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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리턴 매치 (3) (168/500)


168. 리턴 매치 (3)
2022.02.25.


아침 일찍 일어난 민우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수빈은 아직 자고 있는지 톡이 와 있지 않았다.

민우는 그녀에게 일어났다고 톡을 하나 보냈다. 아침저녁으로 톡을 보내는 건 이제 습관이 되었다.

그때 핸드폰이 한번 진동했다. 수빈에게 답장이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녀석이 이 시간에 웬일이지?’

서강일에게서 온 톡이었다. 시간 괜찮으면 오늘 점심이나 한 끼 하자는 내용이었다.

스케줄을 확인한 민우는 오늘 한일대로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귀국 후에 일이 많아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만나는 김에 소르본의 밤과 IAHS 학회에서 구해 온 책자를 주기로 했다.

‘그럼 레아 씨에게 연락을 해둬야겠네. 오후에 지음사 스케줄도 있으니까.’

민우는 바로 레아에게 문자를 남겼다. 오늘 11시에 한일대에 가야 하니 이쪽으로 와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띵동―

벌써 일어나 있었는지 알겠다고 답장이 왔다. 민우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냥 버스 타고 갈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민우는 생각을 접었다. 자원봉사도 아니고 센트럴 북스에서 제공해 준 옵션이었으니까.

민우는 침대에서 일어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선선하니 뛰기 딱 좋았다.

‘석사 논문 들어가기 전에 운동 열심히 해 놔야지. 엉덩이 오래 붙이고 있으려면 체력이 중요하니까.’

기분 좋게 오전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민우는 안경을 쓰고 루카치의 유고를 펼쳤다.

늘 그렇듯 처음부터 정독했다. 마지막 페이지가 나왔고, 민우는 남은 빈 페이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잔상은 보이지 않았다.

민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유고를 덮었다.

‘다음 내용이 보일 때가 된 거 같은데 안 보이네. 미국에서 견문을 넓힌 거로는 택도 없다 이건가?’

처음엔 글씨가 보인 게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우는 생각을 바꿨다. 일정 자격에 도달했을 때 다음 내용이 보이는 거라고.

지금까지 루카치의 유물이 보여준 안배를 생각해 보면 그게 더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루카치의 유물을 100퍼센트 활용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안경과 만년필을 얻은 뒤에도 민우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결실을 얻었으니까.

결국,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민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 적어도 그게 밑지지 않는 장사니까.’

민우는 부담감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단히 집 청소를 하고 나니 약속 시간이 되었다. 가방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흰 세단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아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세련된 미소를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매니저님.”

며칠이 지나도 저 매니저라는 호칭은 적응이 안 됐다. 민우도 꾸벅 인사했다.

“아침부터 미안해요. 한일대에 좀 일이 생겨서요.”

“제 일인걸요. 앞으로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았어요.”

민우가 차에 오른 것을 확인한 레아가 운전석에 앉았다. 때마침 수빈에게 톡이 왔다. 민우는 한일대로 가고 있다고 답장했다.

그러자 전화가 왔다.

― 레아 씨 차 타고 가고 있어?

“응. 이따 지음사 바로 가야 해서. 프로젝트 첫 미팅 있거든.”

― 좋겠네~ 아침부터 미인이랑 드라이브도 하고.

“서울 시내에서 뭔 드라이브야.”

그동안 이수빈도 레아를 몇 번 만났다. 민우의 자취방에 자주 오가니까.

처음에는 꽤 질투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놀림거리가 됐다. 가끔 수빈이 던지는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깜짝 놀랄 때가 많아졌다.

그래도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했다.

누나의 결혼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이수빈도 지나가듯 이야기를 꺼낸다. 빨리 결혼해서 자리를 잡고 싶다고.

물론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민우는 진지하게 듣지는 않았다.

― 그럼 오늘 학교엔 안 와?

“미팅 끝나고 바로 갈 거야. 토론 준비해야지. 계속 학교에 있을 거지?”

― 응. 그럼 이따 저녁에 봐요.

“알겠어.”

― 뭐야. 그냥 끊으려고? 끊기 전에 해야 하는 말 있잖아.

민우는 난처했다. 곁눈질로 레아를 바라보니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수석에서 받는 전화다 보니 내용이 다 들린 것 같았다.

민우가 조용히 말했다.

“이따 두 번 해 줄 테니까 참아.”

― 흥.

간신히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전화가 또 왔다. 번호가 긴 걸 보니 해외 전화인 것 같았다.

「헤이! 민우!」

미셸의 목소리였다. 마치 들뜬 어린아이처럼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너무 일찍 전화한 건 아니죠? 여긴 한밤중이라. 하하하! 아무튼 민우가 좋아할 만한 소식 하나 물어왔어요.」

「좋아할 만한 소식이라면…….」

「맞아요. 그거! 딱 민우에게 필요한 자료를 하나 찾았어요.」

「정말요?」

민우가 영어로 통화를 하자 운전을 하던 레아가 관심 있게 힐끔거렸다. 민우는 핸드폰을 턱에 괴고 노트와 메모장을 꺼냈다.

미셸이 설명을 시작했다.

「소재, 줄거리, 장르, 인물별로 정리가 되어 있는 백과사전 같은 책이 하나 있어요. 켄트주립대에서 나온 책인데 제목은 < Science Fiction : the Early Years >이에요. 저자는 Everett F. Bleiler고요.」

민우는 저자명과 책 제목을 메모장에 적었다. 이제야 뭔가 일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그 책은 어떻게 알아냈어요?」

「동료가 다임 노블을 연구하고 있거든요. 그 당시 과학소설들이 굉장히 많이 나왔는데, 아마 그 책을 보면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래요.」

다임 노블(dime novel)은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미국에서 유행했던 대중소설을 통칭하는 말이다. 저가(低價)로 판매되어 인기를 끌었다.

민우는 메모를 하며 생각했다.

켄트주립대에서 발간된 학술서가 과연 국내에 들어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높은 확률로 특별 주문을 넣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2주 이상 걸릴지도 몰라.’

시간이 조금 촉박했다.

미셸에게 특별히 부탁할 수 있지만 그건 나중 문제였다. 일단 국내에서 빠르게 구해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한번 국내에 들어와 있는지 알아봐야겠네요. 아무튼 고마워요 미셸.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통화를 끝낸 민우는 핸드폰으로 웹브라우저를 실행해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검색해 보았다.

‘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국내 직판은 아니었다. 스페셜 오더로 주문이 가능하고, 예상 배송일이 4주에서 6주 사이였다.

민우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4주면 학회가 끝나잖아. 큰일이네. 프로존에서 직구를 해도 2주 이상은 걸릴 텐데.’

서강일이 양보한 4주라는 시간이 갑자기 짧게 느껴졌다. 민우의 한숨 소리를 들은 레아가 나섰다.

“매니저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아, 그게…… 구해야 하는 책이 있는데 배송에 좀 오래 걸릴 거 같아서요. 켄트주립대에서 출간한 책인데 학술서라 구하기가 좀 어려울 거 같네요.”

레아가 싱긋 웃었다. 민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조력자가 있었던 것이다.

“제가 본사에 연락해서 특급으로 보내 달라고 이야기해 볼게요. 제목을 알려 주시면 오늘 당장 메시지를 넣겠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길어야 일주일이죠. 매니저님께서 특별히 필요한 자료라고 요청하면 당장 보내줄 거예요. 그만큼 그룹에서 중요한 분이니까요.”

레아는 마지막 문장을 강조했다. 물론 민우는 아직 그게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럼 좀 부탁드릴게요.”

민우는 제목을 메모한 것을 찢어 레아에게 건넸다. 그러다 문득 서강일의 논문을 떠올리고는 한마디 첨언했다.

“이 책, 한 부가 아니라 두 부 구해 주세요.”

“그러죠.”

곧 차가 한일대 정문으로 들어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두 사람이 함께 내렸다. 레아가 늘 그렇듯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오늘 오후 세 시에 지음사에서 프로젝트 미팅이 있습니다. 두 시까지는 오셔야 해요. 전 근처에서 업무를 보고 있겠습니다. 말씀하신 책 배송 건 포함해서요.”

“알았어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할게요.”

고개를 살짝 숙인 레아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오기 전에 지리를 파악해 둔 모양인지 길을 헤매지 않고 바로 카페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우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문리대 건물로 향했다.

* * *

민우는 문리대 건물 앞에서 서강일과 만났다. 10층에 위치한 석사연구실까지 찾아가기는 좀 그래서 그를 불러냈다.

“오늘은 메로나 씨 안 보이네?”

“수업 갔어.”

“아무튼 오랜만이다.”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했다. 강일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던 민우가 물었다.

“너 살 좀 빠진 거 같다?”

“그래?”

확실히 그랬다. 피부도 좀 거칠어 보였다. 논문을 쓰느라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서강일은 뺨을 쓸어 만졌다.

“여기저기서 시달리느라 고생 좀 했지.”

“하긴. 논문 보니까 고생깨나 했겠더라. 그 많은 자료를 언제부터 찾은 거야?”

“학부 때부터 조금씩 모아둔 거 한 번에 질렀지. 나름 승부처니까 말이다.”

승부처라는 말에 민우가 씁쓸히 웃었다. 이번 학회가 끝나면 당분간 학회에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 학위논문을 준비해야 하니까.

민우가 말했다.

“학부 때라면 거의 2년 이상 준비한 논문이겠네.”

“그렇지. 근데 어째 넌 좋아 보인다? 미국물 먹고 오더니 분위기가 좀 달라진 느낌이네. 이래서 사람들이 해외파 타령을 하는 건가?”

“며칠이나 먹었다고 사람이 달라지냐.”

혀를 찬 민우는 가방에서 책자 뭉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미국에서 특별히 챙겨 왔다는 건 이미 전해 들었다.

“땡큐. 기왕이면 위스키 한 병 더 얹어 주지.”

“다음에 또 나갈 일 있으면 참고하마.”

“논문은 어땠어?”

아마 오라고 한 목적은 그 대답을 듣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민우가 가벼이 웃으며 답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얼마든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의미 있는 논문이라고 생각해. 학계의 통설에 정면으로 맞선 거니까. 석사 3학기 주제에.”

서강일이 피식 웃었다. ‘석사 3학기 주제에’라는 말은 오히려 자신이 민우에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화두는 <비행선>의 원작 확정이겠지. 기존의 통설이 잘못됐다는 건 입증했지만, 원작이 뭔지는 밝혀내지 못했으니까.”

“나도 아쉬운 부분이야. 원작을 찾은 다음 논문을 발표하는 게 순리이긴 한데…… 그게 뭐 하루아침에 되는 일인가? 운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마무리 짓지 못한 상태로 제출했지.”

“지도교수님은 별 얘기 없으셨고?”

서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어느덧 나란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민우가 고개를 돌려 서강일을 바라보았다.

“부담 갖지 마.”

“뭔 부담?”

“이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천하의 서강일이 이렇게 소심해질 줄이야.”

얼굴에 다 쓰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겠지만, 서강일은 씁쓸히 웃었다.

“아무래도 무대가 무대다 보니까. 리턴 매치잖아. 지도교수님은 떨어진 학교의 명예를 다시 찾아오라고 하시는데…… 말인지 방구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가끔은 내가 왜 공부를 하나 싶기도 하고.”

침묵이 돌았다. 민우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뒤, 민우가 말했다.

“그때 박수 소리 기억해?”

“그때라면…… 작년 겨울 학회?”

“어.”

“당연 기억하지. 어떻게 그 일을 잊겠냐.”

당시 토론이 끝나고 서강일은 깊은 패배감에 빠져 있었다. 겉으로는 졌다고 투덜거렸지만, 속은 많이 쓰렸다. 그런데 그때 민우가 한마디 했다. 우리가 만든 무대라고. 자신의 몫을 잘 챙겨 가라고.

“그럼 뭐 답은 간단하잖아. 이번에도 우리들만의 무대를 만들면 되는 거지. 최선을 다해서. 다른 거 신경 쓸 거 없이.”

그렇게 말한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강일이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는 웃으며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밥이나 먹자. 설마 멀리서 왔는데 그냥 보낼 생각은 아니지?”

* * *

민우는 점심을 먹고 바로 한일대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이미 레아가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가 조수석에 올랐고, 곧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사흘 후에 받아볼 수 있을 겁니다.”

“네? 아.”

민우는 무슨 얘긴가 싶었는데, 아까 부탁한 그 책 이야기였다. 빨라야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흘이라니.

레아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마침 제임스 편집장님이 계약 건으로 한국에 온다고 하셔서요. 그때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또 한국에 오시는군요.”

“알렉산더 콕스 씨도 함께 올 예정입니다. 그날 저녁에 괜찮으면 식사를 하자고 하시던데. 스케줄 잡아 놓을까요?”

“부탁해요.”

민우가 지음사에 도착한 것은 2시 40분이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어 민우는 인문사회팀에 먼저 들렀다. 오랜만에 인사하려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민우가 나타나자 다들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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