리 손을 써 뒀다.
물론 그 자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지훈 교수와 민영환 교수도 민우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
민우의 뒤쪽을 훑어보던 강예진이 물었다.
“근데 수빈인 안 보이네? 오늘 학회 참석한다고 하지 않았니?”
“오전에 평론 때문에 설예라 교수님하고 상담한다고 해서요. 이따 오후에 등록한대요.”
“진섭이도 안 보이고.”
“걔 국제어학원 때문에 정신없어요. 요즘 잘나가나 보던데요?”
강예진이 턱을 괴며 민우를 올려다보았다. 연륜이 느껴지는 포근한 미소가 걸렸다.
“너희도 나이를 먹어 가는구나.”
“나이요?”
방명록을 쓰려던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처음 입학했을 땐 뭘 해도 같이 했잖아. 햇병아리들처럼. 그런데 이제 그런 시절이 지나고 뭔가 서로 나아갈 방향을 찾은 느낌이랄까. 하나둘 나이를 먹고 각자의 길을 가는 그런 느낌. 그래서 한 말이야.”
각자의 길.
민우는 자연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아니 맞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최근에는 서로 모이는 일이 드물었다. 다들 바쁘고 각자의 분야에서 이제 막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니까.
민우는 번역가로, 수빈은 평론가로, 진섭은 어학당 강사로, 그리고 예린은 소설가로.
그래도 민우는 이 모든 것을 긍정했다. 예전에 비한다면 다들 더 높은 곳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슬쩍 엿보고 오고 싶을 정도로.
민우가 말했다.
“언제까지 제자리에 멈춰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다른 의미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어른이라…… 좋은 말이네.”
멋들어진 필체로 방명록 작성을 마친 민우는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잖아요. 이제 슬슬 자리 넘기셔야죠. 민 선생님 연구실에서는 민식이 형 다음이 누나니까.”
“안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 학회부터는 손 떼야지.”
“얼마나 걸릴 거 같아요?”
“감도 안 와.”
다름 아닌 박사 논문 이야기였다.
박사 논문은 석사 논문과 격이 다르다. 석사 논문이 학계에 입문하는 단계라면, 박사 논문에서는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줘야 했다.
“그사이에 강의는 안 하시고요?”
“몇 군데 제안이 들어온 데가 있긴 한데 생각 중이야.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에 논문 한 글자 더 쓰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당장에 돈이 급한 건 아니니까.”
“제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자료 찾는 데는 도가 트지 않았습니까?”
명인대 국문과에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최민식의 박사 논문뿐 아니라 민우는 다른 선배들의 논문에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곤 했다.
강예진은 웃었다. 마음만 받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도 석사 논문 써야 하는데 어떻게 손을 벌리니. 염치없게. 마침 적당한 사람 점찍어 놨으니 너무 걱정할 거 없단다.”
“누군데요?”
강예진의 시선이 옆에서 보조를 하던 주예린을 향했다.
흠칫 놀란 그녀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강예진은 맞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주예린은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민우는 그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타대생인데 잘 적응했다. 논문을 도와준다는 건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니까.
민우가 가볍게 묵례했다.
“그럼 고생하세요.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리고 예린이 너. 정신 차리고 잘해. 나도 거기 한 번 앉아봐서 아는 데 쉬운 거 아니다.”
“넵! 걱정 마십셔.”
“점심은 삼각김밥이고.”
“엑!”
씨익 웃은 민우는 바로 홀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 위엔 학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고, 그 아래로 연단과 발표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이크와 생수 몇 병이 발표석 위에 놓여 있었다.
‘그대로구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네.’
작년 여름에 학회가 열렸던 바로 그 장소였다. 이번 학회에서는 해외 연사들이 참여하지 않아 참가 인원은 적을 거라고 들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중요한 건 학회의 규모가 아니니까.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겠지. 몇 명이 오든…… 오늘은 기념비적인 날이 될 거야.’
자신 있게 웃은 민우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학회지를 펼쳐 오늘 있을 발표를 미리 체크했다.
이번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는 2부로 나눠 진행된다. 오전에 열리는 1부는 테마발제 시간이고, 점심 식사 후에 열리는 2부는 자유발제 시간이다.
‘강일이 발표는 2부에 있으니 점심 먹고 숨 돌릴 틈도 없겠구나. 바로 와서 준비하는 게 좋겠어.’
일정 체크를 끝낸 민우는 가방에서 필통을 꺼냈다.
그 안에는 루카치의 만년필과 307호 멤버들에게 선물로 받은 만년필이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싱긋 웃은 민우는 케이스를 닫았다.
슬슬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1부 시작을 앞두고 참가자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엔 민영환 교수도 섞여 있었다. 민우는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갔다.
“선생님 오셨어요?”
“그래. 준비는?”
“충분히 했습니다.”
그 대답에 민영환 교수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충분히? 또 잔소리를 하게 하는군. 세상에 충분한 공부는 없다. 보고 또 봐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거늘.”
민영환 교수는 오늘따라 예민해 보였다. 평소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오늘은 한일대의 장소필 교수가 오는 날이다.
“아무튼 끝까지 방심하지 말고 진지하게 임해라. 알았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음?”
다행히 민영환 교수가 누군가를 알아본 덕에 잔소리가 일찍 끝났다.
장소필 교수가 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서강일과 강민희의 모습도 보였다. 환하게 웃은 민영환 교수가 두 팔을 벌렸다.
“아이구, 장 선생님. 이거 오랜만입니다. 일찍 오셨군요?”
민영환 교수가 교묘하게 말끝을 올렸다. 평소에 매번 늦게 오던 사람이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냐는, 약간의 비꼼이었다.
“하하하. 중요한 날인데 늦을 수는 없지요. 이야. 역시 명인대는 대단합니다. 이렇게 좋은 장소에서 학회가 열리다니. 부럽군요. 국제적인 행사를 치러도 손색이 없을 정돕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일대도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워서 그런지 한산하군요? 학회도 하루로 끝나고 말입니다. 으음. 이거 빨리 가을이 오든지 해야…….”
장소필 교수도 그냥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그의 말투에도 은근한 조롱이 숨어 있었다.
순간 민영환 교수의 눈매가 꿈틀했지만, 그는 미소를 유지하며 환담을 이어갔다.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민우와 강일은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바로 그때였다.
“잠시 후 2017년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서는 착석하여 주십시오.”
사회자가 아니었다면 두 교수는 계속해서 기 싸움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소한 잡음과 함께 학회의 막이 올랐다.
* * *
1부 순서는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 수준 높은 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졌다. 토론자로 참여했지만 민우는 빽빽하게 필기로 노트를 채웠다.
‘이 맛에 학회에 온다니까. 오늘도 많이 배웠다!’
민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섰다.
1부가 끝났다는 건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였다.
“선생님. 식사하러 가셔야죠?”
“그래. 가 보자.”
민우는 민영환 교수와 함께 움직였다. 장소필 교수도 서강일, 강민희와 함께 식사 장소로 갔다.
점심은 근처에 있는 교직원식당에서 간단히 먹었다. 민영환 교수가 다른 교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민우는 토론 준비를 한다며 양해를 구하고 먼저 돌아왔다.
반가운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서지훈 교수와 이수빈이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
“어. 왔어? 이수빈 선생 데리고 근사한 곳에서 먹고 오는 길이다.”
“어디서요?”
이수빈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육즙이 가득한 한우가 불판 위에서 익고 있는 사진이었다.
왠지 토론을 시작하기도 전에 진 느낌이었다. 그것도 엄한 사람한테.
서지훈 교수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근데 박민우. 저기 저 사람들. 네가 불렀냐?”
서지훈 교수가 턱짓하는 곳을 바라보니 한 쌍의 남녀가 서 있었다. 얼굴을 확인한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불렀습니다.”
“일 너무 크게 만드는 거 아냐? 이번 토론은 이미 승패가 난 거나 다름이 없는데. 괜히 확인사살 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친구라면서.”
“오늘 콘셉트는 발표와 토론이 아닙니다. 인터뷰죠.”
“인터뷰? 그건 뭔 소리야?”
싱긋 웃은 민우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지훈 교수가 곧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닫고는 허탈히 웃었다.
“그런 거였나. 참, 하여간 오지랖하고는. 선심도 정도껏 써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소리긴. 이수빈 선생 남친 하나는 잘 뒀다는 소리지.”
이수빈의 얼굴이 이유 없이 새빨개졌다.
때마침 민우는 서지훈 교수가 지목한 한 쌍의 남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그중 남자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 민우 씨.”
그녀는 경한신문의 박윤지 기자였다. 늘 봐왔던 사진 기자도 함께였다.
“지금 막 왔어요. 사진 건지려면 일찍 오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점심은 오기 전에 먹었고요.”
“저기, 사진은 안 찍어도 괜찮지 않나요?”
민우가 신경 쓰듯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예전에 거울을 보다 들킨 일이 떠올랐는지 박윤지 기자가 풋 하고 웃었다.
“중요한 발견을 하셨다면서요. 응당 사진이 들어가야죠. 이번엔 꽤 큰 지면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아요. 테마기획이니까. 조금은 기대하셔도 돼요.”
이틀 전, 민우는 박윤지 기자에게 기사 소스를 제공했다. 지난 100년 동안 원작이 밝혀지지 않았던 소설의 비밀을 풀었다고.
그래서 그녀가 사진 기자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었다. 큰 이슈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기사로 다룰 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물론 민우의 안배는 하나 더 있었다.
‘혼자 앞서 나가는 건 재미가 없지.’
민우는 위대한 발견의 단초를 제공한 친구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전에 박윤지 기자와 조율을 끝냈다.
테마기획 ‘젊은 연구자들’.
민우의 이야기를 들은 박윤지는 그 두 사람을 시작으로 젊은 대학원생의 일상을 다룬 테마기획을 세웠고, 이곳에 취재를 하러 온 것이다.
즉, 오늘의 주인공은 민우 혼자만이 아니라 서강일도 함께였다.
“기자님께서 알아서 잘 해주시겠지만,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맡겨만 주세요. 학회에 취재를 나온 건 처음이라 살짝 두근거리는데요? 멋진 무대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렇게 기대하시면 잘 못 하는데.”
그때 2부 순서를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우는 다시 한번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맨 앞자리로 이동했다.
먼저 도착한 서강일이 발표문을 읽고 있었다.
민우는 자연스레 그의 옆자리에 앉았는데, 강민희가 찌릿 눈치를 줬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살살 해 줘?”
작년 겨울, 서강일이 했던 말을 민우가 그대로 읊었다. 서강일이 피식 웃었다.
“그거 내 멘트 아니냐?”
“니꺼 내꺼가 어딨냐. 먼저 하는 사람이 임자지.”
“까분다.”
곧 사회자가 2부 첫 순서를 안내했다. 발표 테마가 소개되었고, 이어 민우와 강일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섰다.
먼저 연단에 오른 것은 서강일이었다. 민우는 가방을 열고 필통을 꺼냈다.
두 개의 만년필이 보였다.
민우의 선택엔 조금의 고민도 없었다. 손에 쥐어진 것은 307호 멤버들이 선물한 만년필이었다. 그는 당당히 연단에 올랐다.
“안녕하십니까. 한일대 국문과의 서강일입니다. 지금부터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곧 자신감이 넘치는 서강일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