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 리턴 매치 (2) (167/500)


167. 리턴 매치 (2)
2022.02.24.


오후 수업이 끝났다. 석사생들은 한차례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우만 멀쩡해 보였다.

그때 뭔가를 떠올린 민영환 교수가 민우를 불러 세웠다.

“박민우. 이따 잠시 내 연구실로 오도록.”

“알겠습니다.”

민우는 일단 수빈, 진섭과 함께 307호로 돌아왔다. 책을 정리한 다음 바로 민영환 교수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진섭이 물었다.

“너 뭐 사고 친 거 있냐?”

“그 부정적인 사고회로 좀 어떻게 해 봐. 누가 들으면 맨날 사고치고 다니는 줄 알겠네.”

민우가 구박하자 수빈은 입을 가리며 킥킥 웃었다. 진섭은 오히려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런 의미의 사고가 아니라 긍정적인 거! 너 센트럴 북스랑 계약한 거 소문 쫙 퍼졌잖아. 선생님께서 뭔가 중책을 맡기시려는 게 아닐까? 딱 타이밍 왔는데.”

“아닐걸.”

“근거는?”

“아마 학회 때문일 거야. 강일이가 논문 보냈거든. 예진 누나가 민 선생님께 보고 드렸을 거고. 단순히 토론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개인과 개인의 경쟁도 아니었다. 지도교수인 민영환 교수는 물론 명인대 국문과의 위신이 걸린 문제기도 하다. 명인대와 한일대가 라이벌 관계라는 것도 있지만 서강일의 지도교수인 장소필 교수가 공개적으로 토론을 청했으니까.

한진섭이 민우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시원하게 털어버리고 와라. 응? 명인대의 위엄을 똑똑히 보여줘야지.”

빙긋 웃은 민우가 고개를 가로젓자 진섭이 눈매를 좁혔다.

“또 뭔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거야?”

“이번엔 좀 다르게 하려고.”

“다르게 한다뇨?”

“논쟁으로 상대방의 논지를 무력화시키는 게 꼭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볼까 해.”

올해 초 한국근대소설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던 경험이 컸다. 민우는 그때 토론자로 만났던 허윤종과의 인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당시 허윤종은 민우의 논문을 높게 평가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했다.

토론이 곧 논쟁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던 민우로서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쳇. 나도 참석할 걸 그랬네.”

아쉽다는 표정으로 진섭이 입맛을 다셨다. 민우의 영향 때문에 요즘 들어 지식욕이 한창 올라오고 있는 그였다.

민우가 이어 설명했다.

“토론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거 같아. 논문의 문제점을 찾는 것과, 논문을 새롭게 포장해서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

“당연히 후자가 더 어렵겠죠?”

수빈의 지적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를 찾고 대안을 제시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하지만 논문의 위상을 한 단계 올리는 일은 쉽지 않아. 이번엔 거기에 도전해 보고 싶어.”

“캬! 박 선생님의 드넓은 아량에 이 한진섭 감복했습니다!”

“야, 후배들 보기 부끄럽다.”

307호엔 석사 신입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한진섭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강일이도 크게 기분이 나쁘진 않겠네. 뭐, 성공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너라면 해내겠지?”

민우는 그저 웃었다. 자신은 있었지만 해보지 않고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민우가 사물함을 잠그고 돌아섰다.

“그럼 선생님 연구실에 다녀오마. 이따 저녁 먹을 때 보자고. 아 참, 근데 주예린은 오늘 왜 안 보여?”

진섭은 대답 대신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2권 원고 집필 중이라는 의미였다.

<세계수>의 해외 진출 건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민우는 그 길로 민영환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선생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한일대의 서강일이가 발표용 논문을 벌써 보냈다지?”

“예.”

민우는 가방에서 서강일의 논문을 꺼내 민영환 교수에게 건넸다. 논문을 받아든 그는 자리를 옮겨 정독을 시작했다.

“흐음…….”

과연 드높은 명성만큼 정독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가 논문을 내려놓았다.

“쥘 베른 소설의 수용사를 다뤘군. 실증적인 방법으로 씌어 있어서 논리적 정합성을 문제 삼기에는 상당히 까다롭겠는데?”

“까다롭긴 하지만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호오, 방향을 잡은 거냐?”

“선생님께서 예상하시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요.”

민영환 교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그는 민우의 능력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센트럴 북스의 ‘인문과학총서’ 번역을 맡게 된 것은 물론, 올해 초 한국근대소설학회에서 보여준 민우의 활약상이 이따금 들려오고 있었다.

민영환 교수는 민우의 석사 논문을 어떻게 쓰게 하느냐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를 노리는 것은 민영환 교수만이 아니었다.

명인대 영문과 교수들도 민우의 행적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 <태엽시계>의 영국 진출을 시작으로 번역가로서의 명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우가 토론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논문을 요약하자면 1910년 전후로 발표된 <해저여행>, <철세계>, <비행선> 이 세 소설의 원작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혔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자료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기가 쉽지 않아.”

“미완의 조각이 하나 남아 있어요.”

거기까지 말한 민우가 살짝 웃었다. 민영환 교수도 민우가 의도한 바를 이해하고는 그 점을 짚었다.

“김교제의 <비행선> 말이냐?”

“맞습니다. 아직까지 원작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은 소설이죠. 강일이도 학계의 통설이 틀렸다고만 입증해 놓은 상황이고요.”

지금까지 과학소설계의 통설은 김교제의 <비행선>이 쥘 베른의 <기구를 타고 5주간>이라는 소설을 번안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강일은 이번 논문을 통해 처음으로 학계에 이의를 제기했다.

<비행선>과 <기구를 타고 5주간>의 구성과 공간적 배경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통설이 틀렸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논문이죠. 마이너한 분야긴 해도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네 목표는 명확하겠군.”

“예. 토론을 통해 미완의 조각을 제 손으로 맞춰볼 생각입니다.”

선언하듯 민우가 말했고, 민영환 교수는 턱을 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았다면 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학교의 명예가 걸린 토론이었다.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민우는 그가 고민한다는 것을 알고 선수를 쳤다.

“단순히 비판의 목소리만 내는 건 재미가 없죠. 명인대의 클래스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고 오겠습니다.”

“친구라고 감싸려는 거 훤히 보인다. 인석아.”

그렇게 한마디 내뱉은 민영환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마음을 들킨 민우는 살짝 긴장했다. 과연 민영환 교수는 어떤 지시를 내릴까.

마음 같아서는 진흙탕 싸움을 지시하고 싶었다. 민우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서강일의 논문을 깎아내릴 수 있을 거라고 판단되었으니까.

하지만 민영환 교수는 더 재미있는 싸움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원작을 찾는 작업은 정말 힘들지. 특히나 서양에서 건너온 것들은. 해외에서 자료를 가져와야 하는 부분이 생길 텐데 대비는 되어 있나?”

“이번에 IAHS에 다녀오면서 친구를 하나 만들었어요. 미셸이라고 문학 전공하는 친구인데, 연구 자료는 이 친구에게 부탁하려고 합니다. 우선 원작으로 의심되는 리스트를 좁히는 일을 해야겠죠.”

“그렇지.”

민영환 교수의 머릿속에 대강의 그림이 그려졌다. 제법 선명했다. 일이 제대로만 풀린다면 명인대 국문과의 위상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진흙탕 싸움보다 훨씬 고고하고 지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좋아. 네 구상대로 한번 해 봐라!”

“감사합니다.”

민우가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영환 교수는 노파심에 한마디 더 던졌다.

“잊지 말고. 이건 너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거. 알지?”

생각은 달랐지만 민우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가는 길은 달라도 결국 목적은 같은 거니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구실을 나선 민우는 곧장 중앙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세 시간 동안 자료와 씨름한 민우는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쪽 분야는 정말 연구가 안 되어 있구나.’

제대로 된 과학소설사를 기술한 책도 없었다. SF 작가 풀이 적은 만큼, 연구도 거의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2000년 이후로 조금씩 연구가 된 게 다였다.

‘일단 과학소설이 아니라 20세기 초 번안소설 연구로 자료를 찾아봐야겠다.’

번역과 번안은 다르다. 번역은 텍스트의 의미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지만, 번안은 시대와 문화에 맞게 각색을 하는 것이다.

몇 가지 참고할 만한 논문을 인쇄한 민우는 열람실로 돌아와 정독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실망감에 빠졌다.

‘참고할 만한 게 없다. 한두 줄 언급된 게 다네.’

민우는 한숨을 쉬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눈만 쉬었다. 뇌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뭔가 다른 접근 방법이 필요해.’

논문이 막힐 때마다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기본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을 상기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논문의 기본은 역시 텍스트지.’

민우가 움직인 곳은 도서검색대였다. 민우는 <비행선> 원작을 살펴보기로 하고 자료의 위치를 찾았다. 신소설 전집이 리스트에 출력됐다.

다행히 아무도 빌려 가지 않아 민우는 책을 찾아들고 다시 열람실로 돌아왔다. 줄거리와 인물 관계를 메모하며 꼼꼼히 작품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탐정. 의문의 사건을 추적하기 위해 비행선을 타고 떠나는 모험…… 당시 시대상을 본다면 특이하긴 한 소설인데.’

그런다고 길이 쉽게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민우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도서관을 나서야 했다. 벌써 저녁 시간이라 307호 멤버들이 인문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섭이 물었다.

“성과는 좀 있었어?”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냐.”

“하긴, 그렇게 쉽게 풀리면 개나 소나 논문 쓰지. 그나저나 오늘 메뉴는?”

아무도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날에는 자동으로 학생식당행이었다.

수빈과 진섭, 그리고 예린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하지만 민우는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며 숟가락을 떴다.

결국, 민우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소재나 등장인물 이름으로 작품명을 검색할 수 있는 책이나 포털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한숨이 나왔다. 서강일이 끝내 <비행선>의 원전 찾기에 실패했다는 것은 그런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민우가 생각을 이어갔다.

‘무엇보다도 해외 자료를 찾아야 해. 그쪽에 접점이 없다면 찾기가 힘들겠지. 한번 미셸과 상의해 보는 게 좋으려나?’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뉴욕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5시가 좀 넘었다. 민우는 서너 시간 후에 미셸에게 전화를 해 보기로 했다.

“참, 선배. 아까 저 찾았다고 들었는데요? 왜요?”

“해외 진출 건으로.”

“벌써 정해졌어요? 어디랑 이야기가 되고 있죠?”

“센트럴 북스.”

“헉.”

셋 모두가 깜짝 놀랐다. 주예린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우가 오해하지 않게 덧붙였다.

“말 그대로 검토 단계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그쪽 눈 높은 거 알지?”

“알죠. 하지만 괜찮아요. ‘작가님의 글은 흥미로우나 우리 출판사와는 맞지 않습니다’라는 글은 질리도록 받았으니까 이제 면역력이 생겼어요.”

“영어로 오면 좀 색다를걸?”

세 사람은 식사를 끝내고 인문관 지하에 있는 카페에 들렀다. 웬일로 후식 커피는 주예린이 샀다. 좋은 일을 해야 좋은 일이 생긴다면서.

307호에서 내일 수업을 준비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민우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전화를 걸었다.

「미셸. 저 민우예요. 전화 괜찮아요?」

「물론이죠!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뭐 하나 물어보려고요. 혹시 과학소설에 관심 좀 있어요?」

「관심은 있긴 한데 마니아 수준은 아니죠.」

민우는 용건을 말했다. 현재 찾고 있는 소설이 하나 있는데, 지명과 소재를 가지고 작품 제목을 특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물었다.

「으음, 그건 좀 어려운데요. 색인이 있는 책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일단 내 친구들하고 교수님들께 물어볼게요. 1910년대에 번안된 소설이라고 했죠?」

「맞아요. 정확히는 1912년인데, 그 전에 발표된 소설에 대한 데이터가 있어야 해요.」

「그나마 연도가 확실해서 다행이네요. 오케이. 내가 알아보고 연락할게요.」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수면보조등을 켜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워낙 막연한 부탁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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