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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여름날 (1) (169/500)


169. 눈부시게 빛나던 어느 여름날 (1)
2022.02.28.


“박 쌤!”

정은아 대리가 소리친 덕에 졸고 있던 윤정민 팀장이 팔을 휘적이며 일어났다. 의자가 갑자기 뒤로 밀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어이쿠! 뭐야. 왜들 소란이야?”

“또 주무시고 계셨어요? 으이그, 약주 좀 적당히 하시라니까. 거래처도 중요하지만 이젠 팀장님 건강도 생각하셔야지요.”

“쯧, 마누라처럼 또 잔소리야?”

“박 쌤 왔어요.”

“뭐? 박 선생이? 오!”

눈을 동그랗게 뜬 윤정민 팀장이 민우를 알아보고 악수했다. 사실 그가 눈을 크게 뜬 건 민우 뒤에 있는 레아 덕분이었다.

다른 직원들의 시선도 민우보다는 그쪽을 향했다. 혼혈 외국인을 보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니까. 게다가 미인이었고.

윤정민 팀장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박 선생. 무슨 일로 예까지 왔어? 연락도 없이.”

“오늘 세 시에 프로젝트 미팅이 있어서요. 15층 가다가 잠시 들렀어요. 시간 남아서.”

“잘했어!”

뒤늦게 나온 장철호 주임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기회를 엿보던 정은아 주임이 민우의 옆구리를 슬쩍 치며 조용히 물었다.

“얼마 전에 학회 때문에 미국 갔다는 얘기 들었는데, 그새 여친 바뀐 거예요?”

“아아뇨.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민우는 소개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차피 앞으로 지음사와 함께 오픈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자주 얼굴을 비춰야 할 것이다.

“레아 씨. 이쪽으로.”

민우가 부르자 레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몇몇 남직원들이 감탄사를 흘렸다.

민우가 그녀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쪽은 센트럴 북스의 레아 씨입니다. 제 업무 파트너예요. 인문과학총서 번역은 물론이고 오픈 라이브러리 프로젝트 관련해서 많은 도움을 주실 겁니다.”

“레아 앤더슨입니다. 반가워요. 여러분.”

레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내심 감탄했다. 자신을 비서라고 소개할 줄 알았는데, 민우는 ‘업무 파트너’라고 소개했다.

비서와 업무 파트너. 한국에서 오래 생활한 레아는 두 단어의 뉘앙스가 상당히 다르다고 느꼈다. 그 중심엔 민우의 배려가 있었다.

‘왠지 매니저님이 조수석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은데.’

자신을 비서로 부리려는 게 아니라, 업무상의 동료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 레아는 민우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는 대화의 주인공이 되어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엔 레아는 직원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훑었다. 그리고 나름 평가를 내렸다.

‘사람들의 표정에 가식이 없어. 인정받는 사람이었구나. 우리 매니저님은.’

그녀의 판단은 늘 정확했다. 어느새 레아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대화를 경청했다.

“그래서 계약을 하게 됐습니다. 학회 도중이라 좀 경황이 없었는데,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민우는 학회 차 미국에 나가 있을 때 센트럴 북스와 프로젝트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모두가 놀라며 축하해 주었다.

“와,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사실이었네! 축하해요. 박 쌤. 지음사 나가더니 일이 술술 풀리네요. 왠지 우리가 발목 붙잡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아녜요. 그런 거. 저도 여기서 많이 배웠는걸요. <태엽시계> 번역도 했고.”

“혹시 센트럴 북스 때문에 연구원 연장 신청 안 한 거 아닙니까?”

정은아 대리에 이어 장철호 주임이 짓궂은 말을 던졌다. 민우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여기에서 또 일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팀장님. 아직도 연구실 비어 있나요?”

“뭐 그렇지. 석사급 연구원을 하나 구해야 하긴 하는데 적당한 인물이 없어서 큰일이야. 아, 그렇지. 박 선생이 추천 좀 해 줄 수 있나? 친구들 중에서.”

“하하하. 전 아직 누굴 추천할 만한 짬이 안 됩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얘기 좀 해 줘. 채용 여부는 만나보고 판단하면 되니까.”

마침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 하나가 있긴 했다. 하지만 민우는 말을 아꼈다. 본인에게 먼저 의향을 묻고 일을 진행하는 게 좋으니까.

“괜찮은 친구가 있긴 한데, 한번 물어보고 말씀 드릴게요.”

“어! 좋지. 얼마든지. 어떤 친구인데?”

“이번에 명인대 국제어학원에서 한국어 강의하는 친구입니다. 저랑 동갑이고요. 한국어 관련 교재를 개발해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국내는 물론 동남아 시장에서 수요가 은근 많다고 들었어요.”

“호오!”

윤정민 팀장이 탄성을 흘렸다. 얼핏 들어도 솔깃했다. 그가 정은아 대리를 바라보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거 재미가 쏠쏠할 거 같은데? 자리 좀 한번 마련해 줄 수 있겠나?”

“돌아가서 친구랑 얘기해 볼게요. 그럼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일하시는데 제가 너무 오래 방해했네요. 또 놀러 올게요.”

민우는 인사를 하고 레아와 함께 한 층 올라갔다. 출판기획실 입구에 들어가니 전남규 차장이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 기다리고 계셨어요?”

“민우 씨. 안녕하십니까. 하하하. 이렇게 또 뵙게 되네요.”

“잘 지내셨죠?”

민우는 진심으로 반가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전남규 차장은 아직도 자신의 블로그에 들러 가끔 댓글을 남겨주고 있었다. 이 사람과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못 지내고 있다가 민우 씨 소식 듣고 잘 지내게 됐습니다. 아, 이제 매니저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이거 실례를.”

“아닙니다. 호칭이 중요한가요. 예전처럼 편하게 해주세요.”

“아마 그랬다가는 송 실장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아시잖아요.”

“하긴. 그렇죠.”

민우는 동의했다. 원칙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민우 씨’라고 불렀다가 불호령이 떨어질 게 눈에 빤히 보였다.

“근데 뒤에 계신 분은?”

“센트럴 북스 본사에서 오신 레아 앤더슨 씨에요. 제 일을 도와주고 계세요. 오늘 미팅에 함께 하실 겁니다.”

“오, 반갑습니다. 미인이시네요. 괜찮으시면 끝나고 식사나 한번…….”

“레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레아는 사무적인 어조로 인사를 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간단히 인사를 교환한 세 사람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곧 전남규 차장이 송승현 실장을 모시러 자리를 잠시 비웠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외의 인물이 들어왔다. 고두열 과장이었다. 썩 반갑지는 않았지만 민우는 기꺼이 그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오랜만입니다.”

태도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고두열 과장이 정중히 인사했다.

“오셨다는 얘기 듣고 잠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그간 어떠셨습니까? 미국에 다녀오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여러모로 바빴습니다. 이제 석사 논문도 써야 해서요.”

“전에 인터뷰 하나 하셨죠? 기사 잘 뽑혔더군요.”

“박윤지 기자와는 친분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호의적으로 잘 써줬더라고요.”

“앞으로도 언론 부분은 좀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다음에 시간 내서 제대로 인사드리지요.”

회의실을 나가는 고두열 과장의 모습을 보며 민우는 새삼스레 자신의 위치가 실감 났다.

미국에서 계약서를 쓰고 센트럴 북스의 프로젝트 매니저가 됐을 때, 단순히 게임에서 얻은 칭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변에서 하나같이 매니저님 하며 떠받들어 주니 기분이 묘했던 것이다.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중요한 건 내가 매니저라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를 어떻게 성공시키느냐는 거잖아? 번역을 잘할 생각만 하자고.’

민우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송승현 실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전남규 차장이 따랐다.

“안녕하세요. 박민우 매니저님?”

송승현 실장은 매니저라는 말에 묘하게 악센트를 넣었다. 왠지 놀리는 것 같은 느낌. 싱긋 웃은 송승현 실장이 마주 앉았다.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우연일까요?”

강철훈 교수의 추천을 받아 지음사에 연구원으로 입사한 것도, 송승현 실장을 만난 것도, 오픈 라이브러리 일에 얽힌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지만 민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왜냐하면 같은 장소에서 우연이 반복되면 그것은 이미 우연이 아니라 필연(必然)이니까.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민우의 짤막한 대답에 송승현 실장이 동의하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잘 아시겠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히 번역으로 끝나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인문과학총서 번역을 시작으로, 전 인류를 위한 공동의 지식창고로 활용될 리소스를 개발하는 게 목표죠. 그 가운데에 박 매니저가 있는 겁니다.”

“아뇨. 그건 아니죠.”

민우의 반문에 세 사람의 시선이 민우의 입을 주목했다.

“거기엔 실장님도 계시고 차장님도 계시고 여기 레아 씨도 함께 있는 거죠.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같이 해내는 거죠.”

송승현 실장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민우는 여전했다. 앞으로 수년, 수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돌연 송승현이 명제 하나를 꺼냈다. 조용한 회의실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남규 차장과 레아는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던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민우는 과거의 한순간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렐 차펙의 공연을 본 날이었지 아마?’

그때 민우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라고.

민우의 눈빛을 읽은 송승현 실장이 이어 당부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언젠가 제게 들려줬던 그 답변을 마음에 새겨뒀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어렵지 않겠죠?”

“물론이죠.”

“그럼 시작하죠.”

그렇게 인문과학총서 및 오픈 라이브러리 프로젝트를 위한 첫 미팅이 열렸다.

* * *

사흘 뒤, 정말 제임스 마렛이 나타났다. 자신의 부하 직원을 끌고서 말이다.

알렉산더 콕스는 키가 크고 빼빼 마른 라틴계 남자였다. 틈이 날 때마다 제임스와 만담을 즐겼는데, 민우는 식사를 하며 쉴 틈 없이 웃었다. 정말 죽이 잘 맞는 사람들이었다.

제임스가 냅킨으로 입술을 훔치며 물었다.

「어제 미팅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잘되셨는지?」

「일단 인문과학총서 번역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콘텐츠 기획은 지음사에서 맡아서 해주기로 했어요.」

「그렇군요.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이봐 알렉산더. 매니저님께 드릴 물건 챙겨 왔어?」

「여권보다 더 중요한 거라고 하셔서 말이죠.」

잔뜩 투덜거리며 알렉산더가 백팩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정말 크고 무거웠다. 시커먼 양장으로 된 책이었는데, 얼추 보기에도 천 페이지가 넘어 보였다.

민우가 두 손으로 힘겹게 받아들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개인적인 부탁이라 죄송하기도 하네요.」

「아닙니다. 아녜요. 무슨 서운한 말씀을! 인문학 관련 연구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도와드려야지요. 나중에 맛있는 열매가 될지 누가 압니까? 하하하.」

제임스 마렛은 늘 ‘투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지금의 자신을 보는 게 아니라 10년, 20년 뒤의 자신을 보고 계약을 하는 거라고.

민우는 일단 책을 펼쳐 보았다. 나머지 한 권은 옆에 있던 레아가 받아 챙겼다.

‘허, 이런 책이 있다니…….’

페이지를 넘겨보며 구성을 살펴보던 민우는 감탄했다. 발표연도, 스토리, 소재, 장르, 등장인물의 직업 등 다양한 카테고리로 작품이 정리되어 있었다.

컴퓨터가 아니라 종이책으로 어떻게 이런 작업을 했는지 신기했다. 1991년도에 나온 책이었는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저자의 노고가 느껴질 정도였다.

민우의 입가에 자연 미소가 걸렸다.

‘이거라면 찾기 쉽겠다. 일단 연도, 소재, 장르 정도로 분류하고 찾아볼까?’

어느새 민우가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직 식사를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알렉산더는 민우에게 식사를 마저 하라고 말을 건네려 했으나, 제임스가 손을 드는 바람에 하지 못했다.

“저게 박 매니저의 매력이지. 공부 중엔 방해하지 말라고.”

“이상한 취향이군요.”

제임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민우의 모습을 즐겼다. 엄청난 집중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 잠깐만.’

민우의 두 눈에서 총명한 눈빛이 반짝였다. 쭉 훑던 색인에서 핵심 키워드를 발견한 것이다.

민우의 손이 빨라졌다. 책장이 스르르 넘어갔고, 민우가 페이지를 재빨리 고정했다. 거기엔 소설 제목 하나가 씌어 있었다.

‘<탐정 닉 카터>?’

닉 카터는 주인공의 이름인 모양이다. 민우는 김교제의 <비행선>의 주인공을 떠올려 보았다. 그의 이름은 니개특.

‘니개특…… 닉 카터. 니개특? 아, 맞아. 이건 음차(音借)구나!’

민우는 소름을 느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바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곳엔 <탐정 닉 카터> 시리즈의 줄거리가 적혀 있었다.

민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멍하니 그것을 읽던 그는 돌연 미소를 지었다.

“빙고!”

민우의 외침에 세 사람이 깜짝 놀랐다.

물론 그것이 한국 과학소설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진 순간이라는 걸, 그들 세 사람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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