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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리턴 매치 (1) (166/500)


166. 리턴 매치 (1)
2022.02.21.


레아의 운전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차는 매끄럽게 움직여 빌딩 주차장에 정차했다. 군더더기 없는 주차실력이었다.

레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매니저님. 오후 강의가 세 시부터라고 하셨죠?”

“네.”

“그럼 적어도 한 시 반에는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미팅 끝나면 바로 나올 생각이에요. 길어지진 않을 겁니다. 근데 레아 씨. 매니저라는 호칭이 좀 부담스러워서 그런데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시겠어요?”

약 한 시간,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레아는 ‘매니저님’이라는 호칭으로 깍듯이 대했다. 나이도 비슷한 입장에서 민우는 그게 좀 부담스러웠다.

레아는 싱긋 웃었다.

“그건 안 됩니다. 본사 방침이라 사적인 호칭은 금지되어 있어요.”

“그렇군요.”

프로의식이 대단했다. 괜스레 멋쩍어진 민우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민우가 차에서 내리자 레아도 가방을 들고 따라 내렸다. 민우는 문득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려는 건가 싶어 머뭇거렸다.

“저는 근처 카페에서 업무를 하고 있겠습니다. 용무 끝나시면 연락 주세요.”

“아, 예.”

레아가 먼저 건물을 나섰다. 민우는 내심 감탄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싶었는데 눈치껏 자리를 피해줬으니까.

‘뭔가 굉장히 유능한 사람 같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민우는 계단을 올랐다. 곧 라온북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다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저희야 야근하는 거 빼고는 잘 지냈죠. 미국은 어떠셨어요? 유명한 학회에 초대받으셨다고 들었는데.”

“나이도 젊으신데 대단해요. 멋진 교수님이 될 거 같은 느낌?”

직원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민우는 하나하나 인사하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전에 있었던 독점 계약 사건이 알려지면서 민우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다. 남자 직원들은 의리남이라 말했고, 여자 직원들은 훈남이라 말했다.

물론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명인대에서 석사를 하고 있고 6개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한다. 훤칠한 외모는 옵션. 무엇보다도 천성이 선하고 겸손한 것이 그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곧 현기혁 팀장이 나타나자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민우가 먼저 인사했다.

“죄송해요. 팀장님. 차로 바로 오느라 뭘 못 사 왔네요. 다음엔 양손 무겁게 올게요.”

“그거 무슨 섭한 말씀을. 아닙니다. 와 주신 것만으로도 저희한테는 큰 선물이죠.”

“하하하. 왠지 더 부담이 되는데요? 그런데 유리 씨는요?”

민우가 묻자 파티션 너머에서 손이 하나 올라왔다. 이유리였다. 그녀는 전화를 받고 있어 손만 흔들어 보였다.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민우가 물었다.

“대표님은 나오셨나요?”

“아뇨. 출타 중이십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안에서 이야기 나누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자자! 다들 업무들 하시고.”

두 사람이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커다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장연아 주임이 이유리 대신 마실 것을 내왔다. 민우는 잘 마시겠다며 꾸벅 인사했다.

딸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회의실엔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갑자기 연락을 주셔서 좀 놀랐습니다. 혹시 말인데…… 주예린 작가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민우는 웃으며 음료수를 홀짝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일까. 현기혁 팀장은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로는 애가 탔다.

그는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좀 걱정이 들었습니다. 어제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모습을 봤는데, 주예린 작가님이 좀 내켜 하지 않으시는 거 같더군요.”

“나름 사정이 있어서요.”

“역시 저희 출판사가 미덥지 못하신 걸까요?”

현기혁 팀장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민우가 혹여나 오해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살짝 웃으며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개인적인 일이 좀 있었어요. 원래 순문학 하던 친구라 장르소설을 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거든요.”

“아, 그랬군요. 전 또 계약 무른다고 하실까 봐 노심초사했습니다. 하하하.”

민우가 두 손을 모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진지하게 운을 뗐다.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요. 자기 작품 선택해 준 것에 대해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정말 아끼는 후배거든요.”

“작가님은 참 복이 많으시네요. 이렇게 멋진 선배님을 두시고.”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사실 베풀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학부 시절, 그녀에게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좋은 추억도 많았고.

이번 번역은 베푼다는 의미보다는 갚는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했다.

현기혁 팀장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다른 말 하지 않고 실적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세계수>는 일반 서점으로 유통시켜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작품입니다. <더 위자드> 풍의 정통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잘 먹힐 겁니다.”

그게 라온북스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비록 2부 판권을 따내지는 못했지만, 라온북스는 <더 위자드> 1부를 출간해 출판시장에 이름을 선명히 남겼다.

민우가 물었다.

“출간 날짜는 잡혔나요?”

“7월 중순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미 1권 원고는 전달받은 상황이고, 작가님께 여쭤보니 2권은 다음 달에 완성된다고 하더군요. 1권과 2권 동시 발매로 나가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판 실무는 잘 모른다. 이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

“이거 작가 본인도 없는데 너무 작품 이야기만 하고 있었네요. 사실 제가 온 건 말이죠.”

민우는 가방으로 손을 뻗어 안에 있는 인쇄물을 꺼냈다. <세계수>의 영문번역본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건 뭔가요?”

“일단 한번 보시죠.”

그것을 손에 쥔 현기혁 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우가 부연 설명을 했다.

“<세계수> 영문번역본입니다. 해외 진출 준비 부탁드리려고요. 물론 제가 번역한 거고. 완결까지 제가 번역할 계획입니다. 아니, 계획이 아니라 약속이에요. 작가와 그렇게 얘기가 됐거든요.”

그제야 현기혁 팀장이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일전에 민우가 미국에 있을 때, 계약서의 해외 판권 부분을 디테일하게 작성해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게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유리 씨한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거군요?”

“기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하는 게 좋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좋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우 씨의 번역이라면 어디든 찔러봐도 승산이 있겠죠. 한번 추진해 보겠습니다.”

그냥 던져본 말은 아니었다.

최근 영국에서 출간된 <태엽시계>가 점차 주목받고 있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에 토막기사로 짧게 소개되기도 했고, 도서 관련 공중파 방송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원작의 작품성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 작품을 영국이라는 문화에 잘 스며들게 만든 것은 민우의 능력이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의 번역이라면 어느 누구보다 믿을 만했다.

“교섭에 들어가기 전에 한번 만나보셨으면 하는 출판사가 있는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다리를 놔드려도 괜찮을까요?”

“실례는 무슨요. 환영이지요. 거기가 어딥니까?”

민우는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명함을 하나 건넸다. 센트럴 북스의 편집장 제임스 마렛의 이름이 박힌 하얀 명함이었다.

“이제 남의 거 가져다 팔지 말고, 우리 거 한번 팔아보죠. 크고 아름답게.”

민우의 한마디엔 근거 있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 * *

용무를 마친 민우는 사무실을 나섰다. 점심 식사를 하고 가라는 청을 뿌리치느라 꽤 애를 먹었다. 강의 핑계를 대고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레아는 시동을 걸고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가 나타나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거… 마치 기업의 중역이라도 된 거 같단 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나와서 기다리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레아는 비즈니스라고 선을 그어 버렸다. 더 이상 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주도 늘 이런 느낌이려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민우는 뒷좌석에 가방을 내려놓고 조수석에 탔다. 레아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 했다.

“매니저님. 뒤에 타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괜찮아요. 전 조수석이 더 편합니다.”

더 편하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레아는 안전벨트를 매고 엑셀을 밟았다. 차가 장항IC를 지나 자유로에 진입했다.

레아가 능숙하게 차선을 좌측으로 바꾸며 물었다.

“용무는 잘 끝내셨나요?”

“이제 시작이죠.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학업에 일까지. 정말 바쁘시겠어요.”

“덕분에 많이 편해졌어요. 레아 씨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겠죠.”

민우는 뒷좌석에 놓은 가방을 끌어당겨 안에서 전공책을 꺼냈다. 오늘은 민영환 교수 수업이 있다. 다시 한번 살펴보며 부족한 부분을 체크했다.

레아는 뮤트 키를 눌렀다.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알아서 해주니 민우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연히 차 안은 고요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진동을 느낀 민우가 책을 잠시 덮어두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메일 알람이 하나 와 있었다.

‘현대문학연구학회에서 온 메일이네. 뭐지? 설마 강일이가 벌써 원고를 보냈을 리는 없고.’

아직 학회까지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보통 학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에 발표 원고를 마감하니 그 무렵에 올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깨달았다.

‘진짜 설마가 사람 잡는구나!’

현대문학연구학회 총무간사이자 민우의 선배이기도 한 강예진이 보낸 메일에는 서강일의 발표 논문이 첨부되어 있었다.

민우는 장탄식을 내뱉었다.

‘하, 이 자식. 정말 저질러 버렸네. 왜 벌써 논문을 보낸 거야?’

일찍 보낼 거라는 예상은 하긴 했다. 하지만 한 달 전에 보낼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논문은 길게 끌수록 이익이다. 자료 싸움이라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논리를 보강할 수 있다.

어쨌든 둘 중 하나다. 오판이거나, 그만큼 자신감이 있거나.

“무슨 일 있으신지요?”

“아뇨. 학회에서 메일이 왔는데 좀 그래서. 신경 쓸 거 없습니다.”

민우는 파일을 열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학교에 도착하는 대로 인쇄해서 읽어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느덧 차가 명인대 앞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민우는 정문 앞에서 세워달라고 말했다.

“인문관까지는 거리가 꽤 될 텐데요?”

“날씨도 좋고 해서 걸어가려고요. 앞으로는 정문에 내려주세요. 이렇게라도 걷지 않으면 운동 부족에 걸릴 겁니다.”

나름 논리적으로 말한 탓에 레아가 수긍했다. 실은 주변의 이목 때문이었다. 금발 혼혈 미녀의 차를 타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면 골치 아플 것이다.

“그럼 전 사무실에 돌아가 있겠습니다. 이따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오겠습니다.”

“아뇨. 오늘은 바로 퇴근하세요. 전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거든요. 앞으로는 필요할 때만 레아 씨를 부를게요. 그게 서로 편하겠죠.”

“알겠습니다.”

민우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창을 내린 레아가 살짝 묵례하고는 차를 돌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민우는 곧장 인문관 307호로 들어갔다. 몇몇 후배들이 공부하고 있다가 민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민우의 관심은 오로지 강일이 보낸 논문이었다. 공용 컴퓨터에 앉아 논문 파일을 열고 인쇄를 걸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강예진이 나타났다.

“박민우. 언제 왔어?”

“방금요.”

“메일 확인했지?”

민우는 손에 쥔 논문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학회 총무간사 2년 차인데 그렇게 빨리 원고 보내는 사람은 첨이다 진짜.”

“좀 독한 애예요. 전에 국제비교문학회에서 토론했던 친구입니다.”

“아, 걔였어? 어째 이름이 낯익더라.”

강예진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작년 겨울, 민우가 서강일을 압도한 건 명인대 국문과에서 유명한 일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한번 털어주면 되겠네.”

“말이야 쉽죠.”

어느새 민우는 인쇄한 논문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두 눈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했다.

끝까지 읽은 민우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첫 페이지로 돌아왔다. ‘1910년대 과학소설의 수용사 연구’라는 제목이 보였다. 민우가 보기에 이건 단기간에 준비한 논문이 아니었다.

‘적어도 반년…… 아니 일 년 이상은 준비한 논문이야. 기존에 하던 연구를 확장시켰어. 견고한 느낌이네.’

하지만 민우는 웃었다. 이미 그의 눈엔 몇 가지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이제 이걸 어떻게 요리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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