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여름날 (2)
(170/500)
170.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여름날 (2)
(170/500)
170.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여름날 (2)
2022.03.03.
제임스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민우 씨, 갑자기 웬 빙고입니까?」
궁금할 만도 했다. 큰소리로 외친 건 둘째 치고, 민우의 표정이 마치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환했기 때문이다.
「찾고 있는 작품이 있었는데 우연히 발견했어요. 와! 진짜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민우는 여전히 <탐정 닉 카터>의 줄거리를 눈에 담고 있었다. 거기에 적힌 줄거리는 김교제의 <비행선>과 일치했다. 놀라울 정도로.
다시 말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비행선>의 원작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오, 어떤 작품입니까? 흥미가 드는군요.」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정식으로 학계에 발표하기 전까지.」
민우가 선을 긋자 제임스가 두 팔을 들었다. 지켜보던 알렉산더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집요할 정도로 짓궂은 자신의 상사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물었기 때문이다.
민우가 드디어 책을 덮었다.
「저기 죄송한데…… 식사 다 하셨으면 슬슬 일어날까요?」
민우의 얼굴엔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책을 파고 싶다고 써 있었다. 책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제임스였다. 한바탕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 민우 씨의 열정에는 어쩔 수 없군요. 한국에는 나흘간 머물 겁니다. 출국하기 전에 한번 다시 만날 수 있겠죠? 몇 가지 결정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물론이죠. 불러 주시면 시간 내겠습니다.」
「그거 반가운 소리군요. 레아. 매니저님 댁까지 잘 모셔다 드리고.」
「예. 편집장님.」
레아의 차를 타고 오며 민우는 두꺼운 책을 다시 열었다. <탐정 닉 카터>의 줄거리와 작품 정보를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레아가 지나가듯 말했다.
“정말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네요.”
“꿈을 꾸고 있는 거 같아요.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무튼 정말 이렇게 쉽게 찾을 줄은 몰랐어요.”
“한번 꼬집어 드릴까요?”
평소 사무적인 레아답지 않게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책에 정신이 팔려 있는 민우는 그녀의 사소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괜찮아요. 설령 꿈이라도 깨고 싶지가 않네요. 이 기분을 계속 느끼고 싶어요.”
레아는 눈을 힐끔 하며 민우를 살폈다.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학문에 몰두하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레아가 그 감상을 말로 옮겼다.
“매니저님은 천상 학자시네요. 공부가 세상의 전부인 사람 같아요. 저는 대학원을 가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네요.”
“칭찬으로 들어도 되는 거죠?”
“그럼요.”
어느덧 차가 민우의 자취방 앞에 섰다. 민우가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고마워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매니저님!”
레아가 불렀지만 민우는 이미 집으로 뛰어 들어간 후였다. 짧게 한숨을 내쉰 레아는 민우에게 일정에 대한 문자를 남기고 차를 돌렸다.
물론 민우는 핸드폰을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책상머리에 앉았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자. 너무 흥분했어.’
민우는 서랍에서 루카치의 유고를 꺼내 정독을 시작했다.
머리가 개운해졌다. 심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민우는 차분하게 연구 노트를 펼치고 메모를 다시 검토해 보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비행선>은 분명 <탐정 닉 카터>의 일부 에피소드를 번역한 거야.’
하지만 수용 관계를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원문 대조작업이 필요했다. 줄거리만으로 비교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원작이 연작물이라는 점인데. 잡지도 여러 개고 작가도 여러 명이야.’
제임스가 구해다 준 책으로는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민우는 바로 컴퓨터를 켜고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접속했다.
‘Nick Carter’를 검색하니 작품 캐릭터 부분에 원하는 정보가 나열되었다. 온통 영어투성이지만 이제는 안경을 쓸 것도 없었다.
민우의 눈이 반짝였다.
‘1886년 9월 18일 자 잡지에 처음 등장했고, 최근까지 계속 연작물 형태로 발표가 됐구나. 미국에서만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캐릭터였네? 이 유명한 캐릭터를 모르고 있었다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생각보다 유명한 캐릭터라는 사실이 민우를 흥분시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민우의 연구 계획은 계속 세워지고 있었다.
‘줄거리와 연도표를 보면 1907년 무렵에 연재된 잡지를 확인해봐야 해.’
민우가 난색을 보였다.
‘100년도 더 된 외국 잡지라…… 국내 대학이나 도서관으로는 어림도 없을 거 같고. 역시 미국 쪽에서 알아봐야겠어.’
눈을 감은 민우는 방법을 떠올려 보았다.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그래. 그거다!’
문득 민우는 얼마 전 미셸과 통화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그의 동료 중에 다임 노블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다임 노블을 연구한다면 원문이나 마이크로필름의 위치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쪽에 부탁해 보는 게 좋겠어.’
일단 민우는 자신이 필요한 잡지의 이름과 수록연도를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바로 메일 창을 띄워 미셸에게 정중히 청하는 메일을 보냈다.
전화할까 했지만, 지금 뉴욕은 이른 아침이라 메일을 보내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됐다. 이제 좀 씻을까?’
민우는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레아가 보낸 문자를 체크한 다음, 수빈과 통화를 하며 잠시간의 휴식을 즐겼다.
* * *
민우는 미국에서 건너온 커다란 책을 허리춤에 끼고 서지훈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로또라도 됐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었죠.”
키보드를 두드리던 서지훈 교수가 멈칫했다. 그가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 제자였다. 이런 반응은 의외였다.
곧 민우의 허리춤에 껴 있는 커다란 책에 시선이 갔다.
“뭐야? 그 무식하게 큰 책은.”
“아는 사람 통해서 구한 책인데요. 근대 과학소설 자료집입니다. 백과사전식으로 되어 있어서 색인으로 찾기 쉬운 책이에요.”
“아, 서강일이라는 친구 논문 테마가 1910년대 과학소설이라고 했었지? 민 선생님께 들었다. 얼핏 보니 재미있는 논문이던데.”
서지훈 교수는 늘 그렇듯 머그컵을 들고 커피를 따라 민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별로 생각이 없는지 자신의 몫은 챙기지 않았다.
대신 그가 물었다.
“그래서. 로또보다 더한 사건이 뭐냐?”
“그게 말이죠.”
민우는 책을 펼쳐 표시해 둔 부분을 서지훈 교수에게 보여주었다. 판형이 굉장히 크고 글씨가 깨알 같아 보기 힘들었지만 센스 있게 형광펜이 칠해져 있었다.
행간을 따라 움직이던 서지훈 교수의 눈매가 좁아졌다.
“가만……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보던 줄거린데.”
“김교제의 <비행선>이요.”
“아아! 맞아. 확실히 그렇군.”
서지훈 교수는 명인대 박사과정 시절 송현우 교수와 함께 신소설 전집을 편찬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서지훈 교수는 놀라움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설마 네가 찾아낸 거냐?”
“예. 약간의 운이 따라주긴 했지만요”
“그래도 로또보단 좀 아닌 거 같은데? 아무리 요즘 당첨자가 많다고 해도 말이다.”
“이 사실을 학계에 발표하면 제가 최초로 밝힌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돈도 중요하긴 하지만, 역시 학계에 이름을 남기는 게 더 좋아요.”
“너 요즘 통장 잔고가 많아져서 그래.”
농담을 던지긴 했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도 대학원생 시절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의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잠시 추억에 잠기던 서지훈 교수가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표정이 일순 진지해졌다. 이제는 민우의 은사로서 그가 나아갈 방향을 잡아줄 때였다.
“자, 원작을 네가 밝혀냈다고 치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 자료를 강일이에게 주는 건 어떨까 생각을 해 봤어요. 녀석의 논문은 그만큼 대단했으니까. 제가 자료를 준다면 정말 멋진 논문이 만들어지겠죠.”
서강일의 논문은 수준이 상당했다. 무엇보다도 국내 최초로 한국의 초기 과학소설의 수용사를 다뤘다는 점에 프리미엄이 붙었다.
김교제의 <비행선>의 원작을 밝히지 못한 점은 옥의 티였다. 만약 자료를 그에게 준다면 문학사에 길이 남을 논문이 탄생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서강일이 진정 원하는 바일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건 기만이라고 생각했어요. 강일이는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하고 있으니까요. 아마 이 사실을 알려주면 오히려 화를 낼 겁니다.”
“한일대에도 재미있는 녀석이 하나 있었구만. 그럼 답은 하나뿐인데? 너도 논문을 하나 준비해야겠어.”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계획은?”
서지훈 교수가 날카롭게 물었다.
평범한 대학원생이라면 논문 계획 수립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민우는 다르다는 걸 안다. 하루면 충분할 것이다.
역시나 민우는 연구노트를 꺼내 어젯밤에 정리한 내용을 읽었다.
“우선 <비행선>의 수용 과정을 실증적으로 밝히고, 나아가서는 다임 노블의 특성을 규정해 볼 생각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문학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논해 봐야죠. 아마 찾다 보면 걸리는 작품들이 더 있을 겁니다.”
“흐음, 나쁘지 않네. 하지만 꽤 큰 작업이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그 당시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대개 중역(重譯)이었으니까. 중국이나 일본 쪽 자료를 찾아봐야 할 거다.”
“그건 괜찮습니다. 어느 쪽이든 읽는 데 문제는 없으니까요.”
서지훈 교수는 잠시 잊고 있었다. 민우에게 언어적 장벽은 무용지물이란 사실을. 서지훈 교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감이 너무 지나친데?”
“그래 보였나요?”
“아니 뭐, 그건 됐고. 좋아. 네 생각대로 한번 해 봐라.”
“감사합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에게는 아직 중요한 질문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근데 토론에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네 발견이 발표자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건 자명하지만, 원작을 그냥 밝혔다가는 다른 연구자들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도 있을 텐데.”
“아마 일반적인 토론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민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
서지훈 교수의 두 눈에 흥미가 맺힌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는 달뜬 눈으로 민우가 이어갈 말을 기다렸다.
“토론에서 물어뜯기만 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젊은 만큼 새로운 시도를 좀 해보려고요.”
“새로운 시도라. 하하하. 여우 같은 곰이로군.”
서지훈 교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리로 돌아간 그는 달력을 펼쳐 6월 23일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날은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 재미있는 장면을 놓칠 수는 없지. 준비 잘해 봐라. 학계 선배들에게 젊은 피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주라고.”
“선생님도 청심환 하나 드시고 오세요.”
“뭐 인마?”
사제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머그잔을 비운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슬슬 시동 걸어야 해서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작년처럼 쓰러지면 죽도 밥도 안 되니까.”
“옙. 조심하겠습니다.”
연구실을 나선 민우는 307호로 돌아왔다.
때마침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뉴욕 버팔로에서 온 메일이었다. 첨부파일을 확인한 민우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좋아. 이제 준비는 모두 끝났어.’
남은 기간은 한 달.
새로운 도전을 향한 민우의 철야가 시작되었다.
* * *
삐비비빅― 삐비비빅―
알람이 울렸다. 하지만 민우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잠에 빠져 있었다.
“오빠. 일어나야지. 어제 늦게 잘 때 알아봤다니까. 어서 일어나!”
이수빈이 목소리를 높였다. 수빈은 들고 있던 주걱으로 엉덩이를 한 대 때릴까 하다 참았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었으니까.
“5분만…….”
“안 돼. 일어나. 빨리 아침 먹고 학회 가야지. 응?”
“…….”
민우가 또다시 잠들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수빈이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현관으로 가더니 문을 여닫았다.
“어머, 레아 씨.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헉!”
민우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쿡쿡 웃은 이수빈이 민우의 손을 잡아당겨 일으켜 주었다.
당했다.
한숨을 내쉰 민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화장실로 좀비처럼 걸어갔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오니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냥 시리얼 먹고 간다니까.”
“그래도. 명인대 국문과 대표로 싸우러 가는데 이 정도는 먹어야죠.”
“누가 들으면 전쟁터 가는 줄 알겠네.”
민우는 밥공기를 깨끗이 비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늘 그렇듯 넥타이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수빈이 하나 목에 걸어주었다.
못 보던 넥타이였다. 흰색과 푸른색이 잘 어우러진 멋진 넥타이였다.
“이건 어디서 났어?”
“울 엄마 선물. 중요한 발표 있다고 하니까 백화점에서 하나 사다 주셨어요.”
“센스 좋으시네. 끝나고 전화 한번 드려야겠다.”
수빈이 싱긋 웃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두 사람이 집을 나섰다.
눈부시게 빛나는 여름날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